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4
지난 9월 3일 저녁,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막한 ‘서울라이트 DDP 2026 가을’의 행사 현장을 찾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DDP의 거대한 외벽에 빛이 들어오는 순간, 익숙하게 보아온 건축물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빛과 색, 영상과 음악이 DDP의 곡면을 따라 흘렀다. 백남준과 유영국의 예술세계, ‘청구영언‘의 오래된 한글 노랫말은 동시대의 미디어아트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라이트 DDP를 여러 번 보아왔지만, 이번에 특히 분명하게 느낀 것이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미디어아트의 작품성과 기술, 연출 수준이 확실히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의 서울라이트가 거대한 건축물 외벽에 화려한 영상을 투사하는 것만으로도 놀라움을 주었다면, 이제는 건축과 영상, 빛과 음악, 공연과 관객이 서로 반응하며 하나의 종합예술을 만들어가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외국인 관객이 무척 많았다는 점이다. 정확한 통계를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현장에서 느끼기에는 오히려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아 보일 정도였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미디어아트가 이제 서울 시민을 위한 야간행사를 넘어, 외국인 관광객이 일부러 찾아오는 서울의 대표 문화콘텐츠로 성장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백남준의 비디오 신디사이저에서 영감을 얻은 <The Break Point>는 그의 실험정신을 실시간 미디어아트로 되살린다.
<한국 문화의 ‘원형’을 오늘의 빛으로 바꾸다>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주최·주관하는 ‘서울라이트 DDP 2026 가을’은 9월 3일부터 13일까지 11일간 열린다. 매일 오후 7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DDP의 222m 비정형 외벽을 활용한 미디어파사드와 레이저쇼, 라이브 공연을 무료로 선보인다.
올해 서울라이트 DDP의 연간 주제는 ‘DAYBREAKER’다. 어둠을 깨고 새로운 빛을 여는 혁신과 도전정신을 가을·겨울·카운트다운 세 개의 축제를 통해 보여준다는 의미다.
그 첫 장인 가을 시즌의 주제는 ‘K-Original Light’다.
한국 미디어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한국 추상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유영국, 그리고 우리 문화와 사고의 바탕이 된 한글 노랫말을 담은 ‘청구영언‘을 동시대 미디어아트로 재해석했다.
한국 문화의 중요한 원형을 과거의 유산으로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지털 기술과 빛·영상·음악을 통해 오늘의 감각으로 확장한 것이다.
백남준의 비디오 신디사이저에서 영감을 얻은 <The Break Point>는 그의 실험정신을 실시간 미디어아트로 되살린다.
유영국의 작품을 재해석한 <내 안의 산을 찾아서>는 작가가 평생 탐구했던 산과 색채를 DDP의 거대한 곡면 위로 확장한다.
‘청구영언‘을 재해석한 <말이 빛나는 밤>에서는 오래된 시조에 담긴 감정과 자연의 풍경이 한글과 디지털 패턴, 빛의 이미지로 다시 살아난다.
전통문화와 현대미술, 첨단 디지털 기술을 단순히 한자리에 모은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해 새로운 문화콘텐츠로 ‘편집’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영국의 작품을 재해석한 <내 안의 산을 찾아서>는 작가가 평생 탐구했던 산과 색채를 DDP의 거대한 곡면 위로 확장한다.
<완성된 영상을 넘어 ‘살아 있는 미디어아트’로>
이번 행사에서 가장 주목할 변화는 서울라이트 DDP 최초로 선보인 ‘라이브 퍼포먼스와 실시간 반응형 미디어아트’다.
기존 미디어파사드가 미리 제작된 영상을 건축물 외벽에 투사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에는 현장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따라 영상과 빛이 실시간으로 변화한다. 같은 작품이라도 공연과 현장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른 장면이 만들어진다.
개막 공연에서는 이디오테잎의 음악과 <The Break Point>의 미디어아트가 결합해 DDP 외벽 전체를 거대한 시청각 공연장으로 바꿨다.
윤제호의 <미래의 빛, 시간의 울림을 통과하다>도 인상적이었다. 레이저와 조명, 전통 타악과 전자음, 인공지능 영상과 무용을 결합해 DDP에 축적된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가능성을 하나의 공연으로 연결했다.
이러한 시도는 미디어아트를 단순히 ‘보는 영상’에서 벗어나게 한다. 음악과 공연, 공간과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살아 있는 예술’로 확장하는 것이다.
'청구영언'을 재해석한 <말이 빛나는 밤>에서는 오래된 시조에 담긴 감정과 자연의 풍경이 한글과 디지털 패턴, 빛의 이미지로 다시 살아난다.
<건축물이 화면이 되고, 도시가 미술관이 되다>
서울라이트 DDP가 다른 미디어아트 행사와 구별되는 가장 큰 이유는 DDP라는 건축물 자체에 있다.
일반적인 평면 스크린과 달리 DDP 외벽은 수많은 곡면과 비정형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들은 완성된 영상을 단순히 크게 확대해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의 형태와 동선, 관람 위치와 도시의 야경까지 고려해 작품을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이번 작품들을 현장에서 보면서 빛과 영상이 건축물 위에 ‘얹힌다’기보다, DDP의 곡면을 따라 흐르며 건축물 자체를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서 건축은 더 이상 작품의 배경이 아니다. 건축물 자체가 화면이자 무대이며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의 매체가 된다.
낮의 DDP가 건축이라면, 밤의 DDP는 거대한 미디어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빛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휴대전화로 촬영하고, 음악에 맞춰 반응하는 풍경도 좋았다.
미술관 안에서 일부 관람객만 만나던 미디어아트가 도시 한복판으로 나와 누구나 자유롭게 경험하는 공공예술이 된 것이다.
윤제호의 <미래의 빛, 시간의 울림을 통과하다>도 인상적이었다. 레이저와 조명, 전통 타악과 전자음, 인공지능 영상과 무용을 결합해 DDP에 축적된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가능성을 하나의 공연으로 연결했다.
<외국인이 더 많이 보였던 서울의 밤>
이번 현장에서 특히 눈에 띈 것은 외국인 관람객이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에는 외국인이 많은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라이트를 보기 위해 DDP 광장에 모여 작품을 감상하고 촬영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은 이 행사가 이미 국제적인 야간문화 콘텐츠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DDP는 건축 자체만으로도 외국인에게 매력적인 장소다. 여기에 거대한 미디어아트와 음악 공연, 서울의 밤 풍경이 더해지면 다른 도시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서울만의 장면이 만들어진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중요한 것은 유명 관광지를 한 번 보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라이트 DDP는 서울의 야간관광을 대표할 만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서울의 디자인과 기술, 예술과 대중문화가 결합한 ‘서울다운 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으로 외국어 안내와 작품 해설, 관광 프로그램, 주변 상권과의 연계가 더욱 정교해진다면 서울라이트는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축제로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디오테잎의 특별 퍼포먼스 장면. IDIOTAPE은 일렉트로닉과 록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사운드와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강렬한 드럼의 라이브 퍼포먼스로 국내 라이브 일렉트로닉 씬을 대표하는 밴드다.
<한국 미디어아트를 키우는 거대한 실험실>
필자가 서울라이트 DDP에 특별히 기대하는 것은 이 행사가 한국 미디어아트 분야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백남준이라는 세계적인 미디어아트의 선구자를 배출했다. 디지털 기술과 영상 제작, 음악과 공연, 게임과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높은 경쟁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량을 서로 연결하고, 작가들이 대규모 작품을 실험하며, 시민과 관광객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공공 플랫폼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서울라이트 DDP가 바로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하나의 미디어아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작가뿐 아니라 영상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 사운드 아티스트와 조명디자이너, 건축가와 엔지니어, 음악가와 공연예술가가 함께 협업해야 한다.
DDP처럼 규모가 크고 구조적으로 복잡한 공간에서 작품을 구현하는 경험은 창작자와 기술 인력 모두에게 소중한 자산이 된다. 이곳에서 축적된 기술과 협업 경험은 전시와 공연, 도시경관과 축제, 관광과 브랜드 공간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될 수 있다.
실제로 서울라이트가 해를 거듭할수록 작품과 기술, 연출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플랫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매년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고 거대한 건축물 위에서 실험하는 과정 자체가 한국 미디어아트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훈련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국내외 유명 작가를 초청하는 것과 함께 신진 미디어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이들이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DDP에서 개발한 작품이 해외 도시와 국제 미디어아트 축제로 진출할 수 있는 유통 구조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서울라이트 DDP는 단순한 작품 상영장이 아니라 한국 미디어아트의 창작과 기술, 인재와 산업을 함께 성장시키는 세계적인 연구개발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주최·주관하는 ‘서울라이트 DDP 2026 가을’은 9월 3일부터 13일까지 11일간 열린다. 매일 오후 7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DDP의 222m 비정형 외벽을 활용한 미디어파사드와 레이저쇼, 라이브 공연을 무료로 선보인다.
<빛을 따라 사람과 도시의 활력이 움직이다>
서울라이트 DDP의 또 다른 목적은 미디어아트를 서울의 야간경제와 연결하는 데 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야간경제는 단순히 상점의 영업시간을 늦추는 정책이 아니다. 시민의 퇴근 이후 문화와 여가를 풍성하게 하고 관광객의 체류시간을 늘리며, 그 활력이 주변 상권의 소비와 일자리로 이어지게 하는 도시전략이다.
DDP는 남산·광화문·한강과 함께 서울의 4대 야간 랜드마크로 육성된다. 서울라이트를 보기 위해 DDP를 찾은 사람이 공연을 즐기고 인근 식당과 카페를 방문하며, 신당동·장충동·광희동 등 주변 지역까지 걸어가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실제 데이터도 이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울AI재단이 2024년 DDP에서 열린 7개 문화행사의 전·중·후 데이터를 비교한 결과, 행사 기간 DDP 내부 상권 매출은 평균 12.2%, 동대문 전체 상권 매출은 평균 10.8%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6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9.8%가 DDP 방문 후 주변 상권을 이용했다고 답했다. 문화행사가 관람으로 끝나지 않고 식음료와 쇼핑, 전시와 패션 소비로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번 행사에서는 DDP 야외에 ‘K-푸드존’을 운영하고, 신당·장충·광희 등 동대문 일대 140여 곳을 6개 테마 코스로 연결한 ‘DDP×동대문 슈퍼패스’도 선보인다.
하나의 미디어아트 행사가 주변 동네를 함께 경험하는 ‘야간 도시여행’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서울디자인재단은 서울라이트 DDP를 계절별 대형 축제로 운영하는 동시에 행사 기간이 아닐 때도 빛과 미디어아트 콘텐츠를 만날 수 있도록 상설 야간 프로그램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DDP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서울디자인재단 차강희 대표)
<축제가 끝나도 DDP의 밤은 계속되어야 한다>
더욱 의미 있는 변화는 ‘DDP 365 라이트’의 상설화다.
서울디자인재단은 서울라이트 DDP를 계절별 대형 축제로 운영하는 동시에 행사 기간이 아닐 때도 빛과 미디어아트 콘텐츠를 만날 수 있도록 상설 야간 프로그램을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미디어아트 분야가 발전하려면 화려한 일회성 이벤트만으로는 부족하다. 작품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시민과 관광객의 반응을 확인하며, 새로운 창작자가 반복해서 참여할 수 있는 안정적인 무대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DDP 365 라이트’는 서울라이트의 성격을 기간형 축제에서 상설 미디어아트 플랫폼으로 바꾸는 중요한 시도다.
2025년 서울라이트 DDP의 연간 관람객은 192만 명에 달했다. 같은 해 12월 31일 카운트다운에는 약 8만7,000명이 찾았다. 또한 4년 연속 iF 디자인 어워드,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 IDEA 등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에서 성과를 냈으며, ‘세계 최대 비정형 건축물 3D 프로젝션 매핑 디스플레이’로 기네스 세계기록에도 등재됐다.
이제 서울라이트 DDP는 규모와 관람객 수를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더 많은 창작자를 키우며, 시민의 문화 향유와 외국인의 관광 경험을 풍성하게 하고, 그 활력을 지역경제로 확산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서울라이트 DDP의 빛은 DDP 외벽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빛은 동대문의 골목과 상권으로 퍼지고, 시민의 일상과 관광객의 서울 경험으로 이어져야 한다. 동시에 새로운 작가와 기술자를 키우고, 한국의 문화유산을 동시대의 콘텐츠로 재해석하며, 한국 미디어아트가 세계로 진출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이날 필자가 DDP에서 본 것은 단순히 화려한 빛의 축제가 아니었다.
건축이 미디어가 되고, 도시가 미술관이 되며, 시민과 세계인이 그 안의 관객이 되는 새로운 도시의 가능성이었다.
백남준이 비디오를 새로운 예술의 도구로 바꾸었듯, 이제 DDP는 건축물 전체를 새로운 시대의 미디어로 바꾸고 있다.
서울라이트 DDP가 밝히는 것은 서울의 밤만이 아니다. 해를 거듭하며 더욱 정교해지는 이 거대한 빛의 실험은 ‘한국 미디어아트의 미래‘를 밝히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고 있다.
글_ 정석원 편집인(jsw0224@gmail.com)
사진제공_ 서울디자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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