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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인터뷰

[프로에게 묻다] 하이브리드 커뮤니케이터, 국내 인포그래픽의 개척자 장성환 대표

2022-12-06

데이터와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인포그래픽은 텍스트보다 시각적으로 우리에게 정보를 전달한다. 언어나 문자의 차이를 넘어 시각적으로 이해시키는 인포그래픽의 힘은 매우 크다.

 

국내에서 ‘인포그래픽’하면 203 인포그래픽연구소를 빼놓을 수 없다. 203 인포그래픽 연구소의 장성환 대표는 대한민국 인포그래픽의 개척자다. 국내 인포그래픽을 이끌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 대표는 인포그래픽에 대해 설명하며 ‘비주얼 스토리텔링의 힘’을 말한다. ‘텍스트는 휘발되고 언어는 모호하다”, “텍스트 정보 vs 시각정보’와 같은 말들이다.

 

학부시절 ‘홍대신문사’에서 텍스트와 언어적 경험을 했던 것은 그에게 큰 밑바탕이 됐다. 이후 그는 연합뉴스 그래픽뉴스팀을 창설하고, 동아일보로 옮겨 <주간동아> 창간디렉터, <과학동아> 아트디렉터로 활동했으며, 203 인포그래픽연구소를 설립했다. 홍대앞 로컬 매거진으로 유명한 <스트리트H>도 그가 만들었다. 벌써 14년째 만들고 있다.

 

인포그래픽에 대한 그의 에너지는 매달 제작하는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통해서 증명된다. 벌써 8년이나 됐다. 매달 한장씩 포스터를 만들어내고 있다.

 

203의 인포그래픽은 세계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인포그래픽계의 퓰리처상’이라 불리는 SND의 ‘말로피에 국제 인포그래픽스 어워드’에서 3년 연속 수상했고, 싱가폴의 ‘아시안미디어어워드’에서도 4년 연속 수상을 했다. 미국의 ‘프린트매거진 어워드’, 독일의 ‘레드닷 어워드’에서도 수상했다.

 

그는 인포그래픽이란 제목과 메인 그래픽만 보아도 무엇에 관한 것인지 인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매력이 우선되어져야 한다고 한다.

 

203 인포그래픽연구소 장성환 대표로부터 인포그래픽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203 인포그래픽 연구소 장성환 대표

 

 

인포그래픽이란 무엇인가.

 

데이터와 정보를 시각화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딱 맞는 표현이 있는데,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다. 수많은 구슬들 중에서 색을 고르고 크기를 골라 사용자의 입맛에 맞게 기획해서 꿰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가지고 싶은 목걸이가 된다. 
인포그래픽은 해당정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사용자를 쉽고 재미있게 이해시켜서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컨텍스트 first, 디자인 next. 사용자는 공감하고 기억했을 때 판단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난 호두과자와 호두형과자의 비유를 이야기한다. 호두과자는 법적으로 호두가 들어있어야 호두과자라 표기할 수 있다고 한다. 호두형과자는 그저 모양만 호두인거다. 인포그래픽도 마찬가지다. 인포그래픽형 그래픽이 있는거다. 둘의 차이는 정보전달이 작동하는가 여부이다. 작동이 안될 경우는 정보의 구조화가 되지 못한 경우다. 작동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글씨를 가렸어도 대략적인 정보 전달이 가능하느냐’인거다. 화장실 픽토그램을 떠올려 보라. 인포그래픽은 텍스트 의존도를 최대로 낮춰 정보전달을 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다. 

 

95년 당시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그래픽 뉴스 작업

 

 

어떻게 인포그래픽이라는 분야를 하게 됐나.

 

홍대신문사에 있으면서 기획하고 취재하는 학생기자 활동을 했다. 그게 시작점이었다. 이후 연합뉴스를 시작으로 언론사에 있게 됐다. 신문사의 시스템은 전형적인 기자 우선이다. 그래픽 작업은 뒤로 밀린다. 모든 프로세스의 끄트머리라고 보면 된다. 기자가 취재하고 기사를 넘기면 편집부에서 레이아웃을 한 후에야 그것에 맞는 그림을 그려 달라고 전달받는 것이 80, 90년대 언론사의 모습이다. 그래픽이 너무도 수동적인 조직에 들어가서 ‘그런 순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취재중심이 아니더라도 가능한 그래픽 뉴스를 만들어내며 내 생각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연합뉴스에서 그래픽뉴스팀을 만들었다. 연합뉴스는 지면이 없었기 때문에 조중동과는 달랐다. 92년도였는데 매킨토시 붐이 일어나면서 해외에선 우리보다 몇 년 더 빠르게 매킨토시와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통해 그래픽 뉴스를 만들어냈다. 연합뉴스에선 그걸 할 사람이 없었다. 고작 PC정도만 사용되고 있을 때였다.

 

‘그래픽 저널리스트’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다.

 

그래픽 뉴스의 소재도 우리가 직접 골랐다. 던져주는 걸 받아서 작업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영어번역도 직접 했다. 알아서 하라고 해서 알아서 했고, 알아서 하니 더 재밌더라. 그게 굉장히 컸다. 던져주는 걸 작업하는 것에 그친다면 어떻게 저널리스트라 할 수 있겠나. 기사를 골라 그걸 시각적으로 기획하고 그래픽 뉴스를 만들었다. 그게 그래픽 저널리스트라고 자칭 타칭 부를 수 있었다.

 

언론사에서 활동하며 여러가지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다.

 

능동적인 제안을 많이 했다. 대학신문사에서부터 직접 취재해보고 기사를 써봤기 때문에 그런 것이 모두 경험이 됐다. 기존 텍스트 기사 중심에서 탈피한 새로운 시도를 관철시키려 많은 노력을 했다.

 

이후 <주간동아> 창간디렉터로 활동했다.

 

연합뉴스에서 한 3년반 하니 새로운 것을 하고 싶더라. 그러던 차에 동아일보에서 <주간동아> 창간디렉터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가 서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이없이 어린 나이였다. 이곳에 가서도 디자인을 단순히 기사를 “이쁘게” 꾸미는 것이라 생각하는 기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보니 회사생활이 쉽진 않았다. 오히려 미술팀의 상사와 선임들이 나를 많이 괴롭혔다. 왜 미술, 디자인팀이 취재에 관여하고 나서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취재팀과 함께 동행하며 취재하니 기자들의 반응이 좋았고, 더 이상 미술팀이 나를 막을 순 없었다.

 

취재쪽에서는 새로운 일을 하면 나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다 나중에 <과학동아>를 하게 됐다. 기획회의 때도 의견을 계속 냈고, 여러 번 채택되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나중에 뜨인돌 출판사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 <노빈손 크루소 따라잡기>다. 난 디자이너가 받아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땐 정말 회사를 위해 열심히 했다. 어떻게 하면 <과학동아>를 더 잘 만들까 많은 고민을 했다. 동료들과 회사, 잡지를 잘되게 하기 위해 정말 몰입했던 시기였다.

 

동아일보 <과학동아> 인포그래픽 브로마이드 작업

 

 

<과학동아>에서 인포그래픽에 대한 개념이 확고하게 섰던건가.

 

인포그래픽 실험을 많이 했다. 일반잡지가 아니라 과학잡지니까 가능했던거다. 그리고 과학전문기자들이 나에게 동료이자 과외선생님 역할을 해주었다. 이들과 많은 실험을 해보며 나름대로의 인포그래픽에 대한 개념이 정립될 수 있었다. 경험해 보니 내가 재미없어 했던 과학과 디자인은 유사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나서 2003년 독립을 했다.

 

 

미국의 'Graphis' 포스터 애뉴얼 금상, 은상 수상 

 

미국의 역사깊은 디자인지 <Print> 매거진 어워드 2022 수상

 

 

인포그래픽 회사를 설립하면서 어땠나. 쉽진 않았을텐데.

 

인포그래픽 전문회사로 자리잡고 싶었다. 과학동아에서 쌓은 경험이 있으니 잘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인포그래픽 시장이 아예 없더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래픽 편집을 했고, 잡지도 하고 이것저것 했었다. 그러다 2010년 정도부터 ‘인포그래픽’이라는 단어가 한국에 유입됐다. 그래도 비즈니스는 생기지 않았다.

 

2012년 국내 최초로 인포그래픽 전시회를 했다. ‘K-pop, 인포그래픽으로 피어나다’라는 전시였는데, 언론사 현직에 있는 후배 디자이너들만을 데리고 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시기였는데, 인포그래픽으로 K-pop을 보여줬고 반응도 매우 좋았다. 그래도 시장은 형성되지 않았다.

 

이후 2017년경부터 서서히 인포그래픽 시장이 시작됐고, 지금은 훨씬 많아졌다. 그 사이 해외에서 컨퍼런스 발표도 하고, 여러 어워드에서 수상하기 시작했다.

 

매달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제작하고 있는데.

 

그렇다. 매달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제작한다. 이게 한, 두 장일 때와 열 장, 삼 십장, 오 십장일 땐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니 해외에서도 신기해 한거다. 이런 곳이 없으니까. 아시아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매월 하나씩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신기한 거고, 어워드에서도 연이어 수상하니 그들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링크를 타고 와서 보고 팔로우를 했다. 퍼스널 브랜딩인지 회사 브랜딩인지 모르겠지만 203 인포그래픽 연구소에 대한 아이덴티티가 확립된 것이다.

 

인포그래픽에 대해 ‘하이브리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표현을 했다.

 

자기규정을 하려고 참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시기별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데, 예전엔 ‘커뮤니케이터’라고 했다. 나는 소통자인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하이브리드’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좀 더 설득력 있겠다, 내지는 아이덴티티가 더 드러나겠다 싶었다.

 

인포그래픽은 소위 융합의 시대에 그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라 여겨진다. 특히 하이브리드는 장 대표가 말했듯 언어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을 넘나드는 것이다.

 

어찌보면 원시시대부터 소통은 있어왔고 기록은 그림으로 시작되었다. 문자 이전의 역할을 그림이 해왔던 것이다. 난 모든 소통과 기록이라는 것이 결국 알타미라 동굴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종종 특강때면 학생들에게 ‘책을 새롭게 만들어 본다면?’이라고 질문한다. ‘먼저 무엇을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지면 학생들은 판형, 종이재질, 별색 같은 것을 이야기하더라. 그것들은 형태적인 건데 그럼 어떤 걸 책이라 할까 다시 질문했고, 또 책은 언제 생겼는지 물었다. 종이의 발명, 문자의 발명이라 답한다. 하지만 문자가 없었을 땐 책이 없었을까? 점토판도 있고 다 있지 않았나. 결국 알타미라 동굴까지 가는 거다. 소를 몇 마리 잡았는지 에서부터 시작해 학생들이 말한 책의 개념이 다 들어가 있다.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다시 새로운 책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생각하는지 질문을 한다. 학생들은 아까보다 생각할 것이 많아졌다고 답한다.

 

우리가 논의할 때 보통 현재기준으로 한다. 근원, 오리진을 모르니까 현재 책을 보고 현재의 논의에 갇히는 거다. 책의 개념은 더욱 확장되어야 하는 거다. 확장된 논의를 위해선 오리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책의 근원이든 삶의 근원이든 돌아가 봐야한다.

 

해외여행짐싸기 포스터: 글을 거의 읽지 않아도 정보가 전달된다. 

 

 

인포그래픽의 비전은 무엇이라 보는가.

 

자기 콘텐츠 생산과 축적이라는 측면에서 인포그래픽은 굉장히 효과적이다. 클라이언트 중심의 다른 디자인 분야와 달리 생래적으로 공공성을 띄고 있다. 인포그래픽은 기본적으로 유익한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매력적으로 만드는 거다. 하다못해 코로나 마스크 착용 요령이든 뭐든 간에 주변에 자신이 궁금증을 갖고 있는 지식들을 시각적으로 지혜화하는 거다. 그리고 제목, 중제까지만 영문으로 작업하면 확산성은 더욱 커지고, 지구 어느 곳의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된다. 

 

또 한 가지는 생산물이 디자이너에게 축적된다는 거다. 일반적인 디자이너의 생산물은 디자이너에게 축적되지 않는다. 흔히 착각하는 것이 기업의 작업을 했을 경우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데, 그건 포트폴리오일 뿐 소유는 클라이언트의 것이다. 포트폴리오와 내 것을 구별해야 한다.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포트폴리오로도 사용하지 못한다. 시대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저작권과 소유권이 있어야 내 것이다.

 

저작권은 203에 있나.

 

사용권만 주고 저작권은 주지 않는다. 의뢰한 프로젝트만이 그들의 것이다. 해당 프로젝트 외의 사용권 요구할 경우엔 추가비용 청구를 한다.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상징적인 거다. 어떻게 그것이 네 것일 수 있느냐 이거다. 인포그래픽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학생이 만들었어도 온라인을 통해 세계 어디로든 퍼져나가 활용, 작동될 수 있고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

 

자금성 포스터 이미지

 

뉴욕 포스터 이미지

 

태양계 포스터 이미지 

 

 

콘텐츠 굿즈를 제작할 계획이라고.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활용해 아코디언북, 스티커 등 다양한 걸 만들 거다. 내년이면 포스터가 100종인데 포스터 하나에서 5개, 10개를 꺼내면 500종에서 1000종이 된다. 그럼 뭐가 되든 팔리지 않겠나. 내가 자는 동안에도 팔릴 걸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게 자생력이다. 자생력이 있어야 하고싶은 일도 할 수 있다.

 

얼마전 태양계 포스터 작업한 것이 한 번에 100장이 판매됐다. 상징적인 거라 정말 기쁘다. 그런 것들이 자주 벌어지면 좋겠다. 해외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인포그래픽을 포스터 매체로만 생각해선 절대 안 된다. 지금은 포스터가 쇼핑몰에만 들어가 있는데 서점에도 넣기 위해 아코디언북도 준비중이다.

 

마지막으로 인포그래픽 업계에 한 마디 해준다면.

 

난 그래픽 디자인 업계가 왜 용역 서비스 분야 쪽으로만 발전했는가 의문이다. 그런데 학교 교육의 많은 부분은 클라이언트를 염두에 둔 프로젝트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지인교수님들로부터 학교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 고민중이라고 들었다.

 

우리 사회가 디자인에 가진 인식과 대우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왜 이런 대우와 인식을 받고 있는가. 어디서부터 그런 처우가 시작되었는가. 근대 디자인의 단초를 제공한 바우하우스, 울름조형대학에서의 가르침과 작업에서 왜 이리 멀어져 상업중심이 되었을까 하는 고민이다. 그래서 난 회사이름에서 ‘디자인’을 빼 버렸다. 클라이언트나 이 사회가 말하는 의미의 디자인이라는 단어로 나를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나는 여전히 디자인의 본질적인 역할, 생산 과정 등을 사랑한다. 그래서 ‘직관적 이해 만들기’라는 말을 대신 사용하기도 한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 수석기자(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203 인포그래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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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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