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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굿 디자인은 나쁘다?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디자인 평론가 | 2015-11-05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 방법이 유행하던 시절, ‘굿 디자인’을 부정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않고 통렬히 비판하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제도화한 굿 디자인’이 모더니즘의 획일적 사상을 바탕으로 디자인을 서열화하며 폭력으로 기능한다는 주장이었다. ‘굿 디자인’이라는 1950년대식 아이디어를 극복하기 위해, 굳이 ‘굿 디자인 제도’를 폭력으로 낙인찍을 필요가 있었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평적 효력이 모두 소진된 오늘의 시점에서 보자면, ‘굿 디자인’을 역사화해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쉬울 따름이다. 역사적 조망을 시도할 고원이 사라져가는 초납작화의 시대에, ‘굿 디자인’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적 공과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글 | 임근준 aka 이정우 미술·디자인 평론가
 


한국의 굿 디자인 제도가 그려내는 불명료한 우수함의 기준

한국의 굿 디자인 제도는 “산업디자인진흥법에 의거하여 상품의 외관, 기능, 재료, 경제성 등을 종합적으로 심사하여 디자인의 우수성이 인정된 상품에 ‘GOOD DESIGN(GD)’ 마크를 부여하는 제도로 지난 1985년부터 매년 시행”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주최의 이 연례 제도는,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주관한다. ‘디자인 개발자’와 ‘상품의 제조자 및 판매자’에게 고루 신청 자격이 허락되고, 제품디자인·환경디자인·소재표면처리디자인·패션디자인·포장디자인·커뮤니케이션디자인·건축디자인·패션디자인 이렇게 일곱 가지로 선정 대상 품목을 나누고 있다. 최우수 한 점을 가려 대통령상을 주고, 국무총리상이 두 점, 그리고 그 아래로 대상(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 최우수상(중소기업청장상), 최우수상(조달청장상), 최우수상(특허청장상), 우수상(한국디자인진흥원장상)이 이어지고, 별도로 특별상(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이 다섯 점 내외의 품목에 주어진다.1)

1) 한데, 실제로는, 우수디자인(GD) 선정 웹사이트인 gd.kidp.or.kr에 가입한 기업 회원만 출품 신청이 가능하고, 또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는 신청료와 선정료를 준비해야 한다. 현재 신청료는 1점당 15만 원이고, GD 마크를 부착하게 되는 경우 지불하게 되는 선정료는 1점당 선정상품 50만 원이고, 70여 점 가량의 수상 작품의 경우엔 1점당 150만 원을 선정료로 지불해야 한다(2008년엔 수상작의 선정료가 200만 원이었는데, 하향 조절됐다). 실물을 심사용으로 제출하지 못하는 경우, 방문 심사를 요청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방문 심사료로 20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실상이 이러하니, 한국의 굿 디자인 제도는, 사실상 한국디자인진흥원을 위한 연례 수익 사업으로 전락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기도 하다.
 


좋은 뜻으로 운영하는 제도겠지만, 한국의 굿 디자인 제도는 그 ‘GD 마크’ 심볼부터가 굿 디자인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이를 심란케 한다. 2013년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LG사의 스마트폰 〈G2〉가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G2〉의 최초 판매가가 820,000원이라는 사실은 굿 디자인 수상작 안내 페이지에서 처음 봤다. 2014년과 2012년의 대통령상은 LG사의 TV 제품이 차지했다. 2011년도에는 LG사의 냉장고가 대통령상 수상작이었다. 한국에서 이제 굿 디자인 제도는 고전하는 국내 대기업의 전자 제품 개발자들을 위한 격려 제도가 된 것일까. LG사의 제품 디자이너들을 응원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서글픈 기분에 사로잡히고 만다.

아마도, 한국의 굿 디자인 제도가 출범 당시 참고했던 원본은, 일본의 굿 디자인상(Good Design Award)이었을 테다. 재단법인 일본산업디자인진흥회(Japan Institute of Design Promotion, JDP)가 주관하는 이 연례 시상 제도는, 디자인 전 분야를 망라해 그 우수성을 평가하고 ‘G 마크’ 심볼을 부착하는 선정작을 갈라 수상작을 뽑고 그 결과를 발표-전시하고 있다. 1957년 일본의 국가 경제 발전을 주도하던 통상산업성(Ministry of International Trade and Industry, MITI; 오늘의 경제산업성[Ministry of Economy, Trade and Industry])에 의해 설립된 제도로, 곧 60주년을 맞는다.2)

2) 일본의 굿 디자인 제도를 거의 그대로 이식한 사례로, 인도에서 2012년 공식 출범한 ‘I 마크’ 제도가 있고, 싱가포르에서 2014년 시작된 ‘SG 마크’ 제도 등이 있다.
 



일본의 굿 디자인상; 전후 재건기의 수출 전략으로 시작된

애초에 패전 일본의 엘리트들이 굿 디자인상 제도를 마련한 배경엔, 수출 주도의 전후 경제 시스템이 일으킨 통상 마찰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이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통제 아래 있던 1949년, 영국 정부가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일본의 기업들이 영국의 제품을 부적절하게 전유한 섬유 제품을 수출한다’고 공식 항의했던 것. 이후 독일과 미국으로부터도 유사한 항의가 이어졌고, 곧 외교 문제로 비화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인 관료들이 수출 상품의 관리와 감독을 강화하기 시작하고, 규제만으로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 1956년 일본 특허청 산하에 디자인진흥회(Council of Design Promotion)를 신설하게 된다. 이는 전후 경제 복원의 핵심에 디자인이 있다고 확신했던 영국인들이 1944년 설립한 산업디자인진흥원(Council of Industrial Design; 1972년 디자인진흥원[Design Council]으로 개칭됐다)을 모방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반면, 일본인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자극한 독일의 디자인진흥원[Rat für Formgebung]은 1953년에 설립됐다). 즉, 1957년 출범한 일본의 굿 디자인 제도는, 수출 상품의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고, 자국 디자인 문법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된 독특한 프로그램.

초대 심사위원장은 건축가 사카쿠라 준조(坂倉準三, 1901~1969: 르 코르뷔지에의 프로테제로서 전후 일본의 현대건축계를 대표한 인물. 1951년 개관한 카나가와현립근대미술관[神奈川県立近代美術館]이 득의작이고, 1959년 개관한 국립서양미술관[国立西洋美術館]을 르 코르뷔지에와 공동 설계했으며, 초대 일본건축협회장으로 일했다)가 맡았고, 42인의 전문가가 심사 과정에 참여했다.

일본의 굿 디자인상은 47점을 굿 디자인으로 선정해 출범한 이후, 1960년대 초반까지는 수장작의 수를 엄격히 관리했다. 하지만, 출범 7년째 되던 1963년(비고: 동경올림픽이 1964년), 폐쇄적 심사 구조를 개방형 참여 제도로 전환해 자발적으로 제품의 심사를 청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일본 제조업의 정점이었던 1970년대 초반엔 선정작이 크게 늘어 474점에 달했다. 이후 굿 디자인 제도가 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변화됨에 따라 한동안 다시 선정작을 엄선하는 듯했지만, 버블 경제의 정점이었던 1985년에 이르면 선정작이 무려 1390점에 달하게 된다. 근년의 선정작 수는 1200여 점 정도.
 


이 과정에서 평가 기준의 변화도 있었다. “같은 기능이라면 더 나은 품질과 낮은 가격을 구현한다”는 수출 지향적 디자인 철학은, 1967년 심사 과정에 제품 품질 조사 항목을 추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제품의 총체적 품질을 디자인의 평가 기준으로 삼게 된 것. 고로, ‘G 마크’ 심볼은 1960년대 후반 이후 고품질 제품을 인증하는 효과를 획득한다.

일본에서 굿 디자인상은 단지 산업디자인 능력의 발전이나 수출 상품의 품질 향상이라는 목표를 충족한 것은 아니었다. 패전을 통해 상실했던 일본적 가치를 최상위 디자인의 첨단 제품으로 구현하고, 또 그 제품들이 실제로 세계 시장을 제패함으로써, 국민들의 자존심을 재건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전후 일본에서 굿 디자인은, 부유한 평화 국가로 거듭나는 방편이 되기도 했던 셈.


일본의 굿 디자인상; 일본적 디자인의 오리지널리티를 구현해내고 위기를 맞다

1969년 일본산업디자인진흥회(Japan Institute of Design Promotion, JDP)가 설립되고, 1970년 일본상공회의소(日本商工会議所)로부터 ‘G 마크’에 대한 독점 라이선스 권한을 인정받고, 1974년 통상산업성이 굿 디자인상 운영권을 진흥회에 이임함에 따라, 이후 굿 디자인 제도는 거의 완전히 민간에 의해 운영되게 된다.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은 ‘G 마크’ 제도는, 국제적인 공신력을 획득해 1975년에는 독일의 브라운사와 네덜란드의 필립스로부터 선정작 심사 신청이 들어왔다. 당시 일본의 일반 소비자들 사이에서 ‘G 마크’는 65%의 인지도를 획득했을 정도로, 굿 디자인상은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했는데, 이는 폭넓은 디자인 인식의 제고로 이어졌다. 특히 1970년의 오사카만국박람회 이후, 산업디자인을 수출 증대의 방편으로 이해하던 일본인들의 디자인관은, 크게 변화했다. 자신감의 회복과 함께 전후의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에 변화가 일며, 자연스럽게 ‘디자인은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자리 잡았다. 당연히 굿 디자인상이 추구하는 목표도 변화해, “삶의 질을 종합적으로 개선한다”는 새로운 디자인 가치를 제시하게 된다(동시에 출품 가능한 제품의 카테고리 제한도 사라진다).

1979년 소니의 워크맨 출시를 필두로,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의 일본에서 세계 산업디자인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 쏟아지게 된 배경에는, 이렇게 일본 사회 전반을 가로지르는 폭넓은 인식의 전환이 자리하고 있었다. 굿 디자인상 운영에도 변화가 일어서, 선정작이 늘자 1977년에는 각 카테고리별로 대상을 뽑았고, 1980년에는 그해의 최우수 디자인 제품을 가리고 총괄 1등상을 별도로 시상하게 됐다.
 


하지만, 1990년대의 탈냉전기에 이르러 일본의 산업디자인은 정체기를 맞게 된다. 모더니즘의 가치를 일본식으로 토착화한 일본식 굿 디자인의 문법은 새로운 시대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했다. 장기 불황 시대의 일본에서 산업디자인 방법론의 발전이라는 목표는 이미 근과거에 달성된 목표였고, 1991년의 부동산 폭락과 함께 소비만능주의적 세계관도 파탄을 맞았다. 1995년의 한신 아와지 대지진과 1997년의 도쿄 의정서 발표 이후, 일본에선 환경에 대한 의식이 크게 높아졌고, 자연 디자이너들도 ‘환경’, ‘유니버설’3), ‘지속 가능성’ 등을 최우선 가치로 앞세우게 된다.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굿 디자인상도 일대 변화를 꾀한다. 통상산업성의 후원이 1997년 종료되고, 순수한 민간 시상 제도로 재출범한 것.4) 국가에서 우수 디자인 제품을 선별하고 공인한다는 의미가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순수하게 상으로서 재맥화된 일본의 굿 디자인 제도는, 시상 프로그램도 신설했다. 인터랙션 디자인상, 유니버설 디자인상, 환경 디자인상이 그것. 아울러 심사가 종료되면, 심사가 이뤄졌던 현장을 곧바로 대중에 공개했다. 과거의 권위주의와 결별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제스처였다.

3) 디자인에서 유니버설이란 장애인 등 약자를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보편주의를 뜻한다.
4) 전후 제조업 시대에 최적화했던 진짜 굿 디자인 제도는 이때 사라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21세기에 낡은 굿 디자인의 미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나?

2000년에는 신청작의 인터넷 접수가 시작됐고, 2001년에는 미디어 디자인상이 추가됐지만, 시상 제도로서의 굿 디자인 프로그램은 어쩐지 새로운 시대에 걸맞지 않아 뵀다. 21세기의 제품에 굿 디자인 인증 마크를 넣는 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세계 금융 위기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을 변화시킨 2008년, 일본의 굿 디자인상은 다시 한 번 변신을 시도한다. 산업의 세계관으로 굿 디자인 사례를 평가하고 시상하는데서 벗어나, 근미래의 비판적 소비자의 관점에서 굿 디자인 사례를 평가하고 시상한다는 것. 시상 카테고리에 재차 변화를 줘 “신체 생활 영역” “산업, 사회 영역” 등으로 재편됐고, 굿 디자인상이 추구하는 목표도 재조절을 거쳐, 현재 인간(Humanity), 본질(Essence), 창조(Innovation), 매력(Aesthetics), 윤리(Ethics)의 다섯 가지를 기초 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심사 과정에선 공허한 기준이 되기 쉽다.5)

5) 일본의 굿 디자인상은, 21세기 내내 시상 프로그램의 해외 수출에 공을 들였다. 조직의 존립 근거를 국외로의 확장에서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말기적 징후.
 


흥미롭게도, 회복할 길 없이 쇠락해가던 일본의 굿 디자인상에 재차 시대적 과제를 부여한 것은 대규모 재난이었다. 2011년의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가치관의 대전환이 일어나면서, 디자이너 사회도 “무엇이 이 시대의 좋은 디자인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됐던 것(비고: 어느 일본인 예술가는 “3.11 이후 일본인의 멘털리티는 에도 시대로 회귀한 것만 같다”고 말할 정도). 현재 일본의 굿 디자인상은, 굿 디자인이라는 규준을 제시한다는 옛 과제를 넘어서, 디자이너의 사회적 위치와 디자인 활동의 사회적 역할을 재평가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진일보한 취향으로서의 굿 디자인은 어디에서 왔나?

그렇다면, 애초에 ‘굿 디자인’이라는 규준은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제시된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만 말하자면, ‘굿 디자인’이라는 규준을 제시한 장본인을 딱 한 명만 꼽자면, 그건 건축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이자 자선사업가였던 에드가 카우프먼 주니어(Edgar Kaufmann Jr., 1910~1989)다. 미 피츠버그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유대계 사업가 E. J. 카우프먼(Edgar J. Kaufmann, 1885~1955)의 아들인 그는, 1940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초대 관장 앨프리드 바 주니어에게 가정용품의 디자인을 겨루는 경연 대회의 주최를 제안하는 편지를 써서 실현한 바 있는 인물로, 1938년부터 모마의 자문으로, 1939년부터 동미술관 건축위원회의 일원으로 일했으며, 1940년엔 모마 학예실의 정식 큐레이터로 발탁됐다. 1942년부터 약 4년간 공군으로 복무한 뒤 무사히 제대한 그는, 학예 조직에 귀환한 직후인 1946년 7월 산업디자인부의 제2대 디렉터로 발탁돼 크게 활약했다.6)

6) 모마의 산업디자인부는 1940년 출범해 1948년까지 독립 분과로 유지됐다가, 1949년 건축부와 통합돼 통합 조직의 초대 부장은 필립 존슨이 차지했다. 이후 카우프먼은 1955년까지 “굿 디자인 디렉터(Director of GOOD DESIGN)”라는 다소 애매한 직함을 달고 큐레이터 업무를 봤다.

 


모마의 산업디자인부장이 된 카우프먼 주니어는 1941년에 모마에서 기획-개막했던 〈가정용품에서의 유기적 디자인(Organic Design in Home Furnishings)〉전을 자산 삼아, 곧바로 이상의 설파에 나섰다. 1946년 가을 미술관소식지를 이용해 소책자 〈현대적 산업디자인이란 무엇인가?(WHAT IS MODERN INDUSTRIAL DESIGN?)〉를 발간해낸 것. 찰스와 레이 임즈 부부(Charles and Ray Eames)와 에바 자이셀의 혁신적 몰드 성형 합판 가구 등을 현대적 디자인의 모범 사례로 제시했는데, 당시는 허먼 밀러사가 몰드 성형 합판 가구의 생산에 나서기 전으로, 사실상 제시된 가구들은 프로토타입에 가까웠다(즉, 이때 제시된 디자인의 근미래는 거의 곧바로 현실로 구현-유포됐던 것).

자신의 비전에 확신이 있었던 카우프먼 주니어는, 1948년 영국의 계간지 〈건축 리뷰(Architectural Review)〉에 “겉만 번지르르한 합금도금 송아지(Borax, or the Chromium-Plated Calf)”라는 글을 기고해 큰 반향을 얻는다. 그는 점잖은 어조로 “스타일은 매출을 따른다”는 식의 관습적 유선형의 크롬 페티시 디자인 유행—1930년대에 레이몽 로위와 노먼 벨 게데스 등이 주도했던—을 꾸짖었고, 이러한 비판 담론은 실제로 1950년대에 이르러 맹목적 유선형 디자인 대신 합리적 인체 공학 디자인이 주류로 떠오르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꾸미는 것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현대적 삶을 조형하는 현대적 디자인’의 이상을 구현하기를 희망했던 모마의 제2대 산업디자인 분과장은, 1949년 미술관의 명의로 국제 가구 디자인 경연 대회를 열고, 1950년 〈현대 가구를 위한 수상 디자인(Prize Design For Modern Furniture)〉전을 개막한다(당시 발간된 도록엔 제품의 가격표가 함께 제시돼 있다). 이 과정에서 임즈 부부의 혁신적 합성수지 가구가 대중 앞에 첫선을 뵈고, 이후 플래스틱 의자의 대량 생산이 실현되며 세계인의 일상은 크게 변화한다.

이렇게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카우프먼 주니어는 자신의 생각을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었고, 1950년 그 이상을 모마의 디자인 소장선으로 설파하는 책자를 발간하게 된다. 그것이 〈현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WHAT IS MODERN DESIGN?)〉로, 이때의 비전이 이후 이어지는 전설적 전시 프로그램 〈굿 디자인〉전의 바탕이 된다.
 


카우프먼 주니어가 모마를 통해 제시한 굿 디자인의 원칙

1950년 출판된 〈현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는, 가구, 텍스타일, 도예, 유리 공예, 램프, 금속 공예로 나눠 새로운 디자인 조형을 제시했고, 알바 알토, 핀 율, 르 코르뷔지에, 마르셀 브로이어, 임즈 부부, 에로 사리넨, 조지 넬슨, 아니 알버스, 이사무 노구치 등을 다뤘다. 더 흥미로운 것은, 현대적 디자인을 설명하는 큐레이터의 글. 카우프먼 주니어는 다음과 같이 “현대 디자인의 열두 가지 지각(Twelve Percepts of Modern Design)”을 제시했다:

1. 현대 디자인은 현대적 삶의 실용적 필요를 충족해야 한다.
2. 현대 디자인은 우리 시대의 정신을 표출해야 한다.
3. 현대 디자인은 동시대 순수 미술과 순수 과학 분야의 진보로부터 혜택을 입어야 한다.
4. 현대 디자인은 익숙한 사물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재료와 테크닉을 활용해야 한다.
5. 현대 디자인은 적절한 재료와 테크닉을 요구하고 직접 충족하는 가운데 나타난 형태와 텍스처와 색상을 계발해야 한다.
6. 현대 디자인은 사물의 목적을 표현해야 하며, 결코 실상과 다른 모습을 취해서는 안된다.
7. 현대 디자인은 사용된 재료의 품질(속성)과 아름다움을 표출해야 하며, 실제로 사용된 것과 다른 재료인 듯 꾸미면 못쓴다.
8. 현대 디자인은 사물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메소드를 드러내야 하며, 대량 생산된 물건을 수공예품으로 꾸미거나 다른 테크닉을 사용한 것처럼 가장하면 안된다.
9. 현대 디자인은 물질과 유용성(utility)과 작업 과정의 표현을 시각적으로 만족스러운 통합으로 조합해내야 한다.
10. 현대 디자인은 단순해야 하며, 겉으로 봐도 그 구조가 명시적이어야 하며, 불필요한 꾸밈(extraneous enrichment)은 피해야 한다.
11. 현대 디자인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기계를 숙달해야 한다.
12. 현대 디자인은 화려한 치장이나 호사로 간주되는 금액 이하의 제한된 비용과 그리 대단치 않은 보통의 필요를 염두에 둔 채, 가능한 한 폭넓은 대중에게 봉사해야 한다.

즉 골자는, 표리부동하지 않은 합리적(예술적+과학적) 형태로 유용성의 일상 오브제를 디자인해, 나날이 변화-발전하는 현대적 삶의 이상에 민주적으로 부합하는 디자인 이상향을 구현해내자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이상은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고, 원산지는 비엔나공작연맹과 바우하우스다. 하지만, 1919년 개교한 바우하우스의 슬로건이 “예술과 기술 새로운 통합”이었던 것을 상기해보면, 역시 과학의 진보로부터 새로운 형태와 재료의 사용을 도출해낸다는 목표 의식은, 바우하우스의 비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모습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근미래의 구현을 향해 경주를 벌인 모더니스트 디자이너들

물론, 당시 카우프먼 주니어만 이런 이상을 추동했던 것은 아니다. 유사한 시도는 곳곳에서 시도됐다. 대표적인 것이, 1949년 디자이너 막스 빌(Max Bill, 1908~1994)이 스위스공작연맹과 함께 기획해낸 국제 순회전 〈좋은 형태(Die gute Form)〉였다(비고: ‘구테 포름’은 굿 디자인과 같은 뜻이다). 카우프먼 주니어에게 모마의 디자인큐레이터 자리를 넘겨주고 IBM으로 이직한 디자이너 엘리엇 노예스(Eliot Noyes, 1910~1977)도, 1949년 예일대학교에서 〈현대 디자인: 적절한 형태를 찾기(Modern Design — The Search for Appropriate Form)〉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었고, 막스 빌에 앞서는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사실 카우프먼 주니어는 전임자인 엘리엇 노예스와 많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었다. 노예스는 1938년 모마에서 〈5달러 이하의 유용한 미국 디자인 사물들(Useful Objects of American Design under $5)〉이라는 문제적 버내큘러 디자인 전시를, 1944년에는 ‘굿 디자인’이라는 의제를 처음 제시한 〈사용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Use)〉이라는 전시를 기획한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비전은 전쟁 말기에 구현되기 어려웠고, 결정적 시기에 미술관을 떠나 IBM에서 디자이너로 일했기 때문에, 카우프먼 주니어처럼 굿 디자인의 뮤즈이자 교육자이자 후원가라는 희생적 임무를 수행해내지는 못했다.

아무튼 카우프먼 주니어는, 1938년부터 1949년까지 9년 동안 연례전의 형태로 지속된 〈유용한 사물들(Useful Objects)〉 전시 시리즈를 이어받아, 1950년부터 195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굿 디자인(Good Design)〉전을 기획했다.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했고, 최고의 디자인 결과물이 제시됐으며, 이후 세계인의 일상은 이들이 제시한 이상에 추동됐다(오늘날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세계 최고의 20세기 디자인 소장선은, 카우프먼 주니어의 기증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70년대에 이르러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의 합리주의를 뒤틀어 우회로를 디자인하는 방법을 제시할 때까지, 굿 디자인은 우리 앞에 당도한 미래나 다름없었다.
 



에드가 카우프먼 주니어는 어떤 인물이었나?

에드가 카우프먼 주니어는, 192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응용미술관(Austrian Museum of Applied Art) 산하의 미술공예학교에서 수학하며 비엔나공방 이후 바우하우스로 이어지는 현대디자인의 태동기를 직접 목격했고,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약 3년간 회화와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다. 청년기에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아래에서 화가로 일한 적도 있고, 아버지의 백화점에서 매니저로 일하며 매장의 디스플레이를 감독한 적도 있다. 에드가 카우프먼 주니어의 아버지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수많은 건축 프로젝트를 의뢰하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아들 때문. 실현된 건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가족 별장으로 기획된 〈낙수장(Fallingwater)〉이다(1937년 본건물이 완성됐고, 부속 건물까지 완공된 때는 1939년이었다).7)

7) 낙수장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말년의 걸작이기도 하지만, 에드가 카우프먼 주니어가 큐레이터로서 현대적 삶의 전범을 구현하는 ‘굿 디자인의 쇼룸’이기도 했다. 애초에 3만5천 달러가 예산이었지만, 실제 소요된 예산은 그의 4.5배에 가까운 15만5천 달러였다.
 


정식으로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카우프먼 주니어는, 1963년부터 1986년까지 콜럼비아대학교의 겸임 교수로서 건축과 미술사를 가르쳤고, 또 시대를 앞선 오픈리 게이였다. 1989년 서거할 때까지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 폴 메이언(Paul Mayen, 1918~2000)도 건축가로서 일했고, 또 낙수장의 방문객 시설을 설계한 숨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폴 메이언은 배우자의 죽음 이후 유언에 따라 고인을 화장하고 골분을 낙수장 인근에 뿌렸다.8)

8) 낙수장에 마련된 가족묘당이 아닌 인근에 골분을 뿌려달라고 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남편의 연이은 외도에 상심한 모친 릴리앤 카우프먼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비극적 장소가 바로 그곳이기 때문. 1952년의 이 사건은 자살이라는 풍문이 일었더랬다. 1955년 부친의 서거 이후 가산 일체를 물려받은 카우프먼 주니어는, 1963년까지 낙수장을 별장 겸 등반객들을 위한 산장으로 사용했고, 1963년엔 사회에 환원해 이듬해인 1964년 이래 오늘까지 대중에게 뮤지엄으로서 공개되고 있다.

폴 메이언은 1990년대에 고인이 남긴 방대한 미술품 소장선을 순차적으로 경매했고, 그를 통해 조성한 추가 자금으로 배우자의 유업인 자선 활동을 조용히 이어나갔다(2000년 세상을 뜬 뒤 메이언의 골분도 낙수장 인근에 뿌려졌다).

에드가 카우프먼 주니어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가며 구세대와 신세대의 능력 있는 디자이너들을 규합해 실현코자 애썼던 굿 디자인이라는 이상이, 획일적 도그마로서 모더니즘의 질서를 강요하는 폭력이라는 주장은, 어처구니가 없는 모함에 가깝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을 왜곡하는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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