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2
[디자인정글 특별기획_ 디자인 아티스트를 찾아서 1] 서기흔
과거 디자인의 개념이 도입되던 산업화시대에는 디자인과 아트의 경계를 구분하는 것이 꽤나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정보화시대, 4차산업혁명시대인 오늘날 이 둘의 관계는 하나로 융합되고 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미술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가운데, 특히, 오랜 시간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업적을 쌓은 후, 새로운 분야에서 활동을 하는 디자이너들이 눈에 띈다.
디자인정글은 그래픽디자이너, 산업디자이너, 공간디자이너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로 왕성한 활동을 한 후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작품활동을 통해 대중과 교감하는 이들을 ‘디자인 아티스트’라 정의하고 이들의 세계를 취재하고자 한다.
기업이나 기관과 같이 거대한 조직구조로 이루어진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대신, 곧바로 엔드유저인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 소통을 시도하고,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마케팅 전략과 디자인 콘셉트가 아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통해 대중에게 평가와 판단을 받는 이들. 디자인 산업생태계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디자이너들의 로망이자 조형적인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디자인 아티스트들의 세계를 전한다.
서기흔 교수
그 첫 번째 주인공으로는 디자이너이자 교육자로 4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온 서기흔 교수를 선정했다. 한국 출판 디자인 1세대 아트 디렉터로, 제목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베스트셀러 등 2,000여 권의 책 표지를 디자인했고, 현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일찍이 혁신 교육을 실천한 그는 학생들에게 ‘깨어 있는 디자인’을 가르쳤고 수많은 디자이너를 변화시켰으며, 디자인문화운동작업의 일환인 ‘개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을 생각하게 하는 메시지를 던졌다.
현장을 떠난 그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40년 동안 체득한 노하우는 무궁무진한 콘텐츠가 되었고, 그의 머릿속에서 조금씩 세상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개’를 통해 이 세상과 미래를 위한 선한 메시지를 전해온 그는 개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뮤지엄 오브 도그 아트(Meseum of Dog Art)’를 위한 전시 <나는 누구개>를 선보였다.
디자인하우스 모이소(MOISO)에서 지난 8월 28일까지 열린 전시에서는 지필묵드로잉, 도자조형, 조형물페인팅, 일러스트레이션, 조각, 패브릭 등 다양한 재료를 이용한 개에 관한 작품들이 전시됐다. 그 중에서도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텍스트들에 눈길이 머문다. “아이는 확실한 천사이고, 강아지는 틀림없는 천사이다”,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받고 있었다”, “dog dog dog 사랑을 노크합니다” 등 개에 대한 다양한 문장들로, 개 프로젝트를 하며 수집하고 직접 쓴 텍스트들이다.
지난 8월 갤러리 모이소에서 열린 '나는 누구개'전
<카르페 디엠>, <유기견>, <기억> 등의 시도 적혀 있다. 작품과 함께 읽는 이 글들은 전시의 맥을 쉽고 확실하게 일러주고, 작품들을 더욱 친근하게 한다. 마음에 와 닿는 문구들은 행동을 반성하게 하고 삶을 돌아보게 하며, 앞으로를 계획하게도 한다.
디자이너로 시작해 디자인 아티스트로 제2의 인생을 살며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 정확한 삶’ 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서기흔 교수를 만나보았다.
디자이너,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삶
Q. 디자이너와 교육자, 두 가지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편집디자인회사 아이앤아이(I&I)를 운영하기도 하셨고요. 그동안 디자인 분야에서 다양한 일을 해오셨는데요.
학교와 현장의 두 가지 삶과 I&I 디자인 스튜디오 운영은 한마디로 안간힘의 삶이었지만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말하자면 안간힘과 행복을 관통하는 결정적인 변곡점이 있는데, ‘텍스트’라는 뜻밖의 체험과 ‘현장사랑’이라는 절실함이 그것입니다.
졸업 후, 출판사 <홍성사>와 잡지사 <월간 한국인>에서 8년을 근무했는데, 디자인과 디자이너가 중심이 아닌 낯선 영역에서 운명적으로 일하게 되었지요. 이미지와 형식이 중심인 동네에서 텍스트와 내용이 중심인 동네로, 디자인과 반대되는 새로운 세계의 경험은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모든 자신감을 잃었고, 주변인이 되었지요. 그들의 전방위 지적 수다에 늘 콤플렉스고 스트레스였지만 결과적으로 경청의 습관을 몸에 익히고 나와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텍스트와 내용과 글쓰기, 플래닝과 에디팅을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디자인 크리에이티브에 얼마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가를 알게 된 것이지요. 후진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서부터 저의 화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가 자리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온몸으로 부딪치는 현장사랑이 견고해졌지요.
이후 학교에 부임하면서 ‘새로운 신화창조’를 하겠다는 겁 없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현장에서 얻은 ‘통합’이라는 통찰을 교육과 학습에 적용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화두를 실제화하려 노력했지요. 30년 함께 해 온 디자이너와 교육자의 두 가지 활동이 결국 많은 작업을 이끌었고, 두 가지 삶이 말 그대로 ‘통합’의 삶이 되었지요.
Q. 말씀하신 것처럼 교수님께서 운영하신 아이앤아이는 일반 디자인기업과는 좀 다른 성격을 지녔던 것 같아요.
돌아보면 ㈜아이앤아이는 좋은 시절에 좋은 기업과 좋은 사람을 만난, 일복과 인복이 터진 회사였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한 의식과 감각의 균형, 맨파워와 팀워크로 8,90년대 한국 시각디자인 스튜디오의 전형적인 모델로서 디자인 환경 개선에 많은 리더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 외적 정점이 초일류 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한 삼성의 신경영이었습니다.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핵심인 ‘혁신’은 저의 일과 삶에 혁신이 되었지요.
삼성 신경영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 혁신을 디자인 교육에 적용시키려면 방법론은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했고 어렵지 않게 ‘탈 경계-통합’이란 키워드를 얻었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통합을 말하지만 95년 전후엔 상당히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발상이었어요. 그 ‘통합-융합’의 키워드로 교육부 재정지원 ‘지방대학 특성화사업’도 성공하게 되었고, 통합교육 프로그램의 ‘디자인문화운동작업’이라는 프로젝트도 십몇 년을 이끌어가게 되었지요. 아마 회사 운영의 핵심도 자연스럽게 ‘통합’이 되었을 겁니다.
‘아이(I)’ & ‘아이(I)’라는 회사 네이밍이 ‘서로에 대한 존중과 함께’라는 통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I&I가 편집디자인 전문회사라기 보다는 편집이라는 개념을 통해 차별화된 토털디자인을 추구하였고, 특히 사람을 중심(사내 구성원-클라이언트-협력사)으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배우고 가르치는 융합의 정신이 강조되었지요. 회사 운영 곳곳에 학교의 흔적, 신뢰의 흔적, 공동체의 흔적이 넘쳤었지요.
전시 '나는 누구개' 전경. 갤러리 모이소
Q. 퇴임하시기 3년 전 아이앤아이 회사를 정리하셨는데, 아쉽진 않으셨나요?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 뒤늦은 몸부림이 있었지만, 이미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지요. 그 대세란 회사가 아주 잘 되던 오래전부터 이미 디자인계가 암울하다는 생각, 디자인 전체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크리에이티브 경쟁력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것,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비즈니스 시기를 놓쳤다는 것,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진다는 것 등으로 선택의 갈림길이 왔다고 생각했죠. 선생인가 디자이너인가? 학교를 그만두고 디자인에, 사업에 몰두할 것인가?를 두고 힘들어했지만, 사업성에 대한 안과 밖의 비전이 없다고 판단을 내린 거지요.
세상에는 결론이 없다. 우주 그 어디에도 결론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오래 걸렸고 힘들었죠. 아이앤아이라는 이름은 지키고 싶었지만, 그 무엇이 되지 못하고 상업적인 회사로 남는 것, 굴욕을 참아가며 날밤새는 디자인 회사로 아이앤아이가 밖에서 존재하는 것은 원치 않았어요. 세월과 함께 많은 게 많이 바뀌었지요.
Q. 2018년엔 교수님의 40년간의 활동을 돌아보는 전시 <디자인.학교.서기흔> 두성페이퍼갤러리에서 개최하기도 하셨는데요.
어느 날 정년퇴임을 하고 나니 ‘이게 뭐지? 그 모든 게 무엇이었지? 나는 무엇이었나’라는 질문들이 막 쏟아지는데, 걷잡을 수 없었어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느낌들에 혼란 그 자체였지요. 주인이 부르면 미친 듯이 달려가는 개처럼 30년을 달려가기만 했기에 작업장은 그 흔적들의 더미들로 아수라장이었지요. 작업물들이 다 어디에 있는지, 그동안 어떻게 정리가 됐는지 하나도 모르겠고, 수많은 수업 노트와 메모들이 눈에는 보이는데, 저게 다 무엇이었나, 저것들을 다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하는 그때 후배들로부터 전시에 대한 제안을 받게 된 거예요.
고마웠지요. ‘지도 없이 떠난 30년 세월을 돌아보고 정리도 하고, 그 30년 무엇이었나’를 자신에게 묻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길 기대하며 전시를 하게 됐어요.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30년을 달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Q. 전시를 좀 특별하게 구성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디자인.학교.서기흔>은 재직 30년을 회고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 없는 여행을 돌아보고 정리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고, 그 과정 속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기획한 전시이므로, 거기에 맞는 전시의 핵심 콘셉트랄까, 특별한 형식이 필요했고 그게 ‘연대기식 형식’의 전시였고 그리고 15일 동안 지인들을 초대하여 함께 채우고 만들어가는, 또 다른 나의 현재와 우리의 미래를 묻는 과정을 계획했지요.
그리고 두성 전시공간도 그 표현이 가능한 크고 긴 벽면이 있었지요. 그런데 그 연대기를 미리 다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제가 기본 틀을 만들어 놓고 보름 전시 기간 동안 매일 전시장으로 출근해서 현장작업을 하면 지인들이 와서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때의 이슈, 추억들을 적고 붙이고 그리기도 하고, 또 그 기간 동안 라운드 테이블, 테마 포럼, 워크숍, 멤버십 미팅 등을 열어, 모든 활동을 기록 편집 소통하기도 했는데, 그런 것들이 신선했고 알찼고 흥미로웠죠. 이를테면 ’함께 만들어가는’ 차별화된 형식의 전시가 최초로 시도된 셈이죠.
디자인 그리고 스토리텔링, <나는 누구개>
전시 '나는 누구개' 전경. 갤러리 모이소
Q. 이번 전시는 그때와는 좀 다른데요, 전시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지난번 전시가 40년 활동 중에서도 회사(I&I)를 배제한 제 개인 중심의 작업을 압축한 전시였다면, 이번 전시는 그중에서 작은 한 점에 불과한 개별 프로젝트(DOG-GOD)에 대한 것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이지요. 그리고 지난번이 개인전에 해당한다면, 이번은 기획전이라 할 수 있어요. 또한 전시를 보면 알겠지만 전시장에 말이 많아요. 텍스트가 많지요. 전시가 보편적으로 그림(이미지) 중심이고 보기 중심이라면 이 전시의 특징은 뮤지엄의 아이덴티티 전달을 염두에 둔 전시이기 때문에 전략적 차원의 읽기와 보기가 결합된 것이지요. 핵심은 대화형 콘텐츠 ‘이야기’예요.
Q. 오래전부터 개에 대해 이야기 해오셨는데, 왜 개를 선택하셨나요?
결론적으로 말해, 세상에 대해, 삶에 대해, 이웃과 나에 대해 따뜻하고 친절하게, 위트 있고 의미 있게, 솔직하고 거칠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생명체이자 매개가 개이기 때문이지요. 과정과 배경은 여러 맥락이 얽혀 있어 설명이 복잡합니다.
현장사랑에 얻은 나름의 통찰을 디자인 교육의 혁신을 위한 대안 교육차원서 통합교육 프로그램을 개발(2002년)하였고, 그 일환인 주제 중심과 프로젝트 중심으로 인간으로서의 자립과 주제(대상)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는데, <개>는 통합프로젝트의 여러 조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수업의 화두를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속성과 가능성을 갖춘 주제라고 보았습니다. 개는 인류와 가장 오래된 동반자이자 우리 삶의 일부가 된 반려동물이죠. 또한 야생-가축-애완-반려로 이어지는 지난한 역사와 사실은 그 자체로 흥미로움과 더불어 오랜 ‘인간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고 본 것이지요.
무엇보다 개가 지닌 신의 속성과 역설의 메시지가 불확실하고 위기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수많은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확신 때문이에요. 사람(人)과 개(犬) 한자어는 형태적으로 많이 닮아 있으면서 개념적으로는 반대(극과 극)에 있다는 것이 주제의 혁신성과 차별성, 사회적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갤러리 모이소 '나는 누구개' 전시 전경
Q. ‘개’와 ‘이야기’가 핵심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전시에선 ‘뮤지엄 오브 도그 아트’의 이야기도 펼쳐지는데 같은 맥락인가요?
이 세계는 사물의 나열이나 배치가 아니라 이야기로 구성돼 있어요. 이 세계가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고 보는 것, 이것은 미래를 보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해요. 이야기야말로 아주 훌륭한 콘텐츠고 우리 삶을 지탱해온 자산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중심이 된 뮤지엄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전 개가 갖고 있는 우리가 모르는 원초성, 야생성, 신의 속성을 닮은 에너지와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주고자 해요. 우리가 배우고 힐링하면서 즐거움과 놀이로까지 이어지는 그 무엇들이 다 이야기로부터 비롯되는 거예요.
개와 관련한 창작물과 컬렉션한 장식품들을 콘텐츠로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지만, 거기에 이야기를 더하고 연출해서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고 또 멈춰 서게 하고 공감을 일으키고, 무언가를 느끼게 해서 다시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과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이 과정을 만드는 것이 결국 도그 뮤지엄만이 갖는 차별화고 경쟁력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글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고, 아직도 혼자 낑낑거리고 있어요(웃음).
Q. 전시의 주제는 어떻게 정하셨나요? <나는 누구개>라는 전시의 제목도 참 재미있는데요.
낮은 목소리로 얘기해야 할 것 같네요. 사실 전시의 목적은 비즈니스 파트너를 찾는 것이었어요. 기도하는 마음이지요. 그러한 전제하에서 전시의 콘셉트는 도그 뮤지엄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아이덴티티는 ‘반려견 1000만 시대’라는 테마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요. 그리고 반려견 1000만 시대는 ‘급변하는 세상에 응답하는 거대한 하나의 문화현상’이라 보았지요. 이런 관계와 문화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왜 개인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 물음은 오늘날 우리 모두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깊은 물음’이라고 생각했지요. 동화를 닮은 철학적 물음이자 우리의 영원한 화두인 <나는 누구개>는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타이틀입니다.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에너지의 본질이 <나는 누구개>가 아닐까 싶습니다.
Q. 평면과 입체 등 장르를 초월한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게 흥미로운데...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지필묵 드로잉, 도자조형, 조형물 페인팅 그리고 텍스트 작업인데,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 디자인과 멀리 있는 것들이에요. 제가 수업서 늘 강조한 ‘디자인은 디자인 바깥에 있다’는 말의 실천적인 결과물이고, 이게 바로 멀리 있고 반대되는 것들을 가까이하는 ‘통합’의 관점이죠.
이를테면 디자인의 반대쪽은 미술 혹은 인문, 컴퓨터 작업의 반대쪽은 만들기와 그리기, 이미지의 반대쪽은 텍스트, 그리기의 반대쪽은 글쓰기인 것이죠. 그 반대의 가치를 디자인 교실과 현장에 접목시키기 위해 도전한 거죠. 물론 장르를 넘어선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치밀한 상호 관련성과 학생 선생의 헌신이 뒤따르지 않으면 공작 시간이 될 확률이 높지요.
Q. 전시에서 ‘독-갓(dog-god)’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나요?
인간을 열렬히 매혹하는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DOG(개)을 뒤집으면 GOD(신)이 되지요. 뒤집으면 서로가 되는 놀랍고 흥미로운 관계이지요. 그렇다고 ‘개가 곧 신’이라거나 ‘신이 곧 개’라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에요. 먼 근원, 먼 시간과 연결되어 있는 <dog-god>은 인간과의 관계를 위해 신이 개에게 내린 특별한 재능을 의미하는 것이고, 최고(god)와 최악(dog)이 함께하며 최악마저 환호하게 만드는 신비와 기적, 사랑과 배려의 메시지가 숨어 있는 키워드입니다. 위기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지혜도 결국 존중과 공존의 상징인 <dog-god>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저 너머’의 비밀은 죄다 극과 극의 관계, 반대의 관계, 역설에 있다는 것입니다. dog-god의 ‘거꾸로’의 지혜나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연결되어 있다는 ‘통합’의 지혜나 더불어 함께하는 ‘생명의 비밀’이나,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는 ‘세상의 이치’는 모두 같은 하나의 맥락인 것이죠. 이러한 통찰의 궁극은 창의를 넘어 ‘인간다움’이어야 합니다.
Q. ‘개’라는 동물에 특별히 담으시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처음으로 만든 명제입니다. “개가 짖어 대는 것을 찬사로 생각하라. 인류 역사상 위대한 혁신은 ‘짖는 개’로부터 비롯하였다.” 개가 지닌 수많은 에너지와 긍정성, 상호 관련성 중에서도 저를 매혹시키는 것은 바로 ‘짖는다’는 행동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잘못을 반복하는 역사가 반입니다. 아직 우리의 국격이나 민도, 동물 인식은 ‘애완’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동물을 상대하는 방식, 내 편의 입장에서 상대를 평가하는 방식이 애완의 수준이지요. 아무튼 품격의 문화, 포용적인 사회를 위해 짖고 또 짖어야 합니다. 사유와 비판 없이는 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짖는다는 건 ‘개판이 된 세상을 위한 역설’인 것이죠.
Q. 스토리텔링을 통해 작품의 이야기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 디자이너 출신의 아티스트가 갖는 강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스토리텔링뿐 아니라 교수님께서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하시죠?
양으로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많습니다. 아무리 많아도 콘텐츠 연구는 계속되어야 합니다.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가 기본적으로 퀄러티를 확보하고 있느냐인데, 결국 진정성이 생명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텍스트(명제 및 3자 6행시) 개발은 주제에 대한 인문적 사고이자 개에 대한 마음의 일기이고, 오랫동안 세상을 들여다보고 숙성시킨 작업이기에 진정성에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텍스트들을 어떻게 뮤지엄이란 공간에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말 걸기를 할 것인가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과제지요.
갤러리 모이소 '나는 누구개' 전시 전경
Q. 교수님께서는 콘텐츠를 활용해서 도그 뮤지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셨는데, 그것이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는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작품의 직접 판매가 아니라 흡입력 있는 콘텐츠를 가지고 사람을 오게 하는 것, 테마를 가지고 꾸준히 콘텐츠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수익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콘텐츠 비즈니스는 미래의 먹거리라고 모두들 강조합니다. 그래픽디자이너의 자질과에너지로 보아 이 분야의 주역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클라이언트 잡(client job)은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미래에 대한 대안과 준비는 디자이너에게 늘 필요합니다. 대학 교육 프로그램도 그런 차원에서 전면적인 제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마지막 목표는 ‘인간적 자립’이기 때문이지요. 뮤지엄은 그 사회의 품격을 보여주는 중요하고 종합적인 기능의 거대한 사업인 만큼 수많은 현실적인 조건과 어려움이 따르지요. 아무리 좋은 콘텐츠라 할지라도 콘텐츠만으로 성공하기는 어려운 것 또한 현실입니다.
결국은 테마와 라이프스타일을 엮는 다양한 연관 사업이 따라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꾸 규모가 커지고 지연되는 이유지요. 결론은 전략적인 연대가 필요한데 현실은 여전히 ‘뜻이 있는 곳에 돈이 없고, 돈이 있는 곳에 뜻이 없다’는 푸념이 공전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픽디자인의 모범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싶은데 코로나라는 의외의 복병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또한 디자이너의 과제 혹은 함께 해결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Q. ‘함께’는 교수님이 강조하시는 철학과도 같은 내용인 것 같은데요.
일찍부터 경험하게 된 콤플렉스의 삶, 그리고 일찍 만나게 된 일복과 인복이 준 해결 방법론이 ‘함께’라는 지혜였다고 생각합니다. 서로에게 다가가려는 간절함이 ‘함께’이지요. 인간과 개의 역사도 그와 다를 바 없고요. 도그 뮤지엄의 궁극적인 메시지도 ‘더불어 함께’지요. 그게 결국은 ‘생명의 비밀’이니까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섞이지 않으면 풍요로움도 창조도 없어요. 그래서 그 생명의 비밀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지요.
어떤 주제든 파고들면 본질로 만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존중에서 비롯되는 ‘함께’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에 만든 명제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 더불어 함께 하는 게 정확한 삶이다.”
Q. 도그 뮤지엄을 현실화시키려면 공간이 중요한데, 이 부분은 정말 지자체나 정부기관의 도움 없이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지자체가 공간을 제공하고 그 안에 디자이너가 그동안 생산한 콘텐츠를 넣으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사람들이 모이면 거기서 새로운 산업이 형성되고, 그러면 그 산업은 또 다른 분야의 산업들과 시너지를 일으키는 선순환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취지에서는 지자체가 상당히 적합하고 중요하죠. 국가의 큰 이슈로 ‘도시재생’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은 그 중요성을 반증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어요. 지자체의 단체장이 바뀌면 상황이 순식간에 변화하고 지속적인 지원 또한 불확실하다는 부분이 있고요. 또 전반적으로 콘텐츠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안목이 그렇게 견고하다고 볼 수 없어요. 당장 가시적인 성과들에 집착하다 보니 콘텐츠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않는 것이죠. 그로 인해 뒤따르는 영속성이나 지속적인 투자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Q. 디자이너로 활동을 하시다 다양한 분야의 작품활동을 하며 작가로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많은데, 이분들이 소위 ‘작가’ 또는 ‘아티스트’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만, 작가라는 기준을 견고한 미술세계의 것으로 규정한다면 현실은 녹록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소위 작가 또는 아티스트로의 자리매김은 하늘의 별 따기일 것입니다. 이미 그쪽의 작가들조차도 꿈같은 일임을 수없이 보아 왔기 때문이지요. 그런 관습적인 틀에서 벗어난 다양한 제2의 삶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공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삶 그 자체가 작가가 되는 것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세컨드 라이프를 살아가는 디자인 아티스트의 정의를 자기 작업을 하는 작가로 좁히지 말고 훨씬 더 다양한 태도와 가치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따른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역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생활 전반에서는 디자인이 부각되고 있는데 디자이너의 현실과 미래는 여전히 힘들고 어두운지? 그리고 은퇴 후 지속적인 디자인 활동에 따른 마당이나 명분이나 생존력이 없는 분야의 한계성을 극복하는 근본적인 고민 같은 거 말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하는 문화나 시스템의 부재를 극복하는 일, 디자인 내부의 제반 문화(끼리끼리와 침묵의 문화)에 대한 성찰이 더 우선적이고 급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Q.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요?
오늘의 주 내용처럼 <DOG-GOD>뮤지엄을 가시화시키는 일입니다. 그 길은 다양하지만 그 무엇도 쉽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오랫동안 많은 준비를 했는데 앞으로의 준비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확신하는 것도 뮤지엄의 역할을 생각하면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뮤지엄 혹은 주제를 통해 아름다운 감동, 놀라운 즐거움, 유쾌한 반란, 뜻밖의 통찰을 체험함으로써 <나는 누구개>를 스스로에게 묻는 사회의 학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간절히 바라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은 거지요. 나는 왜 뮤지엄을 하려 하는가? 그리고 왜 개인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으면서, 함께할 멋진 분들을 찾을 것입니다.
그 일은 내일 당장 벌어질 것이 아니기에, 그사이 저와 I&I가 제작한 약 2000여권의 단행본 표지디자인 중 선별하여 모은 기획출판물 <표지만 있는 책>을 준비할 계획입니다.
인터뷰어1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인터뷰어2_ 이경림 유한대 디자인과 교수
에디터_ 최유진(yjchoi@jun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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