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13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여러 기능이 하나로 융합된 제품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제품을 기능별로 구분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졌을 정도다. 하지만 불필요한 기능으로 인해 그만큼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사용법을 숙지하는 데에만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꼬박 할애하는 데 지친 사람들이 얼마 전부터 하나의 기능에 충실한 제품을 찾기 시작했다. 복합 기능을 탑재한 ‘컨버전스’와 단일 기능에 충실한 ‘디버전스’. 이 두 양상은 지금 치열한 공방전을 치르고 있다.
글 | 김홍배 한성대학교 미디어디자인학부 교수
취재 | 서은주 기자(ejseo@jungle.co.kr)
이제 디지털 패러다임의 핵심이 컨버전스인가, 디버전스인가 하는 문제로 다시 돌아가자.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컨버전스 현상이 이제 겨우 1세대를 지나고 있을 수준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여러 기능의 통합에서 비롯되는 심각한 사용성 문제나, 사용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 문제는 우리 세대가 지닌 약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컨버전스가 대세를 이을 것인가, 디버전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의 문제가 논쟁거리가 된 것이다.
필자는 이 논쟁이 ‘운송 수단에 있어 앞으로 자동차가 대세일 것인가, 지하철이 대세일 것인가’와 같이 다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컨버전스건 디버전스건 그것은 서로 다른 소비자의 니즈를 만족시킬 때 명확한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이 둘은 각자의 로드맵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소비자의 니즈에 대한 기업의 전략적 선택과 의지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디지털 컨버전스 현상은 제품 고유의 기능과 가치보다는 이를 통한 콘텐츠와 서비스의 수요와 공급을 더욱 중요하게 만들고 있다. 소비의 형태가 기능적 소비에서 감성적, 문화적 소비로 이동하고 있듯 신제품의 성공 여부는 소비자의 기능적 니즈의 실현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서와 개성, 문화적 특성을 좀 더 반영하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따라서 기술 융합이 사용자의 복합적 니즈와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지 못할 경우 디지털 컨버전스는 결국 실패할 것이다. 반대로 융합된 개념을 다시 분화시키려는 노력 역시, 소비자의 복합적 니즈와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결국 무의미한 과거회귀 본능으로 치부될 것이다.
미래 사회에서 엄격한 의미의 디지털 디버전스를 발견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미래의 디버전스는 현재 컨버전스되어 있는 개체들에게 독립적인 존재의 목적을 찾아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컨버전스되어 있는 개체들 중 하나에게 대표성을 부여하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즉 특정 기능을 떼어내어 독립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기능은 그대로 둔 채 특정 기능을 중심으로 제품 콘셉트를 차별화시킨다는 의미이다.
비싸고 사용이 어려운 첨단복합제품보다는 핵심 기능에 충실한 디버전스 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이 우리 선수들에게 요구했던 멀티플레이어적 역할을 생각해보자. 특정 포지션에 최적화된 선수를 집중 육성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상대와 상황에 따라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선수들의 포지션을 변화시키는 전략을 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해낼 선수들이 있다면 그 팀의 전력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해질 것이다. 디지털 컨버전스의 강점은 바로 이러한 전략적 운용에 있다. 미래의 기업들에게는 현재 복잡하게 컨버전스되어 있는 만물상자로부터 불필요해 보이는 많은 기능들을 떼어내는 작업이 오히려 더 높은 리스크와 비용을 요구할 수도 있다. 사용성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다양한 기능들을 적절하게 감출 수 있다면 컨버전스는 디버전스의 장점까지도 수용하는 훌륭한 전략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진화의 끝은 아직 멀었다. 디지털 컨버전스의 완성은 사용자가 이질적인 개념들이 서로 융화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올라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컨버전스는 ‘1+1=2’와 같은 백화점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1+1=11’이 되어야 한다. 두 개의 독립 개체가 하나의 상자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체가 만나서 하나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차세대 디지털 컨버전스는 바로 이러한 개념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진화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