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아 (미술사가 · 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 | 2017-03-10
현금이 필요하면 아무 때나 자동현금지급기(ATM)가 지폐를 내주고, 스마트 센서를 단 자동차와 세탁기가 주변 환경에 맞게 작동 속도와 강도를 조절해가며 일상 속의 허드렛일을 대신 해준다. 이미 현대인은 손가락 끝 하나로 스마트폰 앱을 두드려 명령 단추를 밀고 당기기만 하면 앉은 자리에서 기차표나 연극 관람권은 물론 은행 업무까지도 벌 어려움 없이 혼자 처리한다. 조만간 슈퍼마켓에서 고른 식료품은 무인계산대에서 스마트폰으로 지불하고, 인터넷에서 주문한 상품은 드론이 집 앞 현관까지 배달해줄 날도 머지 않았다.
필자는 1991년에 대학에서 새롭게 개설된 인공지능 강의를 수강했다. 비슷한 때에 광화문에 나가면 조선일보는 ‘산업화는 뒤졌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일찍이 종이 인쇄판 일간지 시대를 넘어 다가올 지식경제를 지배하게 될 디지털 정보전달 매체의 개막을 예고했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21세기로 막 접어들었을 뿐인데 현대인의 일상은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손바닥 만한 작은 디지털 전화기 하나로 가족친지와의 사소한 의사소통부터 하루 일과 업무를 처리하고 있고, 컴퓨터 봇(bot) 프로그래밍 기술은 발전을 계속하면서 우리 생활 구석구석까지 디지털화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디지털화된 기계와 상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귀여운 동물 혹은 어여쁜 아가씨 외모를 딴 로봇도 하나둘 시험 상용화되기 시작하면서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디지털 기계와 인간 사이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져 간다. 로봇이란 무엇인가? ‘일종의 센서, 지능, 구동장치가 있어서 외부상황을 파악하고 정보를 처리하여 기능적으로 반응하고 독립적으로 업무수행을 할 능력을 갖춘 단일체다. 정의하자면 로봇이란 매우 다양하면서도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실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실내난방용 온도계도 로봇이고 자동주행하는 자동차도 로봇이다. 그렇게 친다면 오븐도 로봇이고 스마트폰도 로봇이다’라고 도시건축가 겸 MIT 센서블 시티랩(Senseable City Lab) 연구소의 대표 카를로 라티 박사(Carlo Ratti)는 정의한다.
과거 로봇은 기계공학자나 IT 전문가들의 전용 구장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로보틱스(Robotics) 분야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이 재조명되고 있다. 인간과 기계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줄 중재적 역할을 디자이너가 수행해주기를 기대한다. 인간은 로봇을 어떤 존재로 받아들이며 그에 맞춰 어떤 로봇을 디자인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인간이 자칫 낯설고 무섭게 느껴질 수 있는 로봇과의 만남을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느끼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 인간과 로봇 사이 유지돼야 할 가장 이상적 관계는 어떤 상태일까? 그리고 그런 상태를 제공할 로봇은 어떻게 디자인되어야 하나? 최근 로보틱스 분야에서 불고 있는 붐과 더불어서 인간과 로봇 기계 사이를 조율해야 할 디자이너에게 던져진 몇몇 막중한 핵심 과제들이다.
로보틱스 분야를 디자인적 시점과 개념에서 통달하여 현대와 미래의 인류에 필요할 로봇의 형태와 기능을 디자인하는 것이 로봇 디자이너의 임무다. 1990년대 중엽부터 디자인은 비즈니스 경영 분야의 포용으로 마케팅과 손잡고 기업의 매출 상승에 기여했다. 21세기 초반 십 년은 디자인싱킹론(design thinking)이 탈산업화된 서구 산업계와 학계를 위시로 디자인을 과도하게 학문화, 이론화시킨 나머지, 실무 디자이너들이 직업적 위상과 역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서서히 우리 일상을 침투하기 시작하는 로봇과 함께 다시금 실무 디자이너도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가까운 현재와 미래,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 더 나아가 기계를 매개로 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진화하고 전개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디자이너가 어떻게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로봇을 디자인해내는가에도 영향 받을 것이다.
1. 로봇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인가?
조금만 들여다보면 실제로 오늘 우리의 일상과 노동환경은 사전 프로그래밍된 기계가 알아서 업무를 수행해주는 자동화 기술 덕분에 전에 없이 쉽고 안전해졌다. 이미 웬만한 제품 생산공장에서는 로봇의 팔과 다리를 연상시키는 첨단 기계들이 조이고 조립하는 일을 대신해주고 생산직 노동자는 감독관리만 하면 되는 시대가 된 지 오래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 없이 잘 살았던 우리는 이제 스마트폰 없는 생활을 상상하기 어려워졌다. 전철과 비행기가 무인 조종실에서 자율운행될 뿐만 아니라, 이른바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줄여서 IoT)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제품디자인 외형을 갖춘 디지털화된 기계(digitalized machines)가 우리의 일상생활로 침투하고 있다.
동시에 최근 언론에서는 우리 인간의 노동력이 로봇으로 인해 대체될 것인가라는 쟁점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냉각된 경기와 완화될 조짐이 안 보이는 실업률 소식에 불안해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인공지능의 발달과 업무의 로봇화는 가장 우선 실직의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새로운 기술과 생산체제가 들어설 때마다 인간이 생존적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최근만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수력발전과 풍차가 말을 방앗간에서 몰아내고, 증기기관 엔진의 발명으로 19세기 산업혁명이 불붙기 시작한 후 20세기부터 급속한 기계 자동화가 이루어졌다. 이어서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와 1990년대 인터넷의 대중화는 일부 직종과 직장인을 퇴물화시켰다.
다행히도 인간은 창조적이어서 새로운 직종과 일자리를 창출하여 경제성장의 돌파구를 찾았다. 근대기의 예술가들은 과학기술과 산업화를 통해서 목격한 기계 미학에서 그 특유의 아름다움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며 미술로 표현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과거 노예의 노동력을 동원해야만 할 수 있었던 고되고 반복적인 육체 노동을 기계로 대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으며, 기계가 채 할 수 없는 인간의 노동을 기계처럼 효율적으로 통제, 관리할 수 있다는 경영관리적 사고방식을 열어주었다. 20세기 초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가 창안한 테일러리즘 생산공정방식은 기계를 이용한 생산공정으로 인간의 노동을 기계처럼 효율적으로 활용해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려는 ‘과학적’ 기계 지동화 시스템의 목표이자 출발점이었다.
또 최근 디자인계에서 불고 있는 DIY 트렌드나 메이커 운동(Maker Movement)은 과거 20세기 대량생산된 상품을 수동적으로 구입해 쓰고 버리는 소비자(consumer)로 머무는 것에서 벗어나,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고안하고 제작해서 사용하는 ‘프로슈머(prosumer)’라는 새로운 유형의 프로듀서-소비자 탄생을 선언한다. 특히 CAD 데이터를 신속하게 프로토타이핑하는 데 효과적인 3D 프린팅 기술도 그 같은 추세에 기술적인 순풍 역할을 한다. ‘산업 4.0(Industry 4.0)’ 또는 우리나라에서 명명된 4차 산업혁명은 바로 그런 환경을 조성하고 경제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자고 대중에게 기약한다.
2. 인간과 로봇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는?
우리는 이미 스마트폰 속의 지도가 알려주는 대로 여행 목적지를 찾아 다니고 친지와 친구의 생일을 챙기며 일상에 필요한 여러 사사로운 일을 차질 없이 계획하고 수행한다. 우리는 이미 로봇이 우리를 보살펴주는 생활에 길들여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봇 지능은 인간의 감정과 정서와 소통하는 방법을 깨우치고 있음을 뜻하며, 로봇 기계도 나날이 똑똑해지며 섬뜩하리만치 ‘인간화’되어감을 의미한다. 테크 분야 소식이 보도하듯, 귀여운 아기 물개 형상을 한 파로 로봇이 노인요양소의 외로운 노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귀여운 도우미 로봇이 가사일과 쇼핑을 도와주거나 식당에서 웨이터 노릇을 해주기도 한다. 또한 애플의 시리나 아마존의 에코 같은 준자율형(semi-autonomous) 챗봇(chatbot)은 사용자와 웬만한 대화를 나눌 줄도 안다. 인간의 학습 능력과 언어구사력을 모방하고 스스로 학습해 깨우칠 줄 아는 딥 러닝(deep learning) 테크놀로지는 앞으로도 더 발전할 것이다. 급기야 인간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겨지던 언어 능력과 이미지 분별력, 심지어는 인간의 감정까지도 흉내 낼 수 있는 로봇이 상용화되어 인간과 이웃해 살아갈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로봇은 산업 4.0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보인다. 빅데이터의 구축과 축적으로 개인 기기, 자동차, 건물, 일상용품들이 디지털 기술을 통해 더 많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시시각각 온갖 정보가 교환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일상 또한 긴밀히 네트워크화된 각종 소형개인 모바일 기기와, 센서, 첨단구동장치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가정용 백색가전 생산업체들은 스스로 알아서 떨어진 식재료를 사용자와 인터넷상 온라인 마켓에 알려 배달시켜주는 자발적인 스마트 냉장고가 시판되고 있다. 이 같은 개발 속도라면 2020년 즈음이면 일상생활 속 필수품과 공산품 약 5백억 개 정도가 이른바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의 범주로 포용돼 거래될 것이라 내다본다.
3. 인간과 기계의 융합, 생물학을 넘어서
자연이 부여해준 외모와 능력을 능가하고 싶어하거나 더 우월한 인공적 존재와 융합하여 보다 완결된 인간으로 부활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열망은 특히 근대기 이후 일부 트랜스휴머니스트나 공상과학 팬들이 꿈꿔왔던 판타지였다. 이론적으로 그 어떤 물리적 환경이나 도시 주거환경에서 우리 인간의 신체는 센서-지능-구동장치라는 3대 요건만 갖추면 로봇으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한다. 무서운 이야기이지만, 이미 시중에 시술되고 있는 첨단 의료용 임플란트 칩 기술과 인체 내부에 삽입되어 있는 각종 인공 신체부위 및 보철물을 매개 삼아서, 우리 몸은 ‘인간기계’화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는 얘기다. 예컨대 스마트폰은 이미 은유적인 의미에서 우리 신체 일부로 확장되었다. 인간과 기계 할 것 없이 모두가 디지털로 네트워크화되어 기계가 인간 속으로 녹아들고, 인간이 기계로 녹아들 수 있게 된 지금, 인간의 신체는 더 이상 생물학과 화학에만 의존하는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수 있듯이, 기계와 결합한 미래의 인간은 손 피부 밑 내장칩에서 내뿜는 에너지로 문을 열었다 잠글 수 있고, 인간의 몸과 사이보그 사이 감정과 정보가 물처럼 흐르며 주고받을 수 있는 초자연적 능력은 공상과학 소설에서나 나오는 황당무계한 상상의 세계가 아닌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근 영국 경제지 <파이낸션 타임즈>의 ‘사이버 공격에 노출된 로봇’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현재까지 출시되어 사용 중인 산업용 로봇 다수가 언제든지 악의의 사이버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보안적 위험에 놓여 있으며, 그 결과 외부 침입자에 의해 로봇에 저장된 개인정보가 노출되고 로봇을 원격 조작하여 물리적 폭력을 조장하거나 사회 질서를 해칠 수 있다고 보도했다(“Robots at risk of cyber attack”, <Financial Times> 2017년 3월 2일 자).
지난 수십 년 사회문화학자들은 현대인은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했다. 이제 우리는 크든 작든 아니면 복잡하든 단순하든 도처에 로봇으로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런데 로봇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는 아직도 모호하고 인간과 로봇 사이 발생할 철학적, 윤리적 문제점도 해결하지 못했다. 인간은 정말 로봇이 필요한가? 인간에 진배없는 지능과 감정을 가진 로봇을 인간은 감당하고 신뢰할 수 있을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복잡 다양해진 우리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관계망만큼이나 인간과 로봇의 관계 혹은 로봇을 매개로 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도 복잡 다양하게 진화할 것이다. 그런 세계 속에서 로봇은 인간의 친구가 되어줄 것인가 적이 될 것인가?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건대, 극심한 기술혁명과 새 경제 패러다임 전환이 벌어질 때마다 생존 위협을 느낀 대중의 사회동요와 소요가 불거지곤 했다. 로봇은 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의 결과인가 아니면 기계 괴물인가? 인류의 삶은 로봇으로 인해 더 윤택하고 여유로워질 것인가, 인간의 직장과 일, 더 나아가 인류의 질서를 빼앗아갈 가치 파괴자인가? 그리고 인간과 로봇이 공존할 미래 사회는 유토피아가 될 것인가 아니면 디스토피아가 될 것인가?
이 모든 심각한 미지의 의문과 문제제기는 산업 4.0 시대가 주도한 과장된 기우는 아닐까? 미국의 과학소설가 겸 네트워크 평론가인 브루스 스털링(Bruce Sterling)은 미래는 생태적 디스토피아가 될지언정 적어도 ‘로봇은 극적 효과를 위한 도구일 뿐 테크놀로지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예견한다. 여전히 로봇은 우주 외계인과 더불어서 주로 공상과학 소설과 영화에서나 다뤄지던 가상적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가 향할 수 있는 여러 미래 시나리오 가운데서 로봇의 시대가 펼쳐질지 모를 미래에 대비하여 인간의 일과 관계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던지며 디자이너가 담당해야 할 임무를 모색해보는 전시 ‘헬로 로봇(Hello, Robot)’ 전이 최근 독일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 네덜란드 겐트 디자인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응용미술박물관에서 공동 기획으로 5월 14일까지 열린다.
글_ 박진아 (미술사가 · 디자인컬럼니스트, jina@jinapar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