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5-18
일러스트레이터 ‘그리다’는 작년 10월 엄마가 됐다. 조금은 낯선 준이 엄마로 새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여전히 그녀는 ‘그림 그리는’ 그리다이다.
Part 1. 1년차 엄마 장혜원
초보 엄마 장혜원이 <괜찮아 나 여기 있어>라는 제목의 드로잉북을 출간했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라는 말은 아기가 엄마한테 하는 말로,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배 속의 아기가 엄마를 위로해주는 듯한 느낌의 표지 드로잉과 딱 맞아 떨어진다. 이쯤에서 눈치챘을 수도 있는데, 이 책은 임신 드로잉이다. 그녀는 배 속에 생명을 품었던 경이로운 경험을 날것의 드로잉으로 생생하게 전달했다.
“임신을 하고 매일매일 변하는 제 몸과 마음이 너무 신기했어요. 열 달 동안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거의 매일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다. 이 놀라운 경험을 그림으로 남겨 놓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흐린 잔상으로 남아 있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드로잉을 그리는 데는 대략 30분 정도가 걸렸다. 아이디어는 생각날 때마다 카카오톡 채팅으로 보내놓고, 나중에 노트에 그걸 옮겨 적는다. 그리고 짬이 날 때 본격적으로 연필 드로잉과 펜 터치 작업을 한다.
“드로잉 스타일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거칠고 솔직하면서도 풋풋한 느낌을 좋아해요. 그런데 요즘은 깔끔하고 달달한 그림이 많더라고요. 이번 드로잉은 둘의 조율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오히려 거칠고 날것 그대로의 드로잉이라서 그녀의 감정과 느낌이 더욱 생생하게 전달된다. 특히 책의 후반부 진통과 출산에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드로잉은 빛을 발한다. 10톤 트럭이 배를 밟고 지나가는 느낌, 사시미 칼이 배 속에서 믹서기처럼 돌아가는 느낌, 배가 빨래처럼 쥐어 짜이는 느낌이 너무나 생생해서 내가 다 아플 지경이다. 마냥 예쁘고 깔끔하기만 한 그림에서는 결코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 책을 읽은 독자에게 바라는 점은 무엇일까?
“우선 임신을 하신 분들은 이 책을 통해 출산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조금은 떨쳐냈으면 좋겠어요. 또한 생명이 생명을 품는다는 건 무척이나 찬란한 일이기 때문에, 이 기간을 되도록 즐겁고 특별하게 보내기를 바라요. 임신 전인 분들은 이 책을 하나의 설레는 예습서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art 2. 7년차 일러스트레이터 그리다
그런데 사실 1년차 엄마 장혜원은 7년차 일러스트레이터 ‘그리다’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서 만화창작을 전공하고, 상명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과 출판만화를 복수전공한 그녀는 그림 외길만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로 잡지 일러스트를 많이 그렸는데요. 초창기에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라는 잡지에서 개최한 일러스트레이션 콘테스트에서 운 좋게 1등을 하면서 잡지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당시의 편집장님과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함께 일을 하고 있고요.”
실제로 <GQ>, <나일론>, <마리끌레르>, <인스타일> 등 다수의 잡지에서 통통 튀는 그녀만의 색깔이 담뿍 담긴 일러스트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그리다’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홍대 앞 북카페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그리다꿈’이라는 카페가 아닐까 싶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리다꿈’의 로고와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부 담당했으며, 그리다꿈의 디자인 실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참고로 ’그리다’라는 그녀의 필명과 카페 ‘그리다꿈’은 100% 우연의 일치였다고 한다.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다. 이제 그녀는 개인 작업에 더욱 집중하려고 한다.
“개인 작업으로 ‘로맨틱 고스트’와 ‘사화집(생각하는 꽃)’ 시리즈가 있는데요. ‘로맨틱 고스트’는 귀신을 통해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그리는 작업이에요. 그림 속 귀신은 중국어 열풍을 꼬집기도 하고, 잦은 공사로 추억마저 사라져버린 홍대-합정 일대를 바라보며 눈물짓기도 하죠. 단, 주제가 조금 무거운 편이라, 스타일은 밝고 귀엽게 잡았어요. 반대로 ‘사화집’ 같은 경우는 소재가 보기만 해도 예쁜 꽃이라서 스타일은 실험적으로 표현해요. 우울한 저의 감정을 집어 넣기도 하고요.”
앞으로는 스스로 더 좋아하는, 본인을 더 나타낼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최근 지켜야 하는 계획이자 이루고 싶은 꿈이 생겼다. 단기적으로는 이번 드로잉의 후속편인 육아 드로잉을 시작하는 것이고, (이미 시작했다.) 장기적으로는 ‘치열하게 살아남는 것’이다.
“엄마가 됐잖아요. 제가 엄마가 됐다는 사실은 저의 모든 삶을 통째로 바꿔 놓을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돼요. 주변에 육아 때문에 그동안의 커리어를 다 놔버린 경우가 많은데요. 물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요. 하지만 저는 제 작업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해요. 작업자로서의 영혼을 잃지 않는 것, 제가 말하는 치열함이란 바로 그런 거예요.”
에디터_ 추은희(ehchu@jungle.co.kr)
이미지제공_ 그리다(http://그리다.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