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성종이 | 두성종이 | 2016-06-10
사람이 무언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는 ‘보이는 것’. 즉, 형태다. 외형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이 익숙한 우리는 이해를 위해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디자이너는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왜 이런 형태를 만들어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는 형상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에디터 | 허영은(yeheo@jungle.co.kr)
자료제공 | 두성종이(www.doosungpaper.co.kr)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다양한 시각이 있지만,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인류의 시초를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모방 능력이 인간의 본능임을 암시한다. 예술의 시작을 원시시대의 벽화에서부터 본다면 예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능력에서 시작된 것이 맞다.
초창기 예술이 세상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었다면, 현대 예술은 작가의 눈으로 본 세상을 표현한다. 한 개인의 시선으로 탄생한 결과물은 우리에게 신선함을 주지만, 그 형태가 이때까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른 예술보다 대중과 친밀한 디자인은 오히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야 한다. 때문에 디자이너는 주변에 있는 사물, 현상, 개념에 관심을 가지고 그를 자신의 작품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는 형태를 단순히 외형을 위한 참고 자료가 아닌, 그것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까지 연구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학(Science of design)이다. 디자인학은 디자인을 예술 활동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사회적·문명적 현상으로 인지하여 해석한다. 이론보다 실무가 중심이 되는 한국에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재 두성 인더페이퍼 갤러리에서 열리는 <무카이 슈타로, 세계 프로세스로서의 제스처>전은 한국 최초로 디자인학을 소개하는 의미론적인 전시다.
<무카이 슈타로, 세계 프로세스로서의 제스처>전은 디자인학을 대표하는 무카이 슈타로(Shutaro Mukai)를 한국에 소개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디자인 교육과 이론에 큰 공헌을 한 독일 울름 조형대학(Hochschule fur Gestaltung Ulm)에서 공부한 무카이 슈타로는 자신이 연구한 디자인학을 바탕으로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 기초디자인학과를 설립하여 융합적 디자인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그의 디자인학은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인 하라 켄야(Kenya Hara)와 후카사와 나오토(Naoto Fukasawa)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일본 디자이너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전시장에 30여 점의 작품들이 공중에 매달려 하나의 공간을 이룬다. ‘파사주’(Passage)라 불리는 이 공간에 들어서면 마치 한 권의 책 속으로 들어온 듯하다. 양옆으로 일본식 한지인 와시에 무카이 슈타로가 수집한 동서고금의 도상과 이미지들을 실크스크린 프린트한 작품들이 나열되어 있다. 과학, 신학, 문학, 기호학 등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각 작품 속의 복잡하면서도 신비로운 이미지들을 보고 있으면 작은 공간 안에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총망라한 느낌마저 든다.
작품에 담긴 내용은 두 가지 주제로 구분된다. 좌측에는 태양, 대기, 땅 등 대자연을 이루고 있는 형상에 대한 이미지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인간의 손에 대한 이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카이 슈타로는 대자연의 형상을 대우주(Makrokosmos)로, 인간의 손을 소우주(Mikrokosmos)로 칭하며 이 두 우주가 순환하며 세상을 재생시키는 과정을 ‘제스처’(Gesture)라고 명명했다.
대우주와 소우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간다. 우리는 나무뿌리의 모양에서 인간의 핏줄을 발견하고, 동물의 의태에서 태양, 혹은 생물의 눈과 닮은 점을 발견한다. ‘자연은 안의 밖에 있고, 밖의 안에 있다.’라는 괴테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형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작품들이 양옆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어느 쪽을 먼저 봐도 내용은 이어진다. 이와 함께 입구 앞과 뒤에 설치된 거울은 무카이 슈타로가 말하는 ‘앞’이라는 단어의 양의성과 세상의 순환 구조를 강조하는 물리적 장치로 작용한다.
디자인학의 시작은 형태를 연구하는 것이었으나 점점 확장되어 ‘세상의 탄생’이라는 원초적인 개념까지 다루게 되었다. 어쩌면 형태를 연구한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존의 형태에서 모티브를 얻어 새로운 의미로 변화시키는 디자인 역시 세상을 연구하는 행위 중 하나일 것이다.
‘통합적 지식의 총체’라고 불리는 무카이 슈타로의 광범위한 지식에 놀라며 전시 공간을 벗어나면 그가 작업한 콘크리트 포에트리(Concrete Poetry)를 마주하게 된다. 구체시라 불리는 콘크리트 포에트리는 형태, 의미, 음절 등 문자의 구성요소들을 해체하고 결합하는, 눈으로 보는 시다. 독일 울름 조형대학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무카이 슈타로는 구체시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간결하면서도 전달하는 바가 명확한 콘크리트 포에트리 작품을 보면 형태를 오랫동안 연구한 무카이 슈타로의 내공이 느껴진다. 동시에 모두가 공감하고 이해하는 아이디어는 결코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디자이너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무언가를 선보이기 위해서는 단지 사소한 것에서도 큰 의미를 찾아내는 관찰력이 필요할 뿐이다. 요즘처럼 변화가 빠르고 자칫 잘못하면 의미가 쉽게 왜곡되는 시대에서 디자이너는 자신이 만든 결과물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받으며 그걸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그래서 디자이너에게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 형태의 근원과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더 중요해졌고, 이것이 디자인학의 탐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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