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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정글 칼럼] “이제는 착한 바보를 그만둘 때다” - 디자인 서비스 업계 생존을 위한 단호한 제언

2025-04-01

디자인 서비스 업계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나쁜 클라이언트’를 만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디자인은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수정하는 거 아닌가요?’ ‘작업은 일단 들어가고, 비용은 나중에 논의하죠.’ ‘이거 그냥 샘플로 한 번 그려봐 주세요.’ 익숙한 말들이다. 명확하지 않은 브리핑, 무리한 납기일, 반복되는 무상 수정 요구, 심지어는 계약서 없이 진행되는 작업까지. 문제는 이런 일이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업계 전반에 만연한 ‘관행’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관행이야말로 지금 디자인 서비스 업계를 왜곡시키고 있는 핵심 원인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비합리적인 요구에 “Yes”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기때문이다. “디자인은 아무나 할 수 있다”는 인식 속에서 디자이너는 넘치고, 클라이언트는 우위에 있다. ‘갑’과 ‘을’의 관계는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형성되며, 디자이너는 늘 ‘을’의 위치에서 눈치를 보며 일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프리랜서나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일수록 생존을 위해 ‘무리한 요구’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한다. 아니,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다. “No”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업계의 질서를 다시 세울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생존 전략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업계 전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자해 행위다. 지금이야말로 디자이너가 스스로의 역할과 가치를 되찾기 위해 ‘관계의 정리’를 고민해야 할 때다.

 

“나쁜 관계를 끊어야, 좋은 관계가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불합리한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유는 불안 때문이다. “이 클라이언트를 놓치면 다음이 없을지도 몰라”라는 생각은 디자이너를 더욱 수세적인 입장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돌아보자. 그런 클라이언트와의 작업이 과연 디자이너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피로, 상처, 낮은 수익, 실패한 포트폴리오. 그 이상은 없지 않은가?

 

불필요한 관계를 끊을 때, 비로소 좋은 관계가 들어올 수 있다. 관계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다. 무례하고 무리한 고객에게 시간을 쏟는 만큼, 진심으로 디자인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날 기회는 줄어든다. 그리고 디자이너의 에너지는 유한하다. 창의성과 집중력을 갈가먹는 클라이언트와 계속 일한다는 것은, 자기를 소진하는 길이다.

 

‘정리’는 결코 패배가 아니다. 디자이너가 진짜 원하는 프로젝트,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계약 문화’는 생존이자 존중의 시작

 

디자인 업계의 가장 큰 약점은 계약 문화의 부재다. 여전히 상당수의 프로젝트가 구두 합의로 진행되고, 수정 횟수나 일정, 비용, 저작권 관련 사항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로 시작된다. 이는 클라이언트가 악의적이어서가 아니다. ‘디자인은 원래 이렇게 유동적인 것’이라는 왜곡된 인식 때문이다.

 

디자인 계약서는 방어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협업의 기준을 세우고,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는 ‘신뢰의 도구’다. 계약을 통해 양측은 서로에게 책임을 묻고, 동시에 존중을 보장받는다. 좋은 클라이언트는 계약서를 요구하는 디자이너를 신뢰한다. 명확한 조건이 오히려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계약을 회피하거나, 명시적인 조건을 꺼리는 클라이언트는 애초에 거래 금지 대상이다. 계약서 작성은 디자이너의 자존감을 지키는 첫 걸음이다.

 

“No”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업계의 질서를 다시 세울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생존 전략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업계 전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자해 행위다. (본문 중에서, 사진: AI 이미지 생성)
 

 

디자이너는 ‘을’이 아니다. 전략적 파트너다

 

디자인은 단순히 시각적 결과물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다. 브랜딩, 마케팅, 고객 경험, 커뮤니케이션 전략 등 사업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고부가가치 창출 영역이다. 그런데도 디자인은 아직까지 ‘감각적인 작업’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저평가되고 있다. 디자이너는 여전히 ‘갑의 지시를 받는 을’의 위치에서 일하며, 기획에도 관여하지 못한 채 마감일과 수정 요구에만 반응하는 소극적 위치에 머물러 있다.

 

이제는 디자이너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꿔야 한다. 전략적 파트너로서 프로젝트에 접근하고, 클라이언트와의 관계를 ‘수주자-발주자’가 아닌 ‘공동 창작자’로 정의해야 한다. 그를 위해선 기획 초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브리핑 단계에서부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디자이너는 브랜드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높이는 ‘기획자’이자 ‘해결자’이기 때문이다.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진짜 프로다

 

디자인 서비스 산업이 지속 가능하려면, 디자이너가 자신의 가치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No”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다. 불합리한 요구, 무상 수정, 시간당 과도한 업무 요구에 단호히 대응하지 않으면, 결국 디자인 노동은 계속 착취당할 수밖에 없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처음에는 불편할 수 있고, 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생긴다. 하지만 그것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더 나은 미래도 없다. 용기 있는 한 사람이 시장을 바꾸고, 용기 있는 디자이너들이 모일 때 업계의 질서가 바뀐다.

 

업계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디자인 서비스 산업은 더 이상 “예쁜 걸 만들어주는” 미용 조형 산업이 아니다. 전략과 기획, 콘텐츠와 기술이 결합된 융복합 산업이다. 이런 변화에 걸맞은 계약 문화, 존중 기반의 협업 시스템, 그리고 디자이너의 자기 존중이 절실하다. 정부나 협회 차원에서의 가이드라인 마련도 중요하지만, 결국 변화를 이끄는 것은 ‘한 명의 디자이너’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은, ‘나쁜 클라이언트’를 과감히 떠나보내는 일이다.

 

“무조건 ‘Yes’를 외쳐온 것, 그것이 지금의 나약한 업계를 만들었다. 이제는 ‘No’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 그것이 업계의 생태계를 바꾼다.”
이제, 우리 스스로를 위해 이 말에 책임을 져야 할 때다.

 

에디터_ 정석원 편집주간(jsw0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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