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22
키 돌리는 데마다 좌초하는 배 같다. 정녕 구설이 끊이지 않는 2020 도쿄 올림픽 얘기다. 2020 도쿄 올림픽이 공식 엠블럼 표절이라는 큰 건수(?)를 올린 것이 불과 지난 여름이었다. 아트 디렉터 사노 켄지로(佐野研二郎)가 디자인한 엠블럼은 공개되기 무섭게 벨기에 리에주 극장 로고와 유사성이 제기되면서 ‘뜨거운 감자’가 됐다. 여론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일본은 결국 공식 엠블럼 폐기를 단행했는데, 이 홍역이 좀 가라앉나 싶으려니 또 다른 태클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사용될 일본 신(新) 국립경기장 디자인이다. 그리고 논란의 중심에는 어마어마한 명성의 이라크계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있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건축 디자인에 문외한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하다. 2004년 여성 건축가 최초로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을, 2010년과 2011년 연속으로 스털링 상(Stirling Prize)을 수상한 자하 하디드는 베이그이젤 스키 점프(2002, 오스트리아), BMW 본사(2005, 독일 라이프치히), 광저우 오페라 하우스(2011) 등 유수의 대표작을 남겼고, 현재도 카타르 이라크 의회 빌딩(바그다드)과 2022 피파 월드컵 경기장(카타르) 등 다수의 대규모 프로젝트를 정력적으로 수주하고 있다. 당장 서울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또한 그의 작품이다.
최근 하디드가 표절 시비를 제기한 일본 신(新) 국립경기장은 일본 건축가 켄고 쿠마(Kengo Kuma)의 작품이다. 그는 켄고 쿠마의 경기장이 그 형태와 레이아웃 면에서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Zaha Hadid Architects, 이하 ZHA)가 제안했던 스타디움 디자인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remarkable similarities)’고 역설했으나, 애석하게도 하디드에 대한 여론이 썩 좋지만은 않다. 일각에서는 하디드를 어그로꾼1) 취급하며 ‘적당히 하라’고 염증을 내는 광경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1) 어그로: 본래 MMORPG에서 의도적으로 미끼가 되어 몬스터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행위를 일컫는다. 현재는 공공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용법이 확장되었으며, ‘어그로를 끈다’, ‘어그로꾼’ 등으로 응용할 수 있다.
자하 하디드, 도쿄 올림픽 경기장, 표절. 제법 핫한 키워드 조합에도 냉담하기만 한 여론의 원인은 무엇일까? 굳이 꼽자면 첫째로는 미디어에 늘 노출되는 이름에서 오는 피로감을, 둘째로는 자하 하디드가 언급한 ‘놀랄 만큼의 유사성’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겠다. 그도 그럴 것이, 순전히 디자인만 비교하면 자하 하디드가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름 믿고 언론플레이 한다’고 하디드를 비난하기 전에 지지부진하게 얽혀 온 자하 하디드와 도쿄 올림픽의 관계를 한 번 들여다보자. 뜻밖의 억울한 사정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 2012년 9월: 자하 하디드, 일본 신(新) 국립경기장 디자이너 선정
2012년 9월 일본 스포츠 협회(Japan Sport Council, 이하 JSC)는 현존하는 카스미가오카 국립 경기장(Kasumigaoka National Stadium)을 대체할 일본 신(新) 국립경기장 디자이너로 자하 하디드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당시만 해도 도쿄는 유력한 후보였을 뿐 아직은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선정되지 않은 상태. 일본은 8만여 석을 갖춘 대규모 경기장이 건립되면 2020 올림픽 게임의 개막식과 폐막식이 열리는 주 경기장으로 사용하고, 필요시에는 피파 월드컵 경기장으로도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2013년 10월: 일본 건축가 그룹, 자하 하디드의 2020 도쿄 올림픽 경기장 디자인 규탄
2013년 9월, 도쿄는 마침내 염원하던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고 축배를 든다. 그런데 약 한 달 뒤, 일본 건축가들이 돌연 자하 하디드의 경기장 디자인에 반대하는 심포지엄 ‘가이엔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신 국립경기장 재사유하기(Re-thinking the New National Olympic Stadium in the historical context of Gaien)’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후미히코 마키(Fumihiko Maki)가 주도한 이 심포지엄의 멤버는 토요 이토(Toyo Ito), 소우 후지모토(Sou Fujimoto), 켄고 쿠마(Kengo Kuma), 리켄 야마모토(Riken Yamamoto) 등이었다.
▶ 2014년 7월: 자하 하디드, 경기장 디자인 수정 계획 발표
2014년 7월은 카즈히사 오리야마(Kazuhisa Oriyama)가 경기장 반대 시위를 조직, 500명 이상의 시민이 “우리는 컴팩트하고 경제적인 올림픽을 원한다”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거리 행진을 벌인 달이기도 했다. 이처럼 자국 내에서 자하 하디드의 경기장 디자인에 대한 반대 여론이 고조되는 가운데, 문부과학성의 시모무라 하쿠분(Hakubun Shimomura)까지 나서 경기장 건립에 책정된 예산이 지나치게 가중하다고 지적하면서 불길을 지핀다. 결국 JSC는 할당되었던 예산 3,000억 엔(약 18억 파운드)을 1,590억 엔(약 9.7억 파운드)으로 절반 가량 삭감한다.
▶ 2014년 12월: 자하 하디드, 도쿄 올림픽 경기장 디자인 비판에 응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사그라들 기미가 없다. 경기장 디자인 수정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Arata Isozaki)가 ‘후손에 대한 망신이자 기념비적 실수’라 비난하는 등 원색적 지탄이 끊이지 않자 자하 하디드도 마침내 칼을 뽑아 든 것이다.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약 2년 만인 2014년 12월, 그는 디자인 전문매거진 <디진(Dezeen)>을 통해 여론에 대한 당혹감을 최초로 공식 표명한다.
▶ 2015년 7월: 일본의 프로젝트 드롭
이렇게 프로젝트가 난항을 겪는 와중에도 경기장 건립에 필요한 예산은 13억 파운드가량 상승한다. 결국 2015년 7월 초 일본 총리 아베 신조(Abe Shinzo)는 공공 여론의 악화와 비용 증가를 구실로 삼아 경기장 디자인 백지화를 공표한다. 아베 신조는 “이대로는 전국민에게 축하 받는 올림픽 행사를 개최할 수 없을 것”이라며 “한 달간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고 가능성을 생각해본 결과 기존의 경기장 계획을 무산하고 ‘제로’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 2015년 7월: 자하 하디드의 유감 표명
무척 뒤늦은 결정이었다. 때아닌 청천벽력에 ZHA는 2020년 올림픽 개최까지 경기장을 완공하기 위해서는 프로젝트를 드롭하기보다 수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 ‘기록을 바로잡다(Set the record straight)’를 잇따라 발표한다.
▶ 2015년 9월: 자하 하디드, 2020 도쿄 올림픽 경기장 프로젝트 재도전과 입찰 포기
이후 자하 하디드는 비디오 캠페인 등을 통해 프로젝트 복귀를 청원하지만 일본은 묵묵부답으로 기어코 새 입찰을 시작한다. 두 번째 공모전에서는 예산을 1,550억 엔으로 상한하고 수용 관객 인원 또한 7만 2천 명에서 6만 8천 명으로 축소하는 등 가이드라인이 다소 개정됐다.
▶ 2015년 12월: 자하 하디드, 일본 당국과 건축가에 공모 혐의 제기
12월에는 2차 공모전 파이널리스트들이 경합을 벌였다. 승리의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자하 하디드의 프로젝트를 반대했던 주축 가운데 한 명인 켄고 쿠마. 이에 자하 하디드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자하 하디드는 레이아웃과 좌석 배열 등이 자신의 제안과 흡사하다는 이유로 켄고 쿠마에게 표절 의혹을 제기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당국이 국내 건축가와 공모하여 해외 설계사에게는 프로젝트의 문을 닫아버렸다고 비난했다. 이미 시공에 들어갔어야 할 프로젝트를 18개월이나 지연시킴으로써 비용 증가를 초래하고 완공 여부까지 불투명하게 만든 주범은 ZHA가 아닌 당국이라는 주장이다.
▶ 2016년 1월: 일본의 저작권 양도 요구와 자하 하디드의 거부
2016년 1월 불거진 저작권 양도 논란은 JSC와 자하 하디드의 관계를 재조명시켰다. 켄고 쿠마에게 프로젝트가 양도된 후,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는 자하 하디드에게 계약서 개정을 요청해 온다. 문제가 되는 내용은 저작권 포기와 함구령(gagging order). 조직위원회의 요구에 따르면 자하 하디드는 지난 2년간 진행한 업무비를 정산 받는 대신 향후 켄고 쿠마가 진행하는 경기장 프로젝트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삼가야 한다. 접입가경은 켄고 쿠마의 새로운 팀이 원저작자의 지한이나 추가적인 지불 없이 ZHA 스태디움 프로젝트 작업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부분.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보수 또한 받을 수 없다는 협박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자하 하디드는 수정안 동의를 거절하고 2020 도쿄 올림픽을 관장하는 토시아키 엔도(Toshiaki Endo) 장관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문을 보냈다.
결국 뜬금없이 불거진 표절 의혹은 4년 간 자하 하디드와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 사이에서 곪아온 공방전의 한 조각인 셈이다.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이 올림픽 경기장 프로젝트에 적합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삼 년을 끌면서 그를 시나브로(?) 내쳐 온 일본의 행보는 더더욱 석연치가 않다. 올림픽 개최지 선정 이후 갑작스럽게 반대 여론이 들끓기 시작해 결국 밀어붙인 재입찰에서는 해외 설계사의 참여가 간접적으로 차단됐다. 승리의 트로피는 일본 현지 건축가와 업체에 사이 좋게 돌려주고, 그도 부족해 이제는 자하 하디드의 프로젝트까지 송두리째 취할 속셈이다. 그 비합리적 폐쇄성에서 극우로 치닫는 일본 민족주의의 그림자를 보는 듯하다.
#건축 #자하하디드 #도쿄올림픽 #켄고쿠마 #토요이토 #일본국립경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