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5
박동균의 작업은 사물이 이미지 표면 위에 ‘안착’하였을 때 본디 사물이 가진 기능과 형태가 달라지는 지점에 있다. ‘본다’라는 행위에 숨어있는 ‘비가시성’을 건드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다.
SD16DM2CFP.JP-107_9327_Handrail, archival pigment print, 92.0x61.3cm, 2018
20170310-SD3CGSAP.KR-UNKN_02, archival pigment print, 60.0x34.0cm, 2017
SD16DM2SAP.KR-06624.H_0115_430EX III-RT, archival pigment print, 60.0x40.0cm, 2018
박동균의 이미지는 양면적이다. 군더더기를 뺀, 보는 이의 시선을 프레임 가운데로 집중시키는 그의 이미지에선 어떤 은유나 함축도 읽히지 않는다. 간혹 오브제 일부분을 빈틈없이 담아낸 탓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무엇을 프레임 안에 담아냈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단순함’이 그의 작업을 더 난해하게 만든다. 늘 그러하듯이 해석이라는 관성에 이끌려 이미지에 이목을 집중시키지만, 명쾌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냉정한 혹은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가의 이미지를 범안(凡眼)이 이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설명하고 있는 텍스트들을 펼쳐보기로 한다. 먼저, 박동균은 자신의 작업에 관해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 물질들이 이미지의 표면 위에 ‘안착’되었을 때 만들어지는 ‘유사-물질’의 이미지는 무엇을 보이게 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표면에서 대상을 일시적이거나 임의적으로 제거시킨다.”라고 말한다. 한편, 비평가들은 박동균 작업에 관해 ‘어떤 공간인지에 대한 정보나 내러티브를 암시하는 어떤 여지도 주지 않는 그의 작품들은 마치 그래픽이나 회화처럼 2차원의 레이어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이기원)’라고, ‘기록-연출-시뮬레이션 공정을 통해 사물과 이미지 사이의 (미약하지만 동시에 강인한) 연결을 일시적으로 느슨하게 만들고, 이를 정지된 장면으로 제시하는 솔루션(윤율리)’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 메를로 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절을 인용,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 틈입하는 찰나의 단절로부터 무언가 까마득한 어둠이 깊은 상처처럼 벌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당연히 ‘의미 부여와 해석’에 큰 의미를 두고 있는 사진 작업에 익숙한사람들에겐 한 번에 와닿지는 않겠지만, 흥미롭게도 위의 문장들만큼 박동균 작업을 잘 표현하는 것도 없어 보인다.
그동안 수없이 많이 사용됐던 ‘사진은 객관적으로 무엇인가를 재현한다.’라는 말을 다시 끄집어내 본다. 분명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라는 사진을 둘러싼 신화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명제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 젊은 작가들은 사진의 기록성을 과거의 구태의연한 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대상(사물, 상황 등)을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 어떤 개념이나 사회적 이슈를 도출하기보다는, 사물을 차갑게 바라보는 움직임이 자주 포착되기 때문이다. 의미를 찾기보다 사물 본연의 물성을 깊이 있게 파고드는 박신영, ‘디지털 시대의 사진(이미지)은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들의 반복으로 만들어낸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시각 인식을 제시’하는 이나현, ‘카메라 앞에 선 피사체보다 특정한 시점과 위치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하나의 사물로 간주’하는 이택우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연장선에 박동균의 작업이 있다. 그는 어떤 물질을 바라볼 때 발견되는 ‘시각적인 틈’을 파고든다. 장애인의 보행을 돕기 위해 제작된 핸드레일을 묘사한 이미지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철골구조에 불과하다든지, 건축 구조물의 일부를 찍었을 뿐인데 유기적인 구조와 기능이 주목받는다든지, 스트로보의 발광 순간을 포착한 이미지가 표현하는 것이 사진술인지 물질 그 자체인지 판단이 어려운 점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미지의 ‘굴절적응’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엘리자베스 브르바가 고안한 ‘굴절적응’은 ‘하나의 생명체가 특정 용도에 적합한 한 가지 특성을 발전시키면, 다른 생명체들이 그 특성을 전혀 다른 기능으로 활용하는 현상’을 뜻한다. “어두운 방을 밝히기 위해 성냥을 켰는데, 문을 열자 방안에 통나무 장작이 쌓여 있고 벽난로가 있다면 성냥은 전혀 다른 용도를 갖게 된다. 하나의 맥락에서는 어둠을 밝히는 도구가 다른 맥락에서는 몸을 따뜻하게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라는 비유를 곱씹어본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종합하자면, 박동균의 작업은 사물이 이미지 표면 위에 ‘안착’하였을 때 본디 사물이 가진 기능과 형태가 달라지는 지점에 있다. 이러한 ‘링크의 약화 또는 상실’에 주목하는 그의 작업은 ‘본다’라는 행위에 숨어있는 ‘비가시성’을 건드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가 과학, 광고, 기술 등의 분야에서 사용되는 이미지에 주목하는 이유다. 다만, ‘비가시성’을 발현시키는 것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이다. 박동균은 사물과 현실과 이미지 사이의 ‘시각적인 틈’을, 자신의 감각을 기반으로 만든 ‘주변에 편재하는 사물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이미지’, ‘사물을 작업실 안으로 들여와 즉흥적으로 연출하여 기록한 이미지’, 그리고 ‘디지털 가상공간 안에서 사물을 재현하고 생성한 이미지’로 보여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사물의 물질성은 보는 이의 머릿속에서 가시화된다.
최근 박동균은 그의 작업을 ‘Generic Image’로 명명했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이미지를 생산하겠다는 요량인 듯하다.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를 떠올리면 의도는 더 명확해진다. ‘공동의 이익을 위한 개별 의지의 총합. 절대적인 선(善)’이라는 ‘일반의지’의 정의처럼, 어느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하는 ‘일반적인 이미지’를 만들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바로 사물을 차갑게 바라보는 방식이 너무 주관적인 감각에 매몰된 나머지 설득력을 잃은(뜬금없는) 이미지가 이따금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물과 현실과 이미지의 ‘약한 연결’이 이미지와 공동체 사이의 ‘약한연대’로 확장되는 건 전체적인 작업 맥락과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이율배반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결국, 핵심은 ‘약한 연결’을 ‘강한 연결’로, 다시 ‘약한 연대’를 ‘끈끈한 연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인데, 둘 사이의 틈을 어떻게 줄이느냐가 ‘Generic Image’를 실현할 수 있는 관건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생산된 이미지가 전체의지(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특수의지의 합계)에 머무를 것이기 때문이다.
박동균 기술, 과학, 그리고 산업 프로덕션을 물질에 기인한 행위의 결과이자 확장으로 상상하고, 이로부터 도출되는 ‘약한’ 연결 상태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 예술사 과정을 졸업했다. vakdongkyun.com
에디터_ 박이현
디자인_ 김혜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