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0
‘얼마나 잘사는가’를 따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어떻게 잘사는가’가 중요해진 시대다. 그리고 ‘성장’의 구호보다 ‘함께’의 목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시대다. 이러한 세상의 변화는 디자인에도 새로운 개념과 역할을 부여한다. 디자인은 이제 생산의 요소에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산업으로, 형태 미학의 개념에서 시스템의 개념으로 옮겨가고 있다. 또한 궁극적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도구로써의 역할이 디자인에 요구되고 있다. :DOMC(디자인 나눔 센터) 정인애 대표는 이처럼 새로운 시대의 디자인의 변화와 역할을 ‘서비스디자인’과 ‘디자인 나눔’으로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 속에서 디자인의 패러다임 변화와 새로운 가치를 다시 한번 살펴본다.
강연 | 정인애 :DOMC 대표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세계 산업구조가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제조산업에서 서비스산업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이미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60%가 넘어간다. 제조산업 시대의 디자인이 주로 ‘예쁜’ 것을 만드는 일이었다면, 서비스산업 시대의 디자인은 ‘가치’를 만드는 일이다. ‘가치’는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의 경험에 의해 이야기된다. 과거 기업들의 소비자들에게 팔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똑똑해진 소비자들이 이제 그들의 경험으로 ‘가치’를 책정하기 때문이다. 애플이 앱스토어를 통한 IT 서비스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도, 제록스가 복사기 제조 업체에서 문서 관리시스템 회사로 변모한 것도, 필립스가 의료서비스 사업을 기업의 핵심으로 가져 오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에서 주목 받는 것이 ‘서비스’디자인’이다. 서비스디자인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디자인진흥원 윤성원 과장의 말을 빌릴 수 있다.
‘집중적이며 맥락적인 디자인리서치,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욕구를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개발, 특화된 가시화 방법을 통해 고객이 경험하는 제품 및 서비스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법’(서비스디자인 시대가 온다, 2010, 윤성원)
다시 말해, 공급자 위주에서 소비자 중심으로의 변화로 고객 관점의 서비스 형태와 기능을 선보이는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비스디자인이 세계적 이슈가 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의 한국에서도 서비스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서비스디자인이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라는 질문들이 종종 들린다. 서비스디자인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 방법론을 말할 때 발견(Discover), 구체화(Define), 실행(Develop), 결과(Deliver)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이 네 과정은 서비스디자인의 프로세스로 확산과 수렴적 사고가 반복되며 진행된다.
먼저 ‘발견’은 문제가 무엇인가를 탐색하는 단계로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사전조사와 사용자 그룹에 대한 관찰, 분석, 경험으로 최대한 많은 가능성과 아이디어를 수집하는 확산과정이기도 하다. ‘구체화’는 ‘발견’에서 찾아낸 것들 중 사용자 입장에서 최선의 방안을 추려내는 단계로 수렴의 과정을 거친다. 추려진 내용들을 다시 확장시켜 모든 가능성을 염두하여 시각적 아이디어의 모델로 발전시키는 단계가 ‘실행’으로 시나리오, 스토리보드, 이해 관계자 모두가 함께하는 공동개발 등으로 이뤄진다. 마지막 ‘결과’는 ‘실행’의 의견을 다시 수렴, 명료한 시각화로 전달하는 단계다.
이러한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에는 디자인적 사고(Design Thinking)가 함께한다. IDEO의 CEO 팀 브라운은 디자인적 사고란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그들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혁신을 추구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위에서도 말한 사고의 확산과 수렴과정의 반복을 통해 이뤄지며, 확산과정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수렴 과정에서는 신중한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또한 디자인적 사고는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방법에 의해 수행되며, 여기에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경영학이나 기술학 등 다학제적 접근이 요구된다. 공대, 의대, 인문대학 등과 협력하는 스탠포드 디자인 스쿨이라든지, 핀란드 알토대학의 국제디자인경영학과처럼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비즈니스와 디자인을 결합시킨 통합적 과정의 학과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서비스디자인은 공공부분과 민간부분으로 구분된다. 공공부분은 말 그대로 사회문제해결 등의 공공의 영역에서 정부나 공공기관이 주도적으로 서비스디자인을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2000년대 초반 영국에서부터 나온 개념으로 대표적인 사례로는 우리로 치면 디자인진흥원 역할을 하는 영국의 디자인카운슬에서 주도한 Dott프로젝트가 있다. Dott는 ‘Designs of the Time’, 이 시대의 디자인들이라는 뜻으로 교통, 에너지, 교육, 건강, 식량 등 디자인 주도의 공공서비스 혁신이 우리생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10년짜리 프로젝트로 2년 단위로 캠페인이 진행된다. 특히 시작인 2007년의 Dott07은 서비스디자인이라는 용어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Dott에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기사 하단 링크를 참조하면 된다)
Dott07 캠페인에서 영감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작년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지식경제부와 디자인진흥원이 주도한 아파트관리비고지서 리디자인(Redesign)이다. 난잡한 광고들과 이해할 수 없는 정보 수치들로 쉽게 눈이 가지 않던 기존 아파트관리비고지서를 개선하고자 한 프로젝트로 지경부의 궁극적 목적은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에 받아도 기분이 별로이고, 확인하기 꺼려지는 고지서가 아니라 보고 싶고, 갖고 싶은 고지서를 만들자는 것이 프로젝트의 키(Key)가 되었다. 앞서 얘기한 서비스디자인 방법론에 따라 리디자인된 고지서는 레드, 그린, 옐로우카드로 구성된다. 에너지 사용량이 많을 때는 레드카드, 보통일 땐, 옐로우카드, 절약을 했을 때는 그린카드로 고지서가 배달되는 것이다. 또한 지난달 대비 에너지 사용량 등 꼭 필요한 수치만 보기 쉽게 전달하는 정보디자인으로 주민들로 하여금 다음달의 에너지 소비량을 줄일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 프로젝트는 지난해 1월~3월 삼성동의 한 아파트를 대상으로 적용되었는데, 그 결과 10%의 에너지 절감효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민간부분에서는 혁신적 서비스개선을 필요로 했던 미국, 유럽의 글로벌기업들이 서비스디자인을 전략적으로 도입하면서 확산된다. 일례로 미국 철도회사 앰트랙(Amtrak)을 들 수 있다. 1999년 그들은 미국 북동부를 운행하게 될 새로운 고속열차 ‘아셀라’의 객실디자인을 IDEO에게 의뢰하게 된다. IDEO는 열차를 타기 전의 경험에서 사용자가 기분이 상하거나 문제가 생겼다면 객실의 분위기를 아무리 바꿔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고객과 함께 기차 여행하는 것으로 문제 해결을 시작했다. 이 과정을 거쳐 IDEO는 전체 여행에 있어 사용자는 10단계의 경험을 거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중 열차 좌석에 앉게 되는 것은 8단계에서나 이뤄지는 행위로 예매과정, 역으로 가는 단계, 역사 내에서의 지루함 등 이미 열차를 타기 전 과정이 사용자들에게 불편하다는 것을 짚어낸다. 이에 IDEO는 단순히 객실 내 디자인뿐만 아니라 예매시스템, 안내소, 대합실, 직원근무공간 등 고객이 여행을 하는 모든 과정에 있어 기분 좋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디자인을 제안하게 된다. 열차가 아니라 여행을 디자인 한 것이다.
또 하나의 사례로는 역시 IDEO가 개발한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신개념 저축예금서비스 ‘Keep the Change(잔돈은 넣어두세요)’다. 이 서비스는 신규고객 유치를 목적으로 시작되었고, IDEO는 발견의 과정에서 사람들이 현금을 쓰고 남은 동전을 상당히 귀찮아한다는 행위에 주목했다. 이에 잔돈이 자동으로 저축구좌로 들어가는 직불카드를 내놓게 된다. 예를 들어 4달러 50센트의 샌드위치를 사면 달러단위로 반올림되어 5달러가 결제되고 50센트는 저축되는 식의 시스템이다. 이 프로젝트로 BOA는 2005년 첫 해에만 250만개, 총 1,500만개의 신규 계좌가 개설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된다. 특히 가입한 사람들 중 98%가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경험 중심의 서비스디자인이 가진 힘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위의 대표적인 몇 가지 사례들 외에도 서비스디자인은 그 방법론으로 의료, 경영, 유통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서비스디자인은 인간중심적 접근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킨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경험을 통합적인 관점에서 디자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앞에서 서비스산업 시대의 디자인은 ‘가치’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비즈니스적 가치든, 사회 공익성 가치든 서비스디자인은 보다 사람들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방법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은 자연스럽게 범세계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진다. 바로 '디자인의 새로운 역할' 두 번째 이야기로 하게 될 지속가능 한 사회를 위한 디자인,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이다.
관련정보 참고링크
쓸만한 웹(서비스디자인 관련 정보 카페) http://usableweb.co.kr
디자인카운슬 http://www.designcouncil.org.uk
Dott Cornwall(2011년 진행된 Dott 캠페인) http://www.dottcornwall.com
IDEO http://www.ideo.com
:DOMChttp://www.playdomc.com
* 디자인으로 사는 세상(기획: 정소익 도시매개프로젝트 소장)은 구 서울역사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284'에서 진행하는 ‘카운트다운’ 프로젝트의 강연 프로그램이다. 디자인, 건축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디자인과 건축의 역할은 무엇인가. 또 이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단순히 ‘디자인 만들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학적인(interdisciplinary) 방법, 다각적인 대상과 연동하는 디자이너와 건축가들과 함께 이들이 어떻게 과거와 현재 사이의 사회, 디자인, 도시의 변화를 읽고 있는지 들어 본다. 또한 공유, 소통, 참여, 자발적 움직임 등과 같은 오늘날의 주제에 대해 이들이 디자인을 접목시키는 방식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강연은 지난 2011년 12월 6일 종료되었고, 매거진정글에서는 주요 강연에 대한 리뷰를 몇 차례 연재를 통해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