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1-03
<한글 그래픽 80여 점·세계 그래픽아트 36점·고양이 캐릭터 101점… 고급 욕실용품과 예술이 어우러진 ‘창고형·편집형 미술관’>
커다란 그래픽 포스터를 따라 걷다 보면 맞은편에 세면기가 놓여 있다. 고양이 캐릭터들이 웃고 있는 곳에는 흰 욕조가 자리하고, 파란 철제 난간 너머로는 포장된 욕실용품이 층층이 쌓여 있다. 한글 자모가 색채와 이미지로 변주되는 전시실을 지나면 세종대왕 페이퍼토이들이 줄지어 관람객을 맞는다.
전시장일까, 욕실용품 쇼룸일까, 아니면 물류창고일까. 충북 음성 바스엑스포 테마파크 내 주제관에 자리한 ‘이야기미술관(스토리움·STORIUM)’은 이 세 가지 풍경을 한 공간에 담는다. 고급 욕실용품과 그래픽 작품, 캐릭터가 어우러지는 모습은 마치 리빙아트페어를 연상시킨다. 다만 며칠 동안 설치했다 철거하는 행사장이 아니라, 창고의 일상 속에 전시가 들어왔다는 점에서 다르다.
지난 10월 9일 개관전인 〈한글·세종 특별전〉을 선보인 데 이어, 이번에 〈세계그래픽아트페어전〉과 〈대한민국 고양이아이돌 캐릭터전〉까지 함께 공개하면서 이야기미술관의 구성이 한층 풍성해졌다. 공간이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창고를 미술관으로, 사물을 예술품으로”다. 욕실용품 창고의 기능과 풍경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콘텐츠를 편집해 전시하는 방식으로, 미술관 측이 국내 최초를 표방하는 ‘창고형·편집형 미술관’의 모습을 구체화했다.
이야기미술관이 내세우는 캐치프레이즈는 “창고를 미술관으로, 사물을 예술품으로”다. 욕실용품 창고의 기능과 풍경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콘텐츠를 편집해 전시하는 방식으로, 미술관 측이 국내 최초를 표방하는 ‘창고형·편집형 미술관’의 모습을 구체화했다.
이곳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품만이 아니다. 노출된 철골과 천장, 구멍이 일정하게 뚫린 금속 바닥, 파란 난간과 포장 상자들이 전시의 배경을 이룬다. 기존 창고의 구조는 가려지지 않는다. 그 사이에 검은 프레임의 전시 벽과 조명이 들어서면서 산업공간과 전시공간이 함께 작동한다.
<창고를 비우지 않았기에 가능한 전시>
이곳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품만이 아니다. 노출된 철골과 천장, 구멍이 일정하게 뚫린 금속 바닥, 파란 난간과 포장 상자들이 전시의 배경을 이룬다. 기존 창고의 구조는 가려지지 않는다. 그 사이에 검은 프레임의 전시 벽과 조명이 들어서면서 산업공간과 전시공간이 함께 작동한다.
오래된 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사례는 이미 낯설지 않다. 이야기미술관의 특징은 창고의 흔적을 남기는 수준을 넘어, 보관 중인 물건과 욕실 제품이 전시와 나란히 존재하도록 했다는 데 있다. 창고를 완전히 비운 뒤 미술관을 들이는 방식과는 다른 접근이다.
제품과 작품의 관계도 흥미롭다. 그래픽 포스터 앞에 놓인 세면기는 실용적인 욕실 제품이면서 곡선과 비례를 가진 조형물로 보인다. 욕조 주변에 배치된 캐릭터는 제품의 분위기를 바꾸고, 욕조의 부드러운 형태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배경이 된다. 사물과 이미지가 서로의 인상을 바꾸는 것이다.
‘사물을 예술품으로’라는 문장도 이러한 경험 속에서 읽을 수 있다. 창고의 모든 제품에 예술품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선언이라기보다, 쓰임과 가격에 익숙해진 시선에서 잠시 벗어나 형태와 소재, 만든 사람의 생각을 살펴보자는 제안이다.
<한글을 읽는 자리에서, 한글과 노는 자리로>
〈한글·세종 특별전〉에서는 이하웅 작가의 한글 그래픽 작품 80여 점이 중심을 이룬다. 약 15년간 한글의 구조를 연구하며 ‘놀이 한글’을 개발해온 작가는 자음과 모음을 읽고 쓰는 기호이자 조합하고 변형할 수 있는 조형 요소로 바라본다.
그의 연구는 문자에 장식을 더하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한글이 어떤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그 요소들이 어떻게 만나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지를 살피는 작업이다. 이하웅 작가가 창안한 ‘문자 구현용 세그먼트’는 2012년 특허 등록됐다. 문자 조각을 조합하여 한글뿐 아니라 영문자와 기호, 도형 등을 구현하고, 그 과정에서 한글의 조합 원리를 익히도록 하는 구상이다.
이하웅 작가는 201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개최한 제9회 한글문화 상품 공모전 에서 한글 의자와 티셔츠, 시계, 북마크, 조형놀이 유닛 등을 선보여 대상(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 문자의 구조를 가구와 생활용품, 놀이의 언어로 옮기는 작업이 일찍부터 이어져온 셈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러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벽면에서는 한글 자모가 선명한 색면과 어우러지고, 글자와 사물의 이미지가 서로의 의미를 환기한다. ‘토마토’라는 낱말과 토마토 이미지가 만나는 작품에서는 글자를 읽는 행위와 그림을 보는 행위가 겹쳐진다. 세계의 문자와 기호를 함께 배치한 화면은 한글을 다른 문자문화와 비교하며 바라보게 한다.
이 작품들을 따라가다 보면 한글의 과학성을 설명으로 이해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글자의 구조를 눈으로 발견하고, 형태의 반복과 차이를 비교하며, 조합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놀이 한글’의 의미는 그처럼 문자와 친숙해지는 과정에 있다.
전시 공간 사이사이에 놓인 세종대왕 페이퍼토이 역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역사 속 인물의 권위적인 초상 대신 작고 친근한 캐릭터가 반복되면서, 세종과 한글을 일상의 시선으로 만나는 통로가 열린다.
이 작품들을 따라가다 보면 한글의 과학성을 설명으로 이해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글자의 구조를 눈으로 발견하고, 형태의 반복과 차이를 비교하며, 조합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놀이 한글’의 의미는 그처럼 문자와 친숙해지는 과정에 있다.
<인사동에서 음성으로, 세계 그래픽아트의 재발견>
한글 전시에서 시선을 옮기면 세계적인 그래픽디자이너들의 작품이 이어진다. 〈세계그래픽아트페어전〉은 2021년 서울 인사동 코트(KOTE)에서 열린 ‘세계그래픽아트페어’ 참여 작가들의 작품 36점을 다시 소개하는 자리다.
당시 전시는 세종이야기미술관이 주최하고 미국 산호세주립대학교의 김창식 교수가 큐레이션을 맡았다. 전시는 그해 10월 10일 코트의 ‘내면의 서재’에서 시작됐다. 그래픽디자인이 지닌 정보 전달 기능과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을 함께 조명하며, 작가의 철학과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작품들을 소개한 행사였다.
이번에 만나는 작가는 공동 작업팀을 포함해 여섯 팀이다. 쿠키 크시슈토프 이완스키(Kuki Krzysztof Iwanski), 피터 반코프(Peter Bankov), 키스 키츠(Keith Kitz), 가보 팔로타이(Gabor Palotai), 한스 디터 라이헤르트(Hans Dieter Reichert), 그리고 레나토 탈리와 사비나 오버홀처(Renato Tagli & Sabina Oberholzer)다.
쿠키 이완스키는 타이포그래피와 색채를 중심으로 실험적인 화면을 구성한다. 폴란드 포스터의 표현적 전통과 구조적인 디자인 사고를 함께 탐구하며, 문자의 가독성과 시각적 역동성 사이를 오간다. 피터 반코프에게 포스터는 자유로운 실험의 장이다. 두 작가의 작업은 같은 매체 안에서도 그래픽디자인이 얼마나 다른 표정과 에너지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미국의 키스 키츠는 손을 활용하는 아날로그 작업과 일상의 관찰을 중시한다. 2014년 시작한 ‘365 포스터 프로젝트’는 매일의 사건과 생각을 지속적인 시각 실험으로 이어가는 방식이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활동하는 가보 팔로타이는 예술과 디자인, 여러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시각세계를 구축해왔다.
한스 디터 라이헤르트는 타이포그래피 잡지 <Baseline>의 발행·편집과 이미지·텍스트를 결합하는 작업으로 알려져 있다. 스위스의 레나토 탈리와 사비나 오버홀처는 1983년 함께 스튜디오를 설립해 활동해온 파트너로, 자연과 창의성의 관계, 메시지의 명확성을 중시해왔다.
이들의 작품을 욕실용품과 마주 보며 감상하는 경험은 일반적인 포스터 전시와 다르다. 종이 위의 색채와 문자의 움직임, 도기 제품의 곡선과 표면이 한 시야 안에 들어온다. 평면 그래픽과 입체 제품이 모두 인간의 감각과 생활에 관여하는 디자인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들의 작품을 욕실용품과 마주 보며 감상하는 경험은 일반적인 포스터 전시와 다르다. 종이 위의 색채와 문자의 움직임, 도기 제품의 곡선과 표면이 한 시야 안에 들어온다. 평면 그래픽과 입체 제품이 모두 인간의 감각과 생활에 관여하는 디자인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욕조에 들어간 고양이, 캐릭터가 공간을 바꾸다>
〈대한민국 고양이아이돌 캐릭터전〉에서는 고양이 캐릭터 101점을 다시 선보인다. 난간을 따라 배치된 커다란 캐릭터 패널과 선반 위의 인형, 욕조 주변에 자리한 고양이들이 창고의 단단한 구조에 유쾌한 표정을 더한다.
이 프로젝트의 출발을 이해하려면 2019년의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엑스포디자인그룹은 ‘대한민국 고양이’ 캐릭터 공모전을 개최했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획된 공모로, 한국의 고양이를 어떤 모습과 이야기로 표현할 것인지 묻는 시도였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캐릭터가 놓이는 방식이다. 캐릭터들은 독립된 액자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제품이 놓인 자리를 함께 차지하고, 난간과 선반의 선을 따라 관람 동선에 개입한다. 욕조에 들어간 듯 배치된 고양이들은 욕실 제품을 친근한 이야기의 무대로 바꾼다.
같은 고양이 형상도 색과 무늬, 표정과 자세에 따라 서로 다른 성격을 드러낸다. 관람객은 그 차이를 비교하며 마음에 드는 캐릭터를 찾아보게 된다. 문자에서 시작한 한글 그래픽, 이미지와 메시지를 다루는 세계 그래픽아트,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캐릭터가 결국 소통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만나는 대목이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캐릭터가 놓이는 방식이다. 캐릭터들은 독립된 액자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제품이 놓인 자리를 함께 차지하고, 난간과 선반의 선을 따라 관람 동선에 개입한다. 욕조에 들어간 듯 배치된 고양이들은 욕실 제품을 친근한 이야기의 무대로 바꾼다.
<세 전시를 하나의 경험으로 엮는 ‘편집형 미술관’>
이야기미술관의 개성은 세 전시를 동시에 연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콘텐츠를 현재의 공간에 맞게 다시 선택하고 배치했다는 데 있다.
한글 연구의 결과물, 국제 그래픽아트 전시의 작품, 고양이 캐릭터가 욕실용품 창고에서 새롭게 만났다. 각각의 콘텐츠는 기존의 이력을 유지하면서도 주변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다른 인상을 만든다. 이야기미술관이 말하는 ‘편집형 미술관’은 이러한 선택과 연결의 방식에서 실체를 얻는다.
전시의 기본 단위인 ‘스토리 셀(Story Cell)’은 하나의 이야기를 담는 작은 전시 공간이다. 각각의 셀을 독립적으로 감상할 수도 있고, 여러 셀을 오가며 문자와 이미지, 사물과 생활의 관계를 찾아볼 수도 있다. 정해진 하나의 결론보다 관람객이 스스로 연결점을 발견하는 경험에 무게를 둔 구성이다.
이곳이 리빙아트페어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활용품과 예술이 서로의 배경이 되고, 제품을 고르는 시선과 작품을 감상하는 시선이 교차한다. 편집의 대상은 작품뿐 아니라 작품을 둘러싼 환경 전체다.
이하웅은 생활미술과 문화상품, 전시와 공간 연출을 넘나들며 활동해온 디자이너이자 작가다.
1987년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명지대·부천대·경원대·서울시립대 대학원에서 강의했으며, 동서울대 공예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생활미술 전문점 ‘우리꼴’, ‘아띠마주’, ‘파란토끼’를 운영하고, 인테르니 앤 데코 전무와 부사장을 지냈다.
신세계 동방프라자 생활상품 기획전, 롯데백화점 우리문화상품 특별 기획전, 리빙디자인페어 등에 참여했으며, 건축·만화 조형물 제작과 설치로 작업 영역을 넓혀왔다. 리빙디자인페어 인상깊은 공간상, 서울시 우수문화상품전 장려상, 제9회 한글문화상품 공모전 대상(2013)을 수상했다. ‘문자 구현용 세그먼트’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음성 리빙아트엑스포’ 총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건물보다, 이미 있는 공간을 읽는 새로운 시선>
이야기미술관은 지역의 문화공간을 만드는 방식에도 질문을 던진다. 문화시설을 위해 새로운 건물을 짓는 일과 함께, 지역에 이미 있는 공간과 사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바스엑스포의 욕실용품과 창고 구조는 다른 장소에서는 쉽게 얻기 어려운 전시 자산이다. 이 장소의 개성은 산업의 흔적을 감추는 대신 전시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더 선명해진다. 한글 그래픽과 세계의 포스터, 고양이 캐릭터가 그 사이에 들어오면서 창고는 새로운 문화적 쓰임을 얻는다.
이 실험의 다음 과제는 연결의 깊이를 더하는 일일 것이다. 개별 작품의 배경과 사물의 이야기를 충실히 전달하고, 전시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편집할수록 다시 찾아올 이유도 분명해진다. ‘창고형’이라는 공간의 특징이 ‘편집형’이라는 운영의 방식으로 이어질 때, 이야기미술관의 가능성은 더욱 커질 수 있다.
“창고를 미술관으로, 사물을 예술품으로.”
음성 이야기미술관에서 이 문장은 관람하는 동안 구체적인 장면이 된다. 포스터 앞의 세면기, 캐릭터가 자리한 욕조, 포장 상자 곁에 펼쳐진 한글 그래픽을 바라보며 관람객은 사물의 익숙한 용도 너머를 보게 된다. 창고가 미술관으로 바뀌는 순간은 공간에 작품이 들어올 때이면서, 그 공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달라질 때이기도 하다.
글, 사진_ 정석원 편집인 (jsw022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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