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 (미술사가 · 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 | 2017-01-03
우리가 늘 타고 다니는 승용차의 외장은 왜 굴곡이 지어졌을까? 국제여행을 할 때 타는 여객비행기는 왜 시가 같은 모양새를 지녔을까? 어떻게 하면 보다 빨리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지난 약 1백 년 동안 인간은 오묘한 자연에서 단서를 얻어 스트림라인 디자인과 에어로다이내미즘이 응용된 교통 디자인을 발전시켰다. 유선형 디자인의 기술적인 연구와 실험은 독일에서 시작되었으나, 전진, 속도, 효율, 진보 등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심볼로서 상업적 성공으로 표출된 본거지는 20세기 중엽 미국에서였다.
격동의 시기에 탄생한 스트림라인 모던
19세기 말엽을 거쳐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기계는 직선적이고 육중하며 진취적인 인상을 주며 근대적 물질 문명의 심볼로서 대중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독일의 바우하우스 건축 및 디자인 운동은 직선 위주에 일체의 장식이나 군더더기를 없앤 새로운 미학으로 근대인들에게 봉사할 대중적이고 인도적인 디자인을 소개하는 데 한창이었다. 또한 이탈리아에서는 1910년 무렵부터 기계라는 근대적 과학기술의 이기에서 참신함, 젊음, 힘, 속도감을 포착하고 그것이 자아내는 역동적 아름다움을 찬양한 미래주의(Futurismo) 운동이 발기하며 다가올 신시대의 기계문명을 두 팔 벌려 힘차게 포용했다. 이탈리아 미래주의는 영국으로 건너가 보티시즘(Vorticism, 또는 소용돌이파) 운동으로 이어졌다.
‘스트림라인 모던(Streamline Moderne)’ 또는 근대 유선형주의 디자인은 본래 유럽 양차 세계대전 사이기와 제2차 세계대전기 무렵인 1920년대~1940년대에 유행한 아르데코(Art Deco) 양식에서 가지 쳐 나온 미학적 조류의 하나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대량살상력을 기록했던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20년대에 접어들자 디자이너들은 현실이 된 기계 시대(machine age)에 걸맞는 근대적 정신(modern spirit)을 해석해 표현할 수 있는 미학을 찾아 고심했다.
그리고 그 조형적 언어에 대한 단서를 기계 미학에 담긴 기하학적 요소에서 발견하려 애썼는데, 그 결과 탄생한 양식이 바로 스트림라인 모던, 또 다른 표현으로 근대 유선형 양식(Streamline Style)이다. 스트림라인 모던은 유럽과 미국에서 경제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격동과 환란의 시기 동안 미술과 건축을 포함한 실내장식용 가구, 의상, 패키징, 포스터, 서체에 이르는 방대한 디자인 분야에 골고루 영향을 끼치면서 대중의 일생생활에 침투했다. 이들은 미래에 다가올 기계와 기술의 시대는 이제 현재의 일부가 되었음을 서서히 각인시켰다.
스트림라인 모던, 민주적 아르데코 시대를 열다
1925년에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The International Exhibition of Modern Decorative and Industrial Arts)에서 아르데코 미학은 그 웅장하고 위력적인 미학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유럽의 정치적, 문화적 헤게모니의 종결을 고한 행사였다. 그로부터 약 15년 후 1939년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주최국 미국은 우리에게도 모더니즘이 있음을 공신 선언하고 향후 미국인들이 주도해 나갈 미래의 일상을 제시했다. 이 행사에서 ‘미국 모더니즘(American Modern)’ 디자인의 선구자 노먼 벨 게데스(Norman Bel Geddes)는 제네럴 모터스(General Motors) 관의 대표 디자이너로 참가하여 ‘나는 미래를 봤다(I Have Seen the Future)’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유선형과 유기적 선의 미학이 담긴 각종 산업디자인 용품을 선보였다.
스트림라이닝 디자인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이룩했다. 갑부 고객을 겨냥했던 유럽 아르데코 양식은 값비싼 자재와 화려한 디자인으로 유명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중화가 어려웠다. 허나 귤이 바다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부유층을 상대로 소량 생산되었던 아르데코 디자인은 미국으로 건너온 후 간소화, 대량생산화되어 ‘스트림라인 모던’ 양식이라는 한결 간결하고 역동적인 외양으로 쇄신하고 이른바 미국판 ‘역동적인 아르데코 양식(Art Deco on the Move)’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만인을 위한 대중적, 민주적 아르데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미국 산업디자인의 주축이 된 스트림라인 모던
스트림라인 모던 양식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1950년대부터 세계 패권국이 된 미국의 근대적 경제 건설과 성장을 상징하는 미학 양식이다. 따라서 미국인들에게 유선형 미학이란 문화적 선도 요소이며 경제적 촉매제였다. 경제 붐을 맞으며 자신감과 낙관으로 물들기 시작했던 미국인들에게 ‘미국적 근대주의(American modernity)’의 미학을 보여줬으며, 빈곤과 피폐의 경제공황기를 잊고 물질적 풍요와 안락을 향유하고픈 욕구를 한껏 불지폈다. 덩달아서 산업디자인은 광고와 더불어 미국 자본주의 경제를 빛내줄 전문분야로 등극했고, 산업디자이너가 새로운 전문가로 각광받기 시작한 때도 바로 이즈음이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른바 ‘산업디자인의 황금기’라 여겨지는 1940년대~1970년대 산업디자이너들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주는 일상 소비재 용품(라디오, 진공청소기, 냉장고 등)과 대중사회의 교통통신 대중화시켜줄 대중교통 수단(디젤 연료 기관차, 항공여객기, 개인용 승용차)를 디자인했다. 이들은 현대적 편의와 멋있는 삶의 원형을 제시한 라이프스타일 창시자들이자 제조업의 꽃이었다. 산업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구축한 미국 디자인계의 또 다른 선구자 월터 티그(Walter Dorwin Teague)는 라디오, 조명등, 기관차, 자동차, 고급 테이블웨어 등 아이콘격 유선형 디자인을 남겼는데, 특히 코닥 카메라와 코닝 유리제품의 디자이너로 명성을 얻었다.
오늘날 비즈니스 마케팅 분야에서도 업적을 재평가받고 있는 또 다른 미국 산업디자이너는 바로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다. 본래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피해 새 인생을 찾기 위해 1919년 뉴욕으로 건너왔다. 그는 뉴욕의 고급 백화점 쇼윈도 장식과 가전용 전자제품 스타일링을 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출발했다. 미국의 폭발적인 경제 부흥기라는 호기를 등에 업고, 특히 1960~70년대에 그래픽, 브랜딩, 제품, 가전, 교통, 인테리어 등 분야를 망라하며 유명한 기업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주 받았다. 특히 그는 유선형 미학을 (기능과는 무관하게) 순수하게 스타일링적 요소로만 활용하며, 새롭게 도약하는 미국 경제의 역동성, 스피드, 날렵함에서 풍기는 낙관적 미래상 창조로 연결했던 마케팅의 귀재였다. 소비자들은 새로우면서도 어딘지 낯익은 듯 친숙하게 느껴진 그의 디자인을 거침없이 수용했고, 그의 디자인 컨설팅을 도입한 클라이언트 기업들은 매출 성공을 거듭해 나갔다.
부드러운 곡선이 특징인 현대식 유선형 디자인
실제로 에어로다이나믹공학과 디자인을 결합하여, 말 그대로 형태와 기능을 결합시킨 과학적 유선형 디자인 혁신은 독일 디자이너 루이지 꼴라니(Luigi Colani)에 의해서 1970년대에 와서야 현실화됐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고 했던 독일 바우하우스 디자인 철학에 입각한 그는 일찍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공기역학(aerodynamics)를 공부한 후 60여 년 동안 공기역할과 형체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다. 그 결과 연료를 절반으로 절약하여 환경친화적이고 소비자의 연료소비를 절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디자인 영감을 자연에서 찾는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신칸센 초고속 열차를 디자인한 엔니지어는 물총새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중 현재 신칸센 특유의 에어로다이나믹한 전면부 노즈와 후면부 꼬리 디자인을 착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와 함께 밀라노의 스튜디오 멤피스에서 활동하다가 1985년 볼리디즈모(Bolidismo) 운동을 주도한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마시모 요사 기니(Massimo Iosa Ghini)는 디자인을 기능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미술과 가까운 조형세계를 추구했다. 과거 아르데코와 미국 유선형 디자인에서 본 듯한 흐르는 곡선과 직선을 결합하여 마치 부드러운 기계(soft machine)을 연상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20세기 중엽 미국의 유선형 디자인은 육중하고 위력적인 스트림라인 미학이었다. 하지만 80년대 볼리디즈모 디자인 운동을 통해 리바이벌된 현대식 유선형은 이와는 정반대다. 섬세해 보이는 곡선과 원색 위주의 강렬한 색상의 조합으로 한결 여성스러워진 한편, 고성능(high performance)과 정밀함(precision), 편안함(comfort)까지도 은근하게 암시하는 듯하다.
유선형 미학이 가진 낙관성과 시각적 매력
1980년대 이후부터 경영학에서는 비대해진 조직을 축소시키거나 경영과 직제를 합리화해 능률을 높이는 것을 가리켜 ‘스트림라이닝(streamlining)’이라 칭한다. 초기의 유선형 디자인도 지난 20세기 동안 보다 과학화된 스트림라이닝 과정을 거쳤다. 20세기 초 유선형 자동차 디자인의 선구자 파울 야라이(Paul Jaray)는 수 차례의 실험 끝에 최적의 유선형 자동차란 앞은 뭉툭하게 둥글리고 뒤는 뾰족하게 뺀 눈물 방울 모양(teardrop shape)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보기에 기이하고 후미 부분이 유난히 길다는 미관상의 이유로 자동차 생산업체들은 생산을 꺼리기도 했지만 결국 크라이슬러 에어플로우, 푸조 402, 후방엔진형 타트라(Tatra)는 모두 앞다투어 야라이의 유선형 원칙을 디자인에 도입했다. 이후 독일의 공기역학자 부니발트 캄(Wunibald Kamm)이 뾰족한 후미 즉, 캄백(Kammback) 또는 캄테일(Kammtail)이라는 기술적 해결책을 내놓아, 쉐보레 콜벳 스포츠카와 최근 토요타 프리우스에도 응용되어 자동차 디자인은 세련화를 거듭하고 있다.
유선형 디자인이 탄생한 지 근 100년이 되어간다. 단순 간결의 미니멀리즘이 한동안 현대 디자인을 주도해왔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엔 유선형 굴곡과 포물선 속에 담긴 낙관성과 시각적 매력을 잊지 않고 있다. 20세기 디자인 역사 속의 유선형 미학의 전개와 진보상을 진귀한 소장품과 사진자료를 통해서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디자인 전시회 ‘Strom Lilien Form(유선형)’이 체펠린의 원 발명지 독일 프리드리히스하펜 시의 체펠린 박물관(Zeppelin Museum Friedrichshafen)에서 내년 4월 17일까지 열린다.
글_ 박진아 (미술사가 · 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