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4
국내 지자체의 공공디자인을 돌아보면 답답함이 밀려온다. 거리의 벤치는 불편하고, 공공건축물은 무미건조하며, 조형물은 조악하기 짝이 없다. 해외 주요 도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수준 높은 공공시설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문제는 예산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공공디자인 발주 방식 자체가 문제다.
현재 국내 지자제의 공공시설 디자인, 공공건축, 공공설치물 발주는 대부분 최저가 낙찰제로 진행된다. 이는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한 업체가 계약을 따내는 방식으로, 결국 사업자들은 비용을 줄이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디자인 품질은 뒷전으로 밀리고, 창의적인 접근은 배제되며, 재료와 시공 역시 가장 저렴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결과적으로 시민들은 최저가의 조악한 공공디자인을 경험하게 된다.
공공디자인은 단순한 시설이 아니라,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공간이다. 좋은 공공디자인은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시민들의 생활 만족도를 향상시키며, 심지어 경제적 가치까지 창출한다. 그러나 한국의 공공디자인은 ‘비용 절감’이라는 목표 아래 가치 평가 없이 진행되고 있다.
최저가 낙찰제가 초래하는 문제들
1. 디자인의 질적 저하
공공디자인은 단순히 설치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경험을 하게 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최저가 낙찰제에서는 이러한 요소들이 평가 대상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창의적인 설계나 실험적인 디자인은 시도조차 되지 못하고, 안전하면서도 무난한, 다시 말해 ‘평균 이하의’ 결과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2. 저품질 재료 사용으로 유지보수 비용 증가
비용을 최소화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가장 싼 재료가 선택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유지보수 비용이 증가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초기 설치 비용을 아끼기 위해 내구성이 낮은 재료를 사용하면, 몇 년 안에 다시 보수를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저렴한 공공시설물이 오히려 더 많은 세금 낭비를 초래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3. 획일화된 지자체의 도시 경관
공공디자인은 도시의 개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최저가 낙찰제에서는 디자인을 차별화하거나 지역적 특성을 반영하는 과정이 생략된다. 가장 저렴하고 무난한 설계가 선택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도시는 어디를 가도 비슷한 형태의 공공시설이 반복되는 획일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4. 지역 환경과의 조화 부족
공공시설은 단순한 개별 구조물이 아니라, 도시 경관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최저가 낙찰제에서는 이러한 고려 없이 ‘싼 것’ 위주로 결정되기 때문에,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시설들이 난립하게 된다. 특히 공공건축물의 경우,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요소를 반영하는 대신, 단순하고 기능적인 구조물로만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5. 시민 경험의 질 저하
공공디자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시민들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용 절감을 최우선으로 하다 보면, 시민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 고려되지 않는 공공시설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벤치의 디자인이 단순히 가격 때문에 결정되면,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하거나 비가 오면 활용할 수 없는 구조가 된다.
공공디자인은 단순한 기능적 요소가 아니라, 도시의 품격과 시민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제는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 가치 중심의 발주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할 때다. (사진: AI 생성)
해외 사례에서 배우다
공공디자인의 가치는 단순한 미적 요소를 넘어, 도시의 경쟁력과 시민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다. 이미 많은 선진국들은 최저가 낙찰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가치 중심의 평가 방식으로 전환했다.
1. 스웨덴 - 스톡홀름의 슬루센 재개발 프로젝트
스웨덴은 공공디자인 발주에서 디자인의 질과 지속가능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며, 최저가 낙찰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스톡홀름의 슬루센(Slussen) 재개발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교량 개보수가 아니라, 시민들이 공공공간을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친환경적이고 예술적인 디자인을 적용했다. 높은 디자인 품질 덕분에 스톡홀름의 도심은 더 매력적으로 변했고, 유지보수 비용 또한 줄어들었다.
2. 덴마크 - 코펜하겐의 자전거 친화적 공공시설
덴마크는 공공디자인에서 시민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코펜하겐의 자전거 도로 및 휴식 공간 디자인이다. 벤치, 가로등, 자전거 거치대 등 공공시설물이 단순히 기능적 요소가 아니라, 시민들의 편의성과 미적 가치까지 고려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이 모든 과정에서 시민들과 디자이너, 엔지니어가 협력하여 최상의 결과물을 도출했다.
3. 네덜란드 - 암스테르담의 도시 재생 프로젝트
네덜란드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에서 디자인 혁신성과 기능성을 평가하며, 최저가 입찰이 아닌 사회적 가치 창출을 목표로 한다. 암스테르담의 ‘아이보르그(IJburg)’ 프로젝트는 기존의 도심을 확장하면서 친환경 건축과 공공시설물 디자인을 접목하여 지속가능한 도시 모델을 구축한 사례다.
4. 핀란드 - 헬싱키 오디 도서관 프로젝트
핀란드는 공공건축에서 내구성과 디자인 품질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헬싱키의 오디(Oodi) 도서관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도시와 조화를 이루는 문화적 랜드마크로 설계되었다. 공공디자인이 도시 경쟁력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5. 독일 - 베를린의 공공디자인 혁신 정책
독일은 공공건축물과 도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디자인의 품질과 유지보수 비용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지속가능한 설계를 유도한다. 베를린은 특히 공공시설의 내구성을 강조하며, 단순한 가격 경쟁이 아니라 장기적인 경제성과 공공성을 반영한 평가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지자체 공공디자인,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첫째, 최저가 낙찰제를 폐지하고 가치 기반 평가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디자인의 질, 지속가능성, 공공성과 유지보수 비용까지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이 필요하며, 공공건축과 시설물은 장기적인 사용을 고려한 평가 방식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조달청과 지방자치단체가 평가 항목을 세분화하고, 공공디자인의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반영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둘째, 공공디자인 발주 과정을 개편해야 한다. 단순한 가격 경쟁이 아니라 디자인의 완성도와 기술적 요소를 평가하는 절차를 마련하고, 공공디자인 심사 과정에서 디자인 전문가와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이를 위해 디자인 공모전을 활성화하고, 창의적인 디자인이 실현될 수 있도록 발주 방식에 변화를 줘야 한다.
셋째, 지역 특성과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을 도입해야 한다. 공공시설은 지역의 문화와 환경을 반영해야 하며, 현재처럼 일률적인 기준으로 발주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 맞춤형 공공디자인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지자체와 협력하여 지역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개발하고,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을 반영한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
넷째, 유지보수 비용까지 고려한 평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최초 설치 비용만이 아니라, 장기적인 유지보수 비용을 포함한 ‘총 소유 비용(TCO, Total Cost of Ownership)’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야 하며, 이를 통해 초기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장기적으로 유지보수 비용이 적게 드는 고품질 공공디자인이 선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조달청은 공공디자인 프로젝트의 생애주기 비용 분석을 도입하고, 사업자들이 단기 비용 절감이 아닌 장기적 비용 절감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가장 저렴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치 있는 공공디자인을 만들자
공공디자인은 단순한 기능적 요소가 아니라, 도시의 품격과 시민들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제는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 가치 중심의 발주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할 때다.
공공시설과 공공건축은 한 세대가 사용하는 인프라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 싼 것’이 아니라,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도시의 품격과 공공디자인의 질을 높이는 것은 단순한 미적 개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투자다.
에디터_ 정석원 편집주간(jsw0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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