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3
나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다.
처음 가보는 곳이 있으면 가보고 싶고, 재미있는 공간을 만나면 누가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하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면 유명 관광지만 찾아다니기보다 골목길을 걷고, 시장에 들어가 보고, 작은 미술관과 서점에도 기웃거린다.
그런데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역시 ‘사람’인 것 같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궁금하지만,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더 궁금하다. 왜 그 일을 시작했는지, 살면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그럼에도 왜 계속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 궁금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의 인생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 속에는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별것 아닌 선택 하나가 몇십 년 뒤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다.
<30년의 사업을 마무리하며 보이기 시작한 것>
나는 30년 동안 디자인·브랜딩 회사를 운영해왔다. 기업과 기관의 브랜드를 만들고, 전시와 행사를 기획하고, 공간과 콘텐츠를 디자인하며 수많은 사람과 함께 일했다. 그 시간 동안 디자인은 나에게 직업이었고 사업이었으며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일이었다.
이제 30년의 사업을 마무리하고 CEO라는 자리에서도 물러나 있다. 그렇다고 디자인 분야를 떠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회사를 경영하는 일에서 벗어나면서 내가 디자인이라는 세계에서 앞으로 무엇을 더 하고 싶은지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사람을 구성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그 결과물을 만든 ‘사람’이 더 궁금해졌다. 누가 만들었을까.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했을까. 무엇을 실패했고, 무엇을 배웠으며, 다음에는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결국 내 관심이 디자인의 결과에서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과 그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CEO라는 역할을 내려놓은 뒤 디자인정글 편집인으로서의 일에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쓰려고 한다. 내게 그것은 은퇴 이후에 할 일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어떤 방식으로 디자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다.
<인터뷰는 ‘사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일>
디자인정글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일 가운데 하나가 인터뷰다.
인터뷰를 준비할 때면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을 찾아본다. 자료를 읽고 과거의 활동을 찾아보고, 그 사람이 왜 지금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를 궁금해한다.
그런데 정작 직접 만나면 준비해 간 질문보다 다른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또 다른 질문이 생기고,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인생의 장면을 만나게 된다.
나는 그것이 인터뷰의 재미라고 생각한다. 인터뷰는 답을 얻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이야기를 함께 찾아가는 탐험에 가깝다.
그래서 요즘에는 ‘탐험’이라는 말에 더 관심이 간다. 탐험이라고 하면 북극이나 사막, 정글 같은 곳을 떠올리지만 꼭 오지에 가야만 탐험인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도 하나의 미지의 세계이고, 처음 가보는 도시도 그렇다. 오래된 물건 하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모르는 세계를 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편집인이라는 역할은 나와 꽤 잘 맞는다. 궁금하면 찾아가고, 사람을 만나 질문하고,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보고, 자료를 찾고, 그것들을 다시 글과 사진으로 편집해 사람들에게 전하면 된다. 어쩌면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탐험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역할인지도 모르겠다.
<여행가방에 물건보다 ‘이야기’를 담는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을 가면 무엇을 보았는지만큼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발견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도시에는 도시의 이야기가 있고, 건축에는 건축가의 이야기가 있다. 미술관에는 작품뿐 아니라 그것을 만든 사람과 수집한 사람, 공간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오래된 간판 하나에도 시대가 들어 있고, 로고 하나에도 기업과 사람과 디자인의 역사가 들어 있다. 그래서 내 여행가방에는 돌아올 때마다 물건보다 이야기가 더 많이 담겨오는 것 같다.
앞으로는 이런 여행을 더 많이 하고 싶다. 세계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디자인과 건축, 미술관과 시장, 골목과 오래된 가게를 보고,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디자인정글’에 기록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요즘 생각하는 ‘문화디자인 탐험가’라는 말도 거창한 직함이라기보다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방식에 가깝다. 여행하고, 발견하고, 사람을 만나고, 질문하고, 기록하는 사람. 나는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호기심만큼은 줄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처음 가보는 곳을 찾아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내가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글로 남기고, 사진으로 기록하고, 전시로 풀어내고, 또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 (그림: AI 생성)
<결국 모든 길은 ‘이야기’로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것들도 모두 ‘이야기’라는 한 단어로 연결된다. 여행 이야기, 가족 이야기, 세종과 한글 이야기, 로고 이야기, 도시 이야기, 디자인 이야기, 그리고 특별한 이름 없이 자기 자리에서 평생을 살아온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대단한 것만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사람과 공간과 사물에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던져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야기미술관’을 만드는 일에도 집중하고 있다. 유명한 작품을 많이 소장한 미술관보다는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야기를 모으는 미술관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여행에서 가져온 물건 하나가 여행 이야기가 되고, 오래된 가족사진 한 장이 가족 이야기가 되고, 한글 한 글자가 세종의 이야기가 되고, 기업의 작은 로고 하나가 디자인과 브랜딩의 이야기가 되는 곳.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온 보통 사람들의 인생도 전시가 될 수 있는 곳. 나는 요즘 그런 미술관을 만들어가는 일이 무척 재미있다.
<만드는 사람에서 발견하고 연결하는 사람으로>
돌이켜보니 이것은 갑자기 생긴 변화가 아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궁금해하고, 찾아가고, 만나고, 듣고, 기록하고, 다시 이야기로 만드는 일을 해왔다. 다만 그동안 그것을 ‘여행’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인터뷰’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디자인’이나 ‘편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30년 동안 해온 디자인·브랜딩 역시 결국 기업과 도시와 사람에게 숨어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시각적인 언어로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이제 그 방식이 조금 달라지는 것뿐이다.
예전에는 디자인이라는 결과물을 직접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일이 많았다면, 앞으로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사람과 공간과 디자인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기록하고, 연결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다.
그래서 내게 ‘디자인정글 편집인’이라는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디자인정글은 내가 궁금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디자인 현장을 찾아가고, 여행에서 발견한 것을 기록하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세상과 연결할 수 있는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난 30년 동안의 디자인·브랜딩 경험도 앞으로 이 일을 더 잘하기 위한 긴 준비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직접 해봤기 때문에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 있고, 실패해봤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며, 오래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
이제는 그 경험을 앞세워 누군가를 가르치기보다 좋은 질문을 던지고, 잘 듣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가치를 발견하는 데 사용하고 싶다.
그것이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편집인의 역할이다.
<호기심은 은퇴하지 않는다>
이제야 그 모든 것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바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내 삶의 원천이면서 앞으로 가고 싶은 방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도 호기심만큼은 줄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처음 가보는 곳을 찾아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내가 모르는 분야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 그리고 그것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글로 남기고, 사진으로 기록하고, 전시로 풀어내고, 또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
호기심이 있는 한, 세상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한 내가 할 일도 많이 남아 있다. 나이가 들면 몸은 조금 느려지고 언젠가는 멀리 여행하기도 어려워지겠지만, 마음속에는 ‘물음표’ 하나를 오래 간직하고 싶다.
저곳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저 평범한 물건에는 어떤 시간이 숨어 있을까.
그 물음표를 따라가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탐험’이다. 30년 동안 디자인과 브랜딩을 만드는 일을 했다면, 이제는 그 세계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고 기록하는 일을 해보고 싶다.
디자인정글 편집인으로 사람을 만나고, 세계를 여행하고,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고, 때로는 그 이야기를 전시와 미술관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여정. 나는 앞으로도 그 길을 오래 걷고 싶다.
직업에서는 은퇴할 수 있고 CEO에서도 은퇴할 수 있다. 하지만 호기심까지 은퇴할 필요는 없다.
아직 만나고 싶은 사람이 많고, 아직 가보고 싶은 곳도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글_ 정석원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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