2019-01-17
가방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는 것은 아마도 크기와 모양일 거다. 그다음이 사용자의 취향, 성격, 개인적인 특성에 따른 소재, 컬러, 무게 같은 세부적인 사항이다.
예쁜 외관에도 불구하고 쓸수록 힘든 가방이 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내부 공간이 불편하거나 너무 무거운 가방일 경우가 그렇다. 유행이 지나거나 디자인이 너무 강해서 오래 쓰지 못하는 가방도 있다. 곁에 오래 두고 쓸 물건을 기본 디자인으로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메일팩의 가방
갈수록 공간이 좋고, 가볍고, 기본에 충실한 가방을 찾게 된다. 메일팩(mailpack)은 무엇보다 ‘공간’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기본에 충실한 공간으로서의 가방을 만든다. 가방의 기본적인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디자인은 최소화한다.
가방의 소재는 메일팩을 특징짓는 요소다. 메일팩의 소재는 종이를 재가공한 원단으로, 종이처럼 보이지만 물에 젖지 않고, 찢어지지 않는다. 물론 가볍다.
지난 12월 메일팩이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부스 디스플레이는 관람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스스로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는 종이상자는 메일팩의 공간과 소재, 디자인에 대한 특징과 의도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관람객 바로 앞에서 제품에 사용되는 원단을 재봉틀로 박음질해 나누어주는 퍼포먼스는 메일팩의 특별한 소재를 알림과 동시에 손으로, 메일팩의 제품이 하나하나 정성껏 제작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패션으로서의 가방이 아닌, 공간이 된 가방. 다음은 조민규 아트 디렉터가 들려주는 메일팩의 이야기다.
mailpack
메일팩은 공간으로서의 가방을 만든다.
메일팩의 멤버
한국 디자인계가 주목하고 있는 굴지의 브랜드에서 컨텍스츄얼 큐레이터(Contextual Curator), 신알러지스트(Scenologist)로 활동하고 있는 크루들과 현업 모델 등이 함께 하고 있다.
가방=공간
공간의 일환으로 가방을 선택했다. 현대사회에서 가방이 지니는 다양한 사회적 의미 중, 오로지 ‘공간에 담는다’라는 속성에 주목했다. ‘공간’의 크기는 사용자가 지니고 다니는 물건의 양이며, ‘끈’은 사용자가 물건을 지니는 방식을 뜻한다. ‘공간’의 크기는 사용자의 이동 반경을 뜻하고, ‘끈’의 모양은 사용자의 두 손이 어떤 형태로 자유로운지를 보여준다. 패션디자인이라기보다 ‘가방을 공간 디자인했다’고 할 수 있다.
메일팩의 소재. 종이같지만 물에 젖지 않고 찢어지지 않는다.
종이인 듯 종이 아닌 종이 같은 가방
일반적으로 가방에 쓰이지 않는 소재다. 우리들이 내구성을 보완하기 위해 재가공한 펄프 원단이다. 마치 종이 같은 촉감과 질감이지만, 조직구조가 매우 짜임새 있어 굉장한 내구성을 갖고 있다. 보기엔 종이처럼 약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반 원단보다 훨씬 강하고, 절대 찢어지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매력을 지녔다.
스트랩은 천연 베지터블 가죽을 사용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용자에 맞춰 태닝이 되고, 자연스러운 변형이 생긴다. 루이비통 가방의 손잡이에 쓰이는 가죽과 같은 소재다.
메일팩 컬렉션 Area.3
최소한의, 보편적인 디자인
최대한 디자인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가방이 원형에서 하나씩 하나씩 추가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면, 매일팩의 가방은 모든 기능을 다 뺀 최소한의 형태만을 남겨 디자인된다. 가방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수납이고, 적절한 크기의 수납공간만 있다면 만족할만한 가방이 된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브랜드는 새로움을 강조하면서 디자인하지만, 우리는 애초부터 새로움이나 혁신이라는 목표를 지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 극점에 있는 최소한의, 오래되어 보편적인 디자인을 추구한다.
점점 커지거나 혹은 기계처럼 복잡해지는 가방을 볼 때면 세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빨라지는 것 같아 종종 무섭기도 하다. 멤버들은 매일팩의 최소한의 디자인이 결국에는 유행을 타지 않고 일상에 꼭 필요한 물건이 되리라 믿는다. 실제로 가장 애용하는 물건들은 변혁을 이끄는 첨단 기술이 아닌, 손때 묻은 지팡이와 같은 것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매일팩은 가방뿐 아니라, 포장 방식, 사진 촬영, 전시 기획 또한 최소한의 보편적인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디자인하지 않았고, 이미 존재해왔던 원형의 요소들로 구성했으므로, 이 컬렉션의 이름 또한 ‘아키타입(Archetype)’라 지었다. 젠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시간대와 장소, 격식에 구애없이 사용할 수 있다.
제품명도 심플하다. 이 제품의 이름은 Vol.2다.
Vol.6
공간 구성과 스트랩
공간의 크기를 10가지로 규격화했다. 책과 노트, 핸드폰이 들어갈 정도의 가장 작은 크기부터, 이케아 프락타 백만큼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크기의 가방까지 다양한 크기를 순차적으로 나눴다.
다양한 수치로 공간을 나누고 각각의 공간에 가장 알맞은 스트랩을 배치했다. 제일 작은 크기의 가방은 힙색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가장 큰 가방의 경우에는 사용 방식에 걸맞게 두 개의 어깨끈을 달았다. 이렇게 우리는 공간을 규격화하고, 그에 걸맞은 끈을 붙였다. 이 공간에는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이 자연스럽게 채워지게 된다.
Vol.9
Vol.10. 홈페이지에는 재료의 재료, 무게 등은 물론 몇 명의 장인이 몇 시간에 걸쳐 제작했는지에 대한 정보도 게재돼 있다.
78개 산업 종사자가 만드는 가방
단 하나의 가방이 만들어지기까지 정말 많은, 다양한 산업 종사자의 손을 거쳐야 한다. 메일팩의 가방을 예로 들자면, 원단을 직조하고, 붙이고, 재단하고, 인쇄하고, 봉재하고, 플라스틱을 발포하고, 재단하고, 금속 부자재를 주조하고, 도금하고, 도색하고, 가공하고, 가죽을 염장하고, 무두질하고, 염색하고, 실을 염색하고, 감는 등 모든 공정에서 분야의 전문가들의 손을 거치게 된다. 이것은 비단 메일팩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제품들이 그렇다. 이러한 스토리를 ‘78’이라는 숫자를 통해서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메이드 인 서울
제작 환경에 관해 말하자면, 적당히 타협하면 편할 수도 있다. 중국 생산의 경우 한국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40~60%가 저렴하고, 품질관리는 오히려 더 확실한 편이다. 단, 그곳 사람들의 열악한 근무환경에 눈감을 수 있을 때 이야기다. 경제적으로 효율성이나 생산성이 높다고 할 순 없지만, 우리는 가방에 삶을 바친 국내 기술자분들의 삶을 존중한다.
우리는 세계가 얼마나 거친 곳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참으로 근사하고 우아한 곳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믿는다. ‘메이드 인 서울’이란 단어도 그렇다. 언젠가는 메이드 인 파리, 메이드 인 NYC처럼 뚜렷한 가치를 갖게 되리라 믿는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메일팩의 부스. 독특한 디자인과 퍼포먼스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메일팩스러운 전시
사실 전시는 굉장히 소모적이라고 생각한다. 단 며칠을 위해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전시가 끝나면 모두 철거하는 것은 메일팩의 지향점과는 다르다.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선보인 부스 전시기획 또한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원형’들로 구성했다. 배송할 때 쓰이는 박스를 적재해 선반으로 사용했고, 액츄에이터를 통해 박스가 마치 서랍장처럼 열고 닫히는 모션을 넣었다.
재봉틀로 팸플릿을 직접 봉제해 나눠주는 퍼포먼스는 ‘손으로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 기획한 것이다. 소비자가 양산한 가방을 마주하면 마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방은 기술자의 손을 거쳐 정말 어렵고 힘들게 만들어진다. 그 과정을 축소해서 조금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다.
메일팩의 전시가 새롭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엄밀히 보면 너무나 익숙한 요소들이다. 덧붙이면, 설치와 철거 모두 다른 부스에 비해 적은 시간이 들었다. 철거의 경우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또한 메일팩스러운 요소다.
목표와 계획
자연스럽되 거칠지 않고
아름답되 요란스럽지 않으며
실용적이되 천박하지 않고
조화롭되 인공적이지 않은* 브랜드로 기억되고 싶다.
*천명관, 〈고래〉, 문학동네
제품뿐 아니라 공간, 서비스 영역에서도 소비자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할 계획이다. 물론, 메일팩스러운 경험으로 말이다.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메일팩(mailpackseou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