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컬쳐 | 인터뷰

[포커스 인터뷰] ‘김충원의 미술교실’에서 서종 작업실까지: 그림, 조각, 음악, 그리고 창작의 기쁨

2025-02-24

‘김충원의 미술교실’은 당시 전국의 아이들이 즐겁게 미술활동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기, 만들기등 누구나 쉽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는 접근 방식을 제시했던 ‘김충원의 미술교실’은 무척이나 획기적이었고,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김충원 선생은 ‘TV유치원 하나 둘 셋’에 출연해 전국에 있는 어린이 시청자들을 단번에 사로잡기도 했다. 

 

지금은 40대가 된 수많은 시청자들은 ‘국민 미술 선생님’인 김충원에 대해 궁금해했고, 그는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MBC의 <마이리틀텔레비전>과 tvN의 <뇌섹시대-문제적남자>에 출연하면서 다시 한 번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김충원 작가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김충원은 1979년 KBS 방송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6년 ‘김충원의 미술교실’을 열고 미술교육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그는 ‘김충원의 미술교실’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방송국을 시작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20여 년간 명지전문대학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광고대행사, 이벤트 회사, 출판사 등을 운영했던 그는 지금까지 30년 동안 300권의 책을, 그러니까 매년 10권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최근 그는 또 한권의 책을 냈다. <망치의 개그림 일기>다. 자신이 키웠던 강아지 ‘망치’의 이야기를 개의 관점에서 글과 그림으로 풀어낸 이 책은 유쾌하고 즐겁다. 

 

인생을 성장기 30년, 사회생활기 30년, 후반기 30년으로 나눈 그는 새로운 3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현재 서종의 작업실에서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어린시절 아무런 목적없이 집중했던 창작활동이 가장 즐거웠다고 말하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순수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그는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일 그림을 그리고, 오브제를 만들고, 책을 쓰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드럼을 치며 살고 있는 김충원 작가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작업실에서의 김충원 작가

 

 

Q. ‘국민 미술 선생님’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처음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첫 활동의 시작은 방송국 일러스트레이터였다. KBS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위한 그래픽 작업을 했고, 촬영 장비 등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방송미술을 10년간 했다. 

 

내가 맡았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론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가 있다. 그래픽만 담당했던 것이 아니라 문제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당시 진행자가 이계진 아나운서였는데 나에게 책을 내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라는 5권짜리 시리즈 책을 냈다. 

 

Q.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는 정말 획기적인 책이었다. 


그렇다. 당시 150만 부가 판매됐다. 대한민국 아동서적의 역사를 바꾸는 기록이 됐다. 

 

난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프로그램을 할 때부터 문제내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 책 이후에도 추리력,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퀴즈책을 만들었다. <퀴즈탐험 한국의 역사> 등의 시리즈였다. 

 

추리문제도 많이 만들었다.’ 어떤 공간에 발자국은 3개, 지문은 하나지만 아무도 들어온 사람이 없다. 범인은 누구인가’와 같은 식의 문제였다. 이러한 류의 책은 무척 인기가 많았다.  

 

Q. 그때부터 계속해서 진선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방송국 지인을 통해 진선출판사를 알게 됐고, 그곳에서 첫 책인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를 출간하게 됐다. 계약서를 썼는데 무척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갑은 을을 믿고, 을은 갑을 믿는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서로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바탕이 되었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마케팅을 했고, 아동 서적 최초로 통광고를 시도하기도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난 진선출판사에서만 책을 낸다는 약속을 했고 지금도 지키고 있다. 

 

Q.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집필했나.

 
첫 책이 나오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인쇄소에서 제본이 되어 박스로 떨어지는 첫 책을 직접 받았다. 그 책을 보며 세상에 나온 내 새끼를 앞으로도 잘 키워나가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이후 꾸준히 책을 냈다. 

 

김충원 작가의 집 곳곳에는 재치가 담긴 재미있는 작품들이 자리하고 있다. 

 

김충원 작가의 음악실 한쪽에는 그의 작품들과 그가 세계 여행을 다니며 수집한 수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김충원 작가는 다양한 재료들로 작업을 시도한다. 그에게는 흡음판도 좋은 재료가 된다.

 

 

Q. ‘김충원의 미술교실’은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 


아이가 자라면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는데 일을 하느라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가령 코끼리를 그려 달라고 하면 동그라미를 이렇게 그리고 코를 그리고 다리를 그리면 코끼리가 된다는 방식을 알려주었다. 나중에 이러한 그림들이 쌓였고, 출판사에서 그것들을 보게 되었다.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았고 그렇게 ‘김충원의 미술교실’이 만들어졌다. 

 

KBS <TV유치원 하나 둘 셋>에 6개월간 출연을 했는데, 많은 분들이 그때를 기억하고 있다. 어릴 때 <세서미 스트릿> 같은 프로그램을 굉장히 재미있게 봤다. 워낙 아이들도 좋아한다.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제작진에게 큰 나비넥타이를 만들어 달라고 직접 요청하기도 했다. 

 

Q. 직접 ‘사과나무’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사과나무’에서는 아동을 위한 순수창작동화만을 만들었다. 김충원의 미술교실을 통해 벌었던 돈을 순수창작동화를 제작하는 일에 쓰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국내 일러스트 작가와 동화작가들을 섭외해 책을 만들었다. 당시 순수창작동화의 시장은 녹록치 않았다. 판권, 인세 등이 국내 작가와 해외 작가들에게 다르게 적용됐다. 그래서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만드는 출판사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과나무’ 출판사의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 주저하지 않았다. 

 

Q. 방송국에서 여러가지 경험을 했는데,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백남준 선생을 만난 일이다. 84년도 KBS에서 일을 했는데, 그때 방송국 복도에서 백남준 선생님을 보게 되었다. 인사를 드렸는데, 세계적인 거장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선한 눈빛에 놀랐다. 커피를 한잔 대접해도 되겠냐고 여쭸는데 흔쾌히 좋다고 하셨고, 30분간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눴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았더니 백남준 선생님이 너무나 명쾌한 답을 해 주셨다. 아트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씀을 직접 듣게 된 것이다. 사람들에 의해 모든 가치가 결정되는 그런 작업, 남의 집 거실에 거는 장식품을 만드는 일에 목숨을 걸지 말라 하시며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림이든 무엇이든 대중과 더 가깝게 호흡하는 것이 진짜 아트다’라는 말씀에 고민을 접었다. 

 

김충원 작가와 그의 드로잉 작품들

 

 

Q. 무척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하면서 바쁘게 살았다. 출판사에 광고 대행사까지, ‘이엑스’를 만들었고, ‘사과나무’ 출판사를 운영했다. 브랜딩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때 쌍방울의 트라이를 브랜딩했고, 무주리조트의 마스터플랜을 담당했다. 

 

결혼식 이벤트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주례가 늦어 난리가 났던 결혼식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보고 방송국에서 함께 일했던 지인과 함께 직접 사업을 해보기로 했다. 신랑신부의 사진을 포스터로 만들고, 식장에 스포트라이트를 설치하고, 케이크에서 드라이아이스가 나오게 했다. 지금 결혼식장에서 쓰이는 방식들이 다 그때 만들어졌다. 결혼식의 문화가 바뀌게 된 것이다. 

 

오랜 시간 공부도 했다. 심리학 공부를 한 7년 했다. 나에 대해 알고 싶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정의하고 싶었던 거다. 난 어릴 때부터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다. 박사를 미술심리학으로 해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미술심리학이라는 자체가 없어 실천은 못했다. 

 

Q. 명지대 교수로도 오랜 시간 활동했는데, 정년 전 그만두었다. 이유가 있었나. 


학교생활이 참 좋았다. 하지만 정년을 채우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이유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평생 교수생활을 하셨다. 교수로서 만족감을 많이 느끼셨던 아버지는 65세에 정년퇴임을 하셨는데 그 이후 허전함을 많이 느끼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교수직이 참 좋지만 정년을 채우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스스로 60까지만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고 59세에 사표를 냈다. 

 

Q. 그 이후 어떠한 변화가 있었나. 


교수생활을 정리하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게 됐다. 인생을 90까지로 봤을 때태어나서 성장했던 30년, 일을 하고 경제생활을 했던 30년, 60세 이후의 30년으로 나누었다. 이제 나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대외적인 네트워크를 모두 다 정리했다. 그 좋아하던 골프도 끊었다. 교수생활을 마친 이후에도 강의가 많았는데 강의도 모두 정리했다. 나 자신에게 완전히 몰두하기 위해서였다. 온전히 나를 위한 30년을 갖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아 이곳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겼다. 지금도 서울엔 잘 가지 않는다. 

 

나를 스스로 완전히 고립시키면서 살고 있는데, 외로움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과 달리 오히려 자유롭다는 걸 느끼게 됐다. 그간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빼앗는 것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Q.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무척 만족스럽다. 하고 싶은 걸 모두 다 하고 있다. 그야말로 ‘혼자놀기의 진수’다. 음악실을 만들어 그곳에서 음악을 듣고, 드럼을 치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손녀와도 그림을 그리며 논다. 

 

김충원 작가의 음악실. 자신의 작품을 중심으로 다양한 스피커들이 놓여있다. 음악 애호가들의 로망으로 손꼽히는 스피커도 마련해두었다. 가운데 있는 핑크, 노랑 몬스터는 김충원 작가가 디자인한 스피커 케이스다.

 

음악실 한쪽엔 드럼이 놓여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드럼을 연주하며, 영화를 본다. 

 

 

Q. 작품이 무척 많은데, 작업량은 얼마나 되나. 


많이 한다. 매일같이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한다. 시리즈 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 서종으로 이사와 서종의 풍경을 담은 ‘서종 시리즈’를 했고, ‘고양이 시리즈’, ‘부엉이 시리즈’ 등 다양한 재료로 각종 시리즈 작업을 한다. 시리즈를 시작하면 무조건 100점의 작품을 만든다. 100점으로 정한 이유는 100점 정도 작업을 하면 해당 재료에 완전히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또 새로운 기법으로 작업을 시작한다. 

 

Q. 수많은 작품이 완성되어져 있는데, 전시 계획은 없나. 


현재 4~500점의 작품이 완성되어 있다. 하지만 전시 계획이나 판매 계획은 없다. 온전히 집중하여 그저 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거다. 작업을 돈의 가치로 환산하는 순간 나는 상품을 만드는 것이 된다. 

 

하지만 내가 죽고 난 뒤 이 작품들을 어떻게 할까에 대한 생각은 해 두었다. 온라인 갤러리를 만들어 원하는 사람에게 작품을 판매하고, 수익금은 현재 내가 후원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할 생각이다. 내가 에너지를 쏟았던 흔적들이 사회에 온전히 환원되도록 하고 싶다. 

 

조각 작품을 위한 각종 장비들이 구비되어 있다.

 

 

김충원 작가의 작업실. 이곳에서 그는 매일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며 순수한 창작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작업실에 마련된 책상. 김충원 작가는 직접 스피커를 제작하기도 한다. 빨간 스피커는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 그가 만든 스피커다. 

 

 

Q.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무엇인가. 


어머니의 교육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시인으로 활동하셨다. 현재 아흔이 넘으셨고, 우리나라 원로 중 한 분이시다. 문학을 하셨던 어머니는 문학적인 교육으로 나를 키우셨다.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책을 읽게 하셨고, 단 한줄이라도 글을 쓰게 하셨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책을 쓰는 에너지가 생긴 것 같다. 

 

그림을 그린다고 했을 땐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 이종 외삼촌이 김환기 선생으로, 외할아버지께서 ‘환쟁이’가 된다는 것에 대해 반대를 하셨다. 하지만 어머님은 진보의 아이콘이셨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자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어릴 땐 비행기, 잠수함 등을 설계하여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항공 엔지니어 쪽으로 진로를 결정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수학이 싫었다. 학교 특별활동 시간에도 밴드부를 택하고 싶었는데, 마감이 되어 우연치 않게 미술부에 들어갔다. 첫 데생을 만화처럼 그렸는데 그 그림을 보고 미술부 선생님이 정식으로 미술을 하라고 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 전국 미술대회에서 상을 탔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엔 순수회화를 했지만 아버지를 통해 일본의 그래픽 디자인에 대해 알게 되었고, 디자인으로 진로를 정하게 됐다. 

 

김충원 작가가 새롭게 내놓은 <망치의 개그림 일기>

 

 

Q. <망치의 개그림 일기>라는 새로운 책을 냈다. 어떤 이야기인가. 


망치, 똥꼬라는 개를 키웠고, 고양이와도 함께 생활했다. 개, 고양이들과 함께 지내며 메모를 했었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SNS를 통해 메모와 그림들을 선보이면서 혼자 놀다가 책으로 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3권의 책을 기획했다. 그 첫번째 책이 <망치의 개그림 일기>다. 

 

사실 5년전 더 이상 책을 내지 않겠다는 ‘절필선언’을 했었는데, 지속적인 요청으로 다시 책을 내게 됐다. 재미로 한 번 해보자는 생각에서 책을 썼다. 글을 쓰고 그림을 보완했다. 가편집을 했는데 무언가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존의 그림들을 다 버리고 모노톤으로 모든 그림을 새로 그렸다. 그렇게 완성한 책이다.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망치의 개그림 일기> 다음으로 ‘똥꼬의 이야기’와 고양이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특별한 계획은 없다. 그냥 지금처럼 나 자신에 몰두하며 창작활동을 이어갈 생각이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
 

facebook twitter

#김충원 #국민미술선생님 #김충원의미술교실 #김충원교수 #김충원작가 #망치의개그림일기 #김충원신간 #서종 #순수한창작활동 

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