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 (미술사가 · 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 | 2016-09-27
‘한반도 최근 역대 최대 규모 지진이 일어나 아수라장!’, ‘지진 안전지대라는 한반도 규모 5.0 이상 지진 가능성 커져’. 올여름 울산 동쪽 해안에서 일어나 울산과 부산 시민들을 놀라게 한 지진이 지난 9월 경주에 다시 발생했다. 규모 5.8의 강진이었다. 최근 빈발하는 우리나라 동남쪽 지진 현상은 수년 내 큰 지진이 발생할 전조 증후라는 지질학계의 예측도 나온다.
21세기 떠오르는 새로운 사회문제, 재난
최근 지진 활동이 잦아지는 현상은 우리나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2010년 1월에는 아이티 섬 포르토프랭스 대지진이 일어났고, 2015년 4월에는 네팔에서 규모 8 안팎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또한 올 초에는 타이완과 에콰도르에서 각각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가장 최근인 8월 말 중부 이탈리아 지진은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사상자가 많아서 대서특필되었다.
최근 유난히 TV, 신문, 인터넷 언론에서 지진에 대한 설과 추측이 급증했다. 하지만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과학계의 경고는 이미 지난 2011년 3월 일본 북동부해 강진과 쓰나미 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조용히 거론되기 시작했다(참고: <시사저널> 2011년 3월 21일 자 ‘한반도 지진, 역사는 알고 있다’, 김회권 기자). 과거 우리나라 역사적 기록, 주기론, 통계학은 이를 뒷받침한다.
일 년 내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지만 대중에게 일일이 보도되지 않는 지진 활동은 연간 스무 건이 넘도록 발생하고 있으며, 평상시 느끼기 어려운 소규모 진동도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겨온 탓에 현재 우리나라 건물 중 내진 설계가 된 경우는 전체의 20%도 안 된다. 뿐만 아니라 갑작스러운 통신 폭주로 통신장애라는 2차적 비상사태를 야기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대중에게는 여간 불안하고 무서운 전망이 아니다.
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건축 디자인과 신기술
여전히 자연재해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 긴 세월과 체계적인 과학 관측, 주기 파악과 분석 작업, 영향력 예측을 통해 대비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현명한 정책과 사업 비용을 필요로 한다. 특히 지진이 야기하는 무시무시한 피해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디자인은 두말할 것 없이 건축설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초고층 건물로 그득한 도쿄에서는 모든 건물에 내진 설계가 응용되어 있다. 규모 8~9대의 지진이 일어나도 끄떡없을 만큼 내진을 위한 신기술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다는 말이다. 특히 인기 높은 내진 기법은 지반 분리(base isolation) 기술로, 지반 기초와 건물 본체를 분리해 건물이 흔들리는 것을 방지한다. 이 기술의 핵심 건축 부품인 신축이음 접합부(expansion joint)는 건물은 물론, 도로나 지하철 철도 등의 공공 인프라 시설에도 두루 응용될 수 있다. 또 시공 단계에서 건물 기반을 깊게 파고 충격 장치를 곳곳에 설치하여 땅의 흔들림에서 발생한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 장치를 내장하는 기법도 널리 응용된다.
재난에 대한 대비는 지진 현상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다. 해외에서는 기후 변화에 따른 자연재해에 본격적인 경각심을 갖고 대비하고 있다. 여기에는 지난 2005년 발생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와 2012년 가을 미국 북동부 뉴욕 주를 강타했던 허리케인 샌디(Hurricane Sandy) 그리고 2013년 11월의 필리핀 슈퍼 태풍 하이얀이 큰 역할을 했다. 지진, 태풍, 홍수, 폭설 등 자연재해는 전력단절, 상수도 공급 차질과 하수도 장애, 기초생활필수품 부족이나 보급 장애 등 2차적인 인재(manmade disasters)로 번진다.
허리케인, 태풍, 홍수같이 강풍이나 물로 인한 재해에 대비할 수 있는 건축 디자인은 상업용 건물, 공공시설, 주거구역의 파괴를 최소화하고 인명을 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강한 바람, 비, 눈을 이겨낼 수 있는 내구성 있는 외장재로 건물 외벽을 보호한다든가, 지상 1~2층까지 물이나 기타 습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외부 밀폐력과 환기장치를 갖추는 것은 표준 사항이다. 예컨대 수많은 인구가 지상과 지하, 바닷가로 통행하는 초특급 메트로폴리스 뉴욕은 전 지구적인 해수면 상승 현상이 극심해지면 수년 안에 맨해튼 남부가 바다 밑으로 잠길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건축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공모했고, ‘Rising Currents 전’에서 당선작을 전시하며 물이 많아질 맨해튼 섬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건축학적, 도시계획적 가능성을 탐색하기도 했다.
일본 건축가 시게루 반(Shigeru Ban)은 재난 대처를 위한 생태친화적 건축 프로젝트를 연달아 담당하다가 국제 건축계의 오스카상이라는 프리츠커상까지 받았다. 르완다 내전이 터지자 유엔은 난민들이 임시가옥을 지을 수 있게 금속 파이프와 비닐포를 원조품으로 보냈지만 난민들은 구호품을 팔아 현금과 교환해 버렸다. 인도적 구호물자가 잘못 쓰이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생각에서 시게루 반은 저렴하고 내구성을 더한 종이 건축을 소개했다. 이후 유엔 난민보호소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해 아이티 대지진 후 이재민 보호소, 일본 동일본 대지진 후 오나가와 난민대기소, 뉴질랜드 크라이스처치 대지진 후 성당을 설계해 화제를 모았다.
자연재해가 야기하는 1차적 피해 외에도 인류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또 다른 재해는 자연재해 발생 후 인간 활동으로 빚어지는 인재다. 따라서 수해나 기후가 인재로 확산되는 것을 예방하는 방지책을 건축 디자인에 포함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컨대 홍수로 거리에 물이 차 있거나 폭설로 인해 건물 내에 사람들이 고립될 상황에 대비하여 전력 공급을 유지하고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그래서 스마트 건축가와 재난 관련 디자이너들은 예비 전력, 물탱크, 가스 설비와 비상 구호품 보관 등 건물 내 핵심 설비시설은 지하실을 피해 건물 맨 위층에 설계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조언한다.
해마다 극심해지는 기후 온난화도 문제다. NASA에 따르면 올 7, 8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 곳곳은 1880년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더운 폭염에 시달렸다. 특히 콘크리트, 강철, 유리를 주 소재로 한 건물이 촘촘히 모여 있는 도시는 무더운 여름철 빠른 시간 안에 덥고 갑갑한 환경으로 변한다. 이에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는 유리를 주 소재로 한 현대식 건물 외벽에 태양광 차단물 (solar shading device)을 여러 겹으로 설치하거나 스택 환기장치(stack ventilation)를 설치하는 것이 추세다. 쾌적한 실내환경 조성에 도움이 되고, 냉방 장치의 과다 사용과 과열로 인한 기계적 고장과 화재 위험을 예방하는 방법으로 권장된다.
디자인은 현대사회의 난제 해결사
‘(경제를 포함한) 사회적 관습이 선견지명이 있는 것(디자인)과 없는 것을 판가름 짓는다’며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미국의 건축가 벅 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는 일찍이 1970년대에 레바논 전쟁 난민들을 위한 구호천막을 고안한 재해 디자이너의 선구자였다. 21세기는 다시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고 소비를 자극하는 ‘보기 좋은 디자인’의 시대에서 곤란한 문제나 위기에 봉착한 인류사회에 실용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이른바 ‘문제 해결사로서의 디자인’의 시대로 이행하고 있다. 자연재해에 대한 대비책은 과학기술 분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재해가 발생하여 위기사태가 벌어졌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고 극복하기 위한 방책을 구축하려면 특히 디자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제는 ‘지구를 살리자’는 기치하의 생태 디자인 또는 환경친화적 디자인을 넘어서야 한다. 도시환경과 공동체를 디자인하여 인류가 위기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회복가능한 디자인(Resilient Design)’의 모토다.
디자이너는 과연 모든 인도적, 사회적 문제를 디자인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일찍이 그 같은 과제를 디자인 전시회로 구성하여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킨 사례가 있다. 1993년에 설립된 노르웨이의 노르스크 폼(Norsk Form)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연재해, 전쟁, 인도적 위기 상황에 디자인이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다양한 전시회를 기획해오고 있다. 또한 애넌버그 재단도 건축가, 디자이너, 사진가들이 어떻게 자연재해를 유연하고 슬기롭게 해결하는가를 조명한 ‘물에 빠지든가 수영하든가(Sink or Swim) 전’을 기획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오늘날 재난, 전쟁, 박해 등을 이유로 살고 있던 터전에서 피신해 다른 곳으로 이주해 사는 난민 또는 이민자는 5천만 명에 이르며, 특히 미래에는 예측과 통제가 어려운 자연재해에 떠밀려 이주하는, 이른바 ‘기후 난민’ 또는 ‘환경 난민(environmental migrants)’의 수가 더 증가할 것이라고 한다. 대규모로 강제 이주된 후 수용소 같은 집단 시설에 임시 배치되는 난민들이 겪어야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는 주거지 부족 외에도 물, 음식, 전기, 가스 같은 에너지 부족, 불결한 위생 환경과 전염병, 그리고 이로 인해 빚어지는 폭력과 범죄까지 기초적인 생존 문제부터 사회 문제까지 다양하다.
건축학 교수 장-루이 코헨(Jean-Louis Cohen)이 쓴 책에 따르면 흔히 세계대전 같은 대규모의 파괴적인 사건은 후진적 상태에 머물러 있던 군사기술 발달을 촉진하여 건축, 공학, 디자인 분야에 혁신을 완성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예컨대 때론 제1차 세계대전 같은 산업적 규모의 전쟁은 건축과 디자인의 근대화 속도에 박차를 가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뉴욕 맨해튼과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을 수놓은 마천루는 제1, 2차 대전 때의 군사기술을 통해 입증된 신기술 유리 소재, 강철 튜브, 동역학 이론 덕분에 가능했고, 근대 디자이너들이 혁신적인 가구 소재로 즐겨 활용했던 합판 몰딩 기법이나 플라스틱 신소재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군수용품 생산 기술을 소비자 용품 생산에 도입해 대중화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 빈도가 늘고 있고, 9/11 뉴욕 무역센터 빌딩 참사와 이라크 전쟁 이후 중동발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 건축가들과 디자이너들은 재해와 인도적 위기에 대처하는 건축과 디자인 붐을 주도하고 있다. 미래에는 인구 증가, 자원 부족, 탈제조업화, 기후 변화라는 새로운 생존 문제에 처할 것이라는 예견 아래, 21세기 건축과 디자인은 환경친화주의(Environmentally-friendly), 생태주의(ecology),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고려한 혁신이 필요하다.
글_ 박진아 (미술사가 · 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