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30
_ 정우성 사태가 남긴 것
최근 정우성 씨의 아들 출생 소식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언어의 힘을 어떻게 오용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얼마나 쉽게 훼손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특히 언론과 대중이 사용하는 ‘혼외자’라는 단어는 단순한 사실 전달 이상의 프레이밍 효과를 담고 있다.
프레이밍(Framing, 언론의 틀짓기)이란 특정한 언어나 표현을 통해 대중의 인식과 사고방식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언론 기법을 말한다. 이는 때로는 객관적인 사실을 왜곡하거나 편향된 시각을 심어주는 결과를 낳는다. ‘혼외자’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기준으로 삼아 그 안팎을 가르는 잣대를 대중에게 강요한다. 그 결과, 특정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고 심리적 낙인을 새기는 효과를 가져온다.
‘혼외자’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부모의 결혼 여부를 기준으로 아이의 존재를 규정한다. 문제는 이 단어가 주는 사회적 의미다… 이로 인해 가장 상처받는 대상은 다름 아닌 아이 자신이다.
혼외자 vs. 비혼부: 단어 선택이 낳는 결과
‘혼외자’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부모의 결혼 여부를 기준으로 아이의 존재를 규정한다. 문제는 이 단어가 주는 사회적 의미다. 이는 아이를 둘러싼 다양한 상황과 맥락을 지운 채 ‘결혼 제도’라는 틀 안에서만 가치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이로 인해 가장 상처받는 대상은 다름 아닌 아이 자신이다.
한편, ‘비혼부’라는 표현은 다르다. 이는 결혼 여부보다 개인의 선택과 책임에 초점을 맞춘다. 정우성 씨의 사례를 놓고 보자. 그는 아들의 탄생을 당당히 공개하며 양육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는 오히려 책임 있는 부모의 모습에 가까운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혼외자’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하며 정우성 씨와 그의 아들에게 부정적인 프레임을 덧씌웠다.
'주홍글씨'의 부활
이번 사태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프레이밍이 현대판 ‘주홍글씨’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중과 언론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기준으로 정우성 씨의 행동과 아이의 존재를 평가하며 낙인을 찍었다. 이처럼 아이의 존재를 부모의 사생활 문제로 치환하는 언어 사용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더 큰 문제는 이 폭력이 단순히 정우성 씨의 사례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유명인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문제다. 언론과 대중은 끊임없이 개인의 선택을 재단하며 획일적 가치를 강요한다. 결혼 제도, 출산 방식, 가족 형태 등 다변화된 현대 사회를 반영하지 못한 채, 우리는 여전히 낡은 틀 속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있다.
비도덕적인 것은 누구인가
아이들은 생각보다 현명하다. 한 중학교 수업에서 정우성 씨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손을 들어 보라고 했을 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왜 그게 잘못인가요?”라는 질문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는 생명의 탄생과 결혼이라는 제도가 별개의 문제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른으로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명을 축복해야 할 사회가 오히려 그 생명을 둘러싼 편견과 낙인으로 가득 차 있다. 정작 비도덕적인 것은 아이에게 낙인을 새기고, 부모를 재단하며, 생명을 둘러싼 프레임을 소비하는 우리의 태도다.
최근 정우성 씨의 아들 출생 소식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언어의 힘을 어떻게 오용하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누군가의 삶이 얼마나 쉽게 훼손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사진출처: 페이스북)
'프레이밍'의 폭력을 넘어서
이번 사태는 단순히 한 유명인의 사생활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언어 사용 방식, 특히 언론과 대중이 만들어 내는 프레이밍의 폭력성을 돌아보게 한다. 언어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은 때로 누군가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
‘혼외자’라는 단어 대신 ‘비혼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작은 변화에서 시작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단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지, 그리고 타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프레이밍'의 폭력은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 폭력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언어가 가진 힘을 재조명하고, 더 공정하고 포용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도덕적이고 책임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에디터_ 정석원 편집주간 (jsw@jungl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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