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두 개의 이미지가 있다. 당신에게 익숙한 것은 무엇인가?
(좌) CHANGE-We can believe in 포스터 (우) HOPE 포스터 (출처: 버락 오바마 공식 홈페이지)
대부분의 사람은 후자를 고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오바마를 대표하는 이미지였던 ‘HOPE’ 포스터는 사실, 오바마 대선 캠페인의 공식 이미지가 아니었다. 디자이너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가 개인적으로 만든 포스터가 인기를 끌면서 오바마의 선거 캠프에서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오히려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을 첫 번째 이미지가 오바마의 공식 포스터 중 하나다.
HOPE 포스터의 등장과 효과는 선거 디자인을 재정의했다. 비록 어설프거나 엉성할지라도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진심을 담아 만든 이미지가 유명 디자이너와 홍보 전문가가 만든, 선거 캠프에서 자신 있게 내세우는 디자인을 뛰어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론 페어리의 포스터는 디자인마저도 훌륭하지만 말이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이런 변화의 흐름을 보여준 사람은 버니 샌더스였다. 한 번의 TV 토론으로 힐러리의 위협 상대가 된 버니 샌더스의 선거 디자인은 대부분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다. 심지어 지지자들은 버니를 위해 선거 포스터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Not ME US’라는 표어를 내세운 일러스트레이터 알레드 루이스(Aled Lewis)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후보에 올랐던 다른 포스터들도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되었다. 버니 샌더스의 선거 캠프는 포스터뿐만 아니라 확산되는 과정까지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버니 샌더스의 공식 포스터로 지정된 ‘Not ME US’는 다양한 언어로 제작되었다. 이민 소수자를 위한 정책과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버니 샌더스의 공약 때문이다. (출처: 버니 샌더스 공식 홈페이지)
버니 샌더스 포스터 공모전 후보 작품들 (출처: 버니 샌더스 공식 홈페이지)
이와 달리 힐러리는 고전적인 방식을 고집했다. 힐러리의 대선 캠페인 로고는 브랜딩만큼은 최고로 손 꼽히는 펜타그램이 맡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등장부터 야유를 받으며 여러 패러디를 낳았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이 ‘힐베티카(Hillvetica)’다. 디자이너 릭 울프(Rick Wolff)가 만든 이 서체는 장난 반 진심 반으로 만든 것이지만, 곧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널리 퍼졌다.
화살표로 진취적인 느낌을 표현한 힐러리 로고는 펜타그램의 마이클 비에루트(Michael Bierut)가 디자인했다. (사진제공: 위키피디아)
왜 많은 사람들이 힐러리의 로고를 비난하고, 우스갯거리로 만들었을까? 디자이너이자 비평가인 린제이 밸란트(Lindsay Ballant)는 잘 짜인 선거운동과 그를 뒷받침하도록 계획된 디자인에서 힐러리의 계산적이고 빈틈없는 성격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힐러리의 가장 큰 약점인 기득권층의 낡은 정치를 떠올리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힐베티카는 디자인적 비평이 아니라, 기득권에 대한 현 세대의 비판과 고리타분한 선거 디자인을 거부한 결과다. 이는 힐베티카가 젊은 층이 중심이 되는 소셜 네트워크와 인터넷으로 널리 퍼졌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인기에 힘입어, 힐러리 선거 캠프는 스스로 사람들에게 힐베티카의 공유를 권했다. 힐러리를 비판하는 의미에서 만든 디자인이 결과적으로는 마케팅 통로가 된 것이다. 가뜩이나 젊은 세대와 소통이 힘들었던 힐러리에게는 넝쿨째 굴러 온 호박인 셈이다.
자신을 비난하는 작품마저 포옹하고 마케팅의 수단으로 삼는 미국 대선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디자이너들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특히 이번 대선은 디자이너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프로젝트들이 다수 등장했다. 이런 특징은 공화당 대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를 비난할 때 확실히 드러난다.
2016년 10월 26일, 미국 뉴욕 버스정류장에는 도널드 트럼프를 풍자한 옥외광고가 실렸다. 〈덤 앤 더머〉, 〈델마와 루이스〉, 〈샤이닝〉 등 영화를 패러디한 이 광고는 3명의 광고 디자이너들이 힘을 합쳐 자발적으로 개재한 것이다.
Anti Trump Ads, 시계방향순으로 영화 〈델마와 루이스〉, 〈샤이닝〉,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덤앤더머〉를 패러디했다. (사진제공: Alex Reinoso)
버스정류장에 Anti Trump Ads가 설치된 모습 (사진제공: Alex Reinoso)
디자이너 알렉스 레이노소(Alex Reinoso), 알렉산드로 에체바리아(Alessandro Echevarria), 닉 엘리엇(Nick Elliott)은 영화 패러디를 통해 트럼프를 선택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린다. 트럼프의 위험성을 영화와 매치하여 표현한 재미는 기본이고, 우스꽝스러운 일러스트레이션도 프로젝트의 풍자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이 프로젝트를 더 빛나게 해준 요소는 바로 광고가 기재된 위치다. 〈Doomsday Mission〉 편은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Trump International Hotel) 건너편에 설치되었다. 제품이 아닌, 누군가의 정치적 의견을 판매하는 듯한 광고가 당황스러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닉 엘리엇은 “게릴라 광고는 일반 광고보다 배 이상의 효과를 낸다.”며 광고라는 매체를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광고 중 〈Doomsday Mission〉
는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 건너편 버스정류장에 설치되었다. (사진제공: Alex Reinoso)
뉴욕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광고를 통해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세상의 위험성을 경고했다면, ‘Pins won’t save the world’ 프로젝트는 배지와 패치, 타투 스티커 등 밀레니엄 세대들이 좋아하는 패션 소품을 이용하여 트럼프 반대와 정치 참여를 외친다.
디자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Pins won’t save the world’는 아직 자신만의 확고한 정치적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사회 새내기들이나, 정치 성향을 드러내고 싶지만 기존 상품들의 디자인이 만족스럽지 못한 젊은 지지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굳이 선거가 아니어도, 심지어 태평양 건너 한국에서 달고 다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법한 감각적인 디자인은 우리가 다 아는 그와 그녀. 스테판 사이그마이스터(Stefan Sagmeister)와 제시카 윌시(Jessica Walsh)가 주도하여 다른 디자이너들과 함께 작업한 것이다.
사이그마이스터와 윌시, 다른 디자이너들의 유머가 느껴지는 ‘Pins won’t save the world’ 의 패치와 배지. 누구나 공식 사이트(www.pinswontsavetheworld.com)에서 구매할 수 있다. (사진제공: Pins won’t save the world)
얼핏 보면 패션 브랜드 룩북같지만, 아닙니다. (사진제공: Pins won’t save the world)
현대 그래픽 디자인계에 한 획을 그은 디자이너의 작품이어서가 아니라, ‘Pins won’t save the world’는 똑똑한 프로젝트다. 밀레니엄 세대의 취향에 맞는 룩앤필을 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타깃층에게 프로젝트의 목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보다 멋지게 정치적 성향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힐러리나 트럼프의 이름이 크게 박힌 배지보다 ‘Pins won’t save the world’의 배지들이 ‘쿨’하다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다.
버스정류장 광고, 배지 등 트럼프를 비난하는 프로젝트가 우리의 시선을 끄는 이유는 디자이너들이 정치적 메시지를 ‘유머’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을 통해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즐겁고 재미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디자이너의 적극적인 움직임은 ‘선거 디자인이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이제 사람들은 승리를 위해서 만들어진 디자인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자발적인 선거 디자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선거의 흐름을 바꾸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지난 2번의 미국 대선을 통해 그 위력을 경험했다.
이렇게 큰 변화와 흐름이 미국 대선에만 해당된다는 건 슬프고 아쉬운 일이다. 한국에는 수많은 디자이너가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사회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다. 나라가 시끄러운 요즘, 미국 대선 디자인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바를 시사한다.
에디터_ 허영은(
yeheo@jungl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