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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몰입의 시간, 영감의 공간

2013-03-05


현대카드. 금융회사다. 일단 디자인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업종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찍이 디자인을 꺼내들었다. 왜였을까? 여기에는 현대카드 스스로가 답을 한다. 자신들은 단순한 금융회사가 아니라 고객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기업이라고. 다시 말해 ‘고객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란다. 카드가 현대인들의 생활 필수품이 된 세상에서 그럴듯한 포장이다. 디자인을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새로운 삶의 방식과 의미를 만들고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설명이기도 하다. 라이프스타일 디자이너를 표방한 이상 현대카드와 디자인은 필연적인 관계가 될 수 밖에 없었겠다. 그래서인지 현대카드가 그간 진행해 온 일련의 디자인을 들여다 보자면, 참 볼수록 넘치는 매력을 이 회사에서 느낄 수 있다. 기업이 디자인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 지, 마치 풀기도 전에 미리 펼쳐보는 답안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항상 디자인계에 ‘아!’라는 감탄사를 던져주기도 했다. 일단 현대카드의 디자인은 멋지고, 재미있고,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기업서체도 그랬고, 카드 디자인도 그랬고, 광고도, 웹사이트 디자인도 그랬다. 이만하면 하나의 브랜드를 이끌어가는 디자인 마케팅 솜씨가 여간 수준급이 아니라고 할 수 없었고, 현대카드가 들고 나오는 디자인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였다. 그랬던 그들이 최근 또 하나의 이야기를 가져왔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아!’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도서관을 들고 나온 것이다. 디자인 도서관이라니, 이 어찌 멋진 아이디어가 아닐 수 있을까.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Hyundai Card Design Library)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료제공 | 현대카드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종로구 가회동에 자리한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있는 이 동네는 주변 도심지와는 달리 빨리 걷던 발걸음도 느려지는 듯한 넉넉한 여유가 흐르는 곳이다. 여전히 늘어서 있는 근대 한옥들과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이 아날로그적 감성을 진하게 풍겨내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네 풍경은 도서관이라는 공간과도 사뭇 조화를 이룬다. 디지털 시대에 손때가 묻은 ‘책’을 담은 공간이니 그 또한 충분히 아날로그적이니 말이다. 그러나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의 건축적 면모를 보자면, 아날로그의 감성만을 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공존에 가깝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과거와 현대, 헌 것과 새 것. 모던한 건물 위로 한옥의 사랑채를 들인 모습만 봐도 바로 이 ‘공존'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쉬이 느낄 수 있다. 이런 장면들은 도서관의 의미와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도서관 역시 과거와 현대의 지식이 공존하는 공간이니 말이다.

‘공존’ 속에서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빛을 담아낸다. 중정을 두어 빛을 모으고, 그 중정을 중심으로 마주한 ‘ㄷ'자형 건물은 전면 유리창으로 모은 빛을 공간 내부로 한껏 끌어들인다. 카페와 전시공간이 놓인 1층, 서로 다른 성격의 서가가 놓인 2,3층 등 총 3개층으로 구성된 건물은 빛으로 충만한 공간으로 채워진다. 그러면서도 자연광에 취약한 책의 보존을 위한 장치도 놓치지 않았다. 미리 계산한 빛의 각도에 따라 서가를 한걸음 뒤로 세운 것이다. 덕분에 빛의 공간은 한걸음의 여유까지 포용한다.

가회동을 거닐다 이 곳을 들른다면, 좁은 골목길을 거닐던 느린 발걸음이 도서관 내부로 공간에서도 이어짐을 느낄 수 있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목적지를 향한 일직선의 움직임이 아닌 책을 찾아 마치 하나의 산책을 하는 듯한 동선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린 중정을 지나 입구의 홀과 좁은 통로를 통해 2층에 오르면 다시 전면 유리를 통해 시원하게 열린 풍경이 드러나는 식의 긴장과 이완이 산책길의 기분과 꼭 닮아있다. 여기에 공간이 들어서 있는 구성도 한국적 건축 형태와 궤를 같이 한다. 우리 건축에서 집은 하나의 공간이 아닌 작은 공간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에서도 그것과 비슷한 모습의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2층에는 집의 형상을 한 공간 속의 공간, ‘집 속의 집'이 자리한다. 이 공간은 조용히 책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우리 건축으로 치자면 ‘안채’의 성격과 비슷해 보인다. 그 건너편에는 거대한 철판으로 책상을 만든 서재가 놓인다. 중정이 바로 보이는 풍취있는 공간으로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이 역시 우리 건축과 비교하자면 여기는 ‘사랑채'쯤 되겠다. 2층 서재를 지나쳐 3층에 오르면, 마치 다락방과 같은 공간인 ‘기오헌(奇傲軒)’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오헌은 창덕궁 후원 옛 세자의 공부방 전각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큰 야망을 갖되, 겸손하라'는 겸양의 정신을 담은 공간이다. 그 뜻에 맞게 이 작은 방은 외부의 풍경을 작은 프레임의 창으로만 허용, 다른 열린 곳과는 달리 정제되고, 몰입되는 사유의 공간으로 자리한다.

우리 전통의 모습은 공간 구성뿐만 아니라 도서관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서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양 끝이 판으로 닫혀있지 않은 한국 전통의 서가의 특징을 고스란히 이어 받은 모습이다. 다른 것이라면 목재 대신 스테인리스 판이 쓰였다는 점이다. 스테인리스의 차가운 금속성은 나무를 덧대어 중화시켜 전통과 현대의 절묘한 조화를 서가 디테일에서도 놓치지 않았다. 또한 서가는 수평판에 세워진 수직판을 조금 뒤로 물러나게 하여, 무엇보다 책이 꽂힌 장면을 돋보이게 했다. 서가는 책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를 감추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도서관의 본질적 측면에서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한번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문제다. 겉모습만 번지르르 하고, 진짜 지녀야 할 본질을 놓치고 있다면, 그곳의 생명력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겉모습이야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한번 익숙해지고 나면 ‘평범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테니 말이다. 아직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리기에 이른 시점일지도 모르지만, 일단 준비된 상태로만 보면 기대 이상의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듯 싶다. 우선 11,000권이 넘는 방대한 양에서부터 기대 이상이다. 그것도 현대카드가 스스로 정한 큐레이팅 원칙에 철저하게 부합되는 책들로만 모여있다. 그들이 정한 큐레이팅 원칙은 7가지로 다음과 같다.

“영감을 주거나(Inspiring), 문제의 답을 제시하고(Useful), 다양한 범위를 포괄해야(Wide-ranging) 한다. 또,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Influential), 그 한 권으로 충실한 컨텐츠를 담고(Through) 있어야 한다. 더불어 심미적인 가치의(Aesthetic) 시대를 초월한(Timeless) 책이어야 한다.”

이 원칙을 만들기 위해 현대카드는 국내 도서관은 물론이고 유럽,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 내 주요 도서관의 소장도서 선정 절차를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또한 디자인 박물관과 협회 및 관련 학제 기관의 분류표까지 꼼꼼히 점검했다. 1년 여에 걸친 이 과정에는 현대카드 전담팀과 저명한 북 큐레이터, 뉴욕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파올라 안토넬리(Paola Antonelli)의 조언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이 힘을 더했다. 이렇게 모인 도서들은 그 방대한 양도 양이지만 70%정도가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서적들로 구성되는 등 희귀성에서도 놀라움을 전해준다.

11,000여권의 방대한 책을 구분하는 카테고리에서도 현대카드다운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그들은 카테고리 자체로도 디자인에 대한 영감과 자극을 줄 수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총 14개로 구분된 카테고리에는 디자인 분야는 물론이고 디자인 비평과 오가닉 디자인 등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만의 독특한 카테고리도 마련되어 있다. 또한 현대카드 디자인에 영감을 준 책들을 별도로 묶은 ‘디자이너북', 소량 인쇄 되었거나 절판된 책, 혹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2,700여권의 책을 선보이는 ‘희귀본 컬렉션'도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수 없는 이곳만의 독창적 카테고리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 더 소개하자면, ‘정기간행물' 카테고리도 눈길을 끈다. 창의적인 매거진과 정기간행물로 구성된 이 섹션에서는 국내 최초로 ‘LIFE’매거진과 70여 년 역사의 인테리어 전문지 ‘domus’의 전 컬렉션을 만나 볼 수 있다. 각 컬렉션의 도서 선정 과정에는 2012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공동 수상한 건축 비평가 저스틴 맥거크(Justin McGuirk, 건축&산업디자인 분야)를 포함한 글로벌 전문 북큐레이터들이 참여해 객관성과 전문성을 더했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도서관은 가장 아날로그적인 공간 중 하나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과 PC 등 디지털 온라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책들이 모여 자아내는 오래된 냄새는 점차 멀어져 가는 기억이 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는 이런 현대인들에게 작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잠시 온라인 접속에서 벗어나 아날로그적 즐거움에 다시 한번 빠져보라고. 가회동이라는 빠름이 아닌 느림이 우선 되는 동네에서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디자인을 즐겨보라고. ‘책'과 ‘디자인', 그리고 멋들어진 ‘공간'의 만남. 지루한 일상의 무게가 느껴진다면, 잠시 나마 가벼운 마음으로 가회동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곧 있으면 다가올 따뜻한 봄 햇살과 함께.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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