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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이카루스의 추락, 그러나…’ 마리노 마리니: 기적을 기다리며 展

2007-02-27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얼핏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창조해내야 하는 디자이너의 고뇌를 토로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수천 년 전 쓰여진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이다. 이제 모든 것이 고갈되었다는 탄식이 입에 붙을 때면 또다시 새로운 발상과 기획이 단비처럼 쏟아지기도 한다. 수천 년 전에 이미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사라졌을 지도 모르지만 기술의 진보와 그에 따른 인식의 확장이 창조의 지평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20세기는 그 놀라운 기술적 진보와 비극적 사건, 이에 따른 인식의 확장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고전적 예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념의 예술이 실험되고 정립되었으며, 양차대전을 겪는 와중에 권위의 해체, 실존에 대한 고뇌는 극치를 달렸던 시기. 그 시대의 예술이 현대에 여전히 유효한 것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과 혼란을 동시에 지닌 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실존적 고뇌가 상통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조각의 거장 마리노 마리니의 작품은 그래서인지 여전히 새롭고 애틋한 마음을 전달한다.

취재| 남궁경 기자 (knamkung@jungle.co.kr)


이탈리아 마리니 재단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공동주최로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마리노 마리니의 특별전의 제목은 ‘마리노 마리니: 기적을 기다리며’(4월22일까지). 2차 세계대전 전후 자코메티와 더불어 실존주의 조각의 계보를 만든 이탈리아 거장의 실물 조각, 회화 105점이 국내 처음 선보이게 된다.


‘마리노 마리니 : 기적을 기다리며’전은 기마상, 초상, 포모나의 세 가지 주제로 분류, 작품을 배치했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대형 기마상은 이번 전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권위를 나타내던 서양 고전 기마상과는 달리 실존적인 대상으로 표현한 마리노 마리니의 기마상은 비극적인 출발에서 비롯된 실존의 시대였던 20세기를 되돌아보게 한다.

주제에 따른 조각과 회화의 적절한 배치와 보는 위치에 따라 모두 다른 감흥을 주는 조각품 전시에 용이한 입체적 구성이 눈에 띈다. 조각품의 경우 한 면만 보고 지나친다면 거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감상자의 시각과 대상의 시각을 여러 각도로 교차시키며 공간을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흥이 있는데, 이번 전시는 이를 느끼기에 충분한 배치를 보여준다. 조각 전시품만 아니라 주제적 연장선상에서 만나는 회화의 색채감도 화려하고 아름답다.


‘말과 기수’는 20세기를 불안의 시대로 정의한 마리니의 시대인식의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소재. 초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 ‘말과 기수’는 말과 기수의 관계를 통해 마리니의 시대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즉 초기의 말이 기수와 조화로운 관계를 반영한다면 후기로 갈수록 그 조화가 깨어져 기수는 더 이상 말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는 것.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기수의 얼굴에는 그러나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다. 초점은 오히려 육중한 ‘존재의 무게감’과 솟구치는 듯한 말의 포즈, 그리고 기수의 성적 에너지다. 모딜리아니와 더불어 그리스 조각 예술을 현대미술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주역이기도 한 마리노 마리니의 기마상 작품은, 베네치아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정원에 상징적으로 서있기도 하다.

1952년의 <기적> 과 1953-54년의 <기적> , 그리고 1960년의 <커다란 외침> 은 비극을 형상화하는 마리니 작품의 변모 양상을 비교해서 볼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 피해갈 수 없는 비극을 마주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적’에 대한 절실함은 <커다란 외침> 에서 일그러진 형태로 비극적 파국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형태를 잃은 한 무더기의 재와도 같은 작품의 제목이 ‘커다란 외침’이라는 것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비극과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게 한다.


마리니의 여성누드는 행복과 재탄생을 의미하는 이미지이다. 그의 여성 누드는 단순히 <여성누드> 라고 이름 붙여지거나 혹은 <작은 유디트> 처럼 특정한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지만, <포모나> 로 이름 붙여진 여성누드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포모나 이외의 제목을 가진 작품이라 하더라도 포모나와는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와 커다란 가슴이라는 조형적 공통점을 보여준다.
‘포모나'는 고대 에트루리아의 과일나무의 여신(女神)이자 풍요를 기원하는 모신(母神)으로서 영원한 여성성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형상이다. 마리니의 여성상이 보여주는 이러한 공통점은 ‘숲의 요정이자 과일의 여신'으로서의 포모나가 갖는 대지의 치유력과 생산력을 형상화하기 위한 것으로, <포모나> 는 그 제목이 지칭하는 것처럼 현대의 특정한 여성상이라기보다는 고전적인 익명성을 견지하며 즐거움과 따뜻함, 행복과 같은 긍정적인 가치를 표현하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마리니가 인류의 비극을 치유할 힘으로서의 ‘포모나'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살필 수 있게 하는 측면이다.


화가로 출발한 마리노 마리니가 본격적으로 조각가의 길에 접어든 것은 초상조각을 통해서다. 세계 제 2차 대전을 겪으며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거친 그는 인물의 개성과 내면세계의 형상화에 주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제작된 신경질적이며 예민한 <마르크 샤갈의 초상> 이나 생명력 넘치는 <스트라빈스키의 초상> 은 대상을 꿰뚫어 보는 작가의 깊은 통찰력과 표현력에 기초한 작품이다.

마리노 마리니의 유명한 조각상을 직접 감상할 수 있다는 점 말고도 풍부한 색채감의 회화를 감상하는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할 감상 포인트다. 입체주의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감각적 작품과 원색의 강렬하고 순수한 색채와 선의 조화는 지난 세기의 모더니즘을 이끌었던 거장의 영감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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