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04
서울디자인올림픽에 다녀왔다. 행사가 중반을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전시 동선에 관한 다수의 지적대로, 기자 역시 그곳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도무지 입구가 어디고 출구가 어딘지, 어미 잃은 미아처럼 오래 헤매야 했다. 하지만 그 막막한 기분을 되려 즐기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번 전시는 굳이 역사나 사조에 따른 직선적 관람을 요하지 않으며, 현대 디자인을 아래서 위에서 옆에서 자유롭게 바라보는 입체적 관람법이 전시 취지와 꽤 어울리지 않나 싶었다. 그렇게 우주를 유영하듯 기꺼이 싸돌아 다니다가, 특별한 사람들과 만났다.
이상현(shlee@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서울디자인올림픽의 메인 전시 ‘Design is air’에서는 예리한 칼로 베어낸 현대 디자인의 한 단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국경과 장르를 뛰어넘고, 프로와 아마추어를 아우르며, 상업과 비상업을 뒤섞은 이 자리는 바로 지금, 디자인의 여러 겹의 층위를 확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일반 시민들은 제품, 인테리어, 그래픽, 사운드, 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뻗어나가는 디자인의 현주소를 눈으로 직접 목도하면서, 그 안목과 시력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캐나다에서 활동 중인 디자이너 계정권의 그래픽 작업 역시 디자인의 새로운 지점을 가늠케 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는 최근 캐나다의 한 아트페어에서 1등상을 수상하며 글로벌한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고 있다. 토착화된 아시아적 이미지와 글로벌 기업의 로고 이미지를 겹쳐놓는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대비되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충돌을 통한 아이러니를 그 주제로 삼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공개된 그의 대표작이 눈길을 끌었는데, 어린 시절 흑백사진 위에 명품 브랜드의 엠블렘을 상기시키는 패턴 이미지를 얹음으로써 디자이너는 제3세계국가 문제 등을 ‘팝적으로’ 꼬집는다. 한국인으로서 캐나다에 살고 있는 계정권은 그 다른 공기 속에 파고드는 이방인의 정체성을 앞으로도 디자인을 통해 형상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Design is air 전시 출구를 빠져 나오면 맞닥뜨리게 되는 ‘디자인 나우’ 전은, 디자이너를 주축으로 건축가, 디자인연구자, 문화연구가, 화가, 큐레이터 등으로 구성된 7개의 팀이 각기 다른 시선으로 서울의 지금을 담고 있다. 이들은 서울의 인공 환경을 응시하고 독특한 접근법으로 해석하며, 그 고민을 창조적으로 표현한 시각 물을 전시했다. 이를 통해 서울 아파트의 역사적 변천, 대학가의 문화경제적 생태, 원서동의 문화지리지, 서울역에 대한 개인적 기억, 도시의 방향성과 괴담들, 그리고 쓰레기의 순환과 처리 등 다양한 문제의식을 도출해내고 있다. 시민문화네트워크 티팟이 주체하고 그 뜻을 도모하는 디자인이론가 박해천 등 전문가들이 함께 만들어낸 이 전시는,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라는 큰 걸게 안에 있으며, 이는 디자인이 우리 삶 속에 공기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서울올림픽의 주제를 다시금 환기시켰다.
대학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했으나 ‘디자인 리서치’ 분야에 뜻을 두어 티팟에서 활동 중인 나백산. 그가 말하는 디자인 리서치란 “디자인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비평적 관점과 접근법에 따라, 도시의 시각환경에 내재한 일상의 미세한 결을 포착하고 해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 명의 시민이자 디자이너로서 어떠한 고민을 하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방점을 찍는다.
앞선 전시들이 ‘디자인 관람’이라면, 월드디자인 마켓은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말 그대로 ‘디자인 시장’이었다. 다수의 디자인 회사와 스튜디오를 인덱싱하고 실질적인 거래가 성사될 수 있도록 비즈니스 플랫폼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것. 그 가운데 특히 ‘디자인붐 마트 서울’은 세계 각지의 디자이너들과 관람객의 직접적인 만남을 주선해 높은 관심을 이끌었다. 서울디자인올림픽 행사 내내 각종 워크샵과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심도 깊은 대화와 토론을 이끌었다고는 하지만, 디자인붐 마트 서울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디자이너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소한 매력으로 관람객의 각광을 받았다.
그 가운데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을, ‘벌집조명’으로 유명한 일본의 디자이너 코우이치 오카모토를 만났다. 보글보글 파마머리에 배기 팬츠를 입은 스타일리시한 외모 덕에 많은 여고생들이 그의 부스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기상천외한 조명이 멈췄던 발길을 오래 붙들었다. 원래는 클럽의 디제이였다는 그는 이제 엄연한 디자이너로서 막힘 없는 상상력의 볼륨을 끝까지 올리는 듯 하다. 그런데 왜 유독 조명 디자인에 집중할까. “전생에 내가 불빛 쫓아 날아다니는 벌레였나 싶다. 혹은 이름에 한자 光이 포함되었으니 운명일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조명처럼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일 수도 있겠다.”
제스 기핀과 짐 터미어의 디자인스튜디오 기핀’터미어(Giffin’temeer)은 재기나 발랄과 같은 가벼운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한, 분명 새로운 디자인 제품을 들고 멀리 미국에서 날아왔다. 그들이 만든 제품들은, 흔히 마케팅을 위해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조차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다고 한다. 이번 디자인붐 마트 서울을 통해 선보인 기성 볼펜에 압력을 가해서 부풀려 만든 화병이나 해군 전함을 연상시키는 멀티 탭은, “제품 자체가 갖는 의미와 내러티브를 디자인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로 꼽아 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통적인 소재와 기법을 활용하지 않은 기핀’터미어의 혁신적 아이디어의 제품들은 현재 기업체와의 협력을 통해 양산화에 착수하고 있다고 한다.
디자인 마켓의 일환인 ‘서울 영디자이너스 마트’는 서울의 진취적인 디자이너 40여 팀이 그들의 디자인 제품을 소개하고 파는 디자인 장터로서, 여느 전시장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흥겨운 분위기를 자랑했다. 디자인붐 마트 서울과 마찬가지로, 참여 디자이너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찾아오는 관람객이자 미래의 소비자인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디자인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규모와 장소의 협소함은 불만, 아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사실을 바로 그 만남이 일련의 디자인 페스티벌들에 활기찬 생명력을 불러 넣었음을 애써 모른 채 했던 것일까. 동선의 문제나 전시 내용의 빈약한 함량보다 훨씬 서운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 안에서도 기꺼이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는 게 젊음 아니겠는가. 젊은 디자이너라고 하기에는 약간 민망할 디자이너 김홍용은, 그러나 즐거움을 찾아내는 데는 도가 튼 것처럼 보였다. 이번 서울 영디자이너스 마트를 통해 그가 공개한 ‘제이노펜꽂이’는 바로 “레디메이드오브제인 자동차 폐 엔진에서 가져온 피스톤에 펜꽂이라는 ‘쓸모’를 부여한” 재미있는 제품이었던 것. 현재 원광보건대학 귀금속보석디자이너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여전히 필드를 뛰며 금속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디자인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 밖에도 훼손된 숭례문을 재조명하기 위해 제작한 ‘숭례문 브로치’의 공공디자인스튜디오, 고운 레이스 보를 깔고 식사를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자 레이스 조명’으로 서정적인 디자인 세계를 펼치고 있는 가구 및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진석 등이 눈에 띄었다.
서울 영디자이너스 마트를 빠져 나와 세계 디자인 도시전과 기업 • 단체전, 디자인탐구전 등을 둘러보았다. 구색 맞추기에 급급한 듯 기색이 역력했는데, 이는 서울디자인올림픽의 여러 장점을 결국 가리고만 듯한 인상이다. 이번 행사의 마지막 코스로 전국 디자인학과 학생들의 전시회를 둘러봤다. 학교마다 특색을 갖춰 전시를 구성했는데, 특히 계원조형예술대학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어린이가구를 주제로 전시를 위해 학생들이 제작한 디자인 가구들은 기능성과 심미성 등을 두루 갖추며 깔끔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의자, 테이블, 장식장 등 모듈의 조합에 따라 다양한 용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1 + 1 = 1’이 가장 대표적인 예. 이 제품을 제작한 송지혜, 김솔지 학생은 “처음으로 나의 디자인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자리다. 많이 떨려고 기대됐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아 기분이 좋다”고 소감을 밝힌다. 특히 이들은 제품 구입을 희망하는 사람을 만났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