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21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 리조트에 자리한 한솔뮤지엄이 장장 7년여간의 준비를 마치고 지난 5월 16일 개관했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 자작나무의 수려함과 패랭이 꽃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나는 산책로, 해발 275m 아래 펼쳐지는 강원도 천혜의 자연 경관, 그리고 이들을 품고 있는 하늘과 물.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산상에 위치한 한솔뮤지엄은 그냥 걷기만 해도 ‘힐링'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일까, 이 자연의 뮤지엄이 표방하는 모토도 ‘슬로우(Slow)’란다. 바쁜 도시에서 벗어나 잠깐의 쉼표를 찍는 공간. 자연과 인간, 예술이 어우러진 치유의 공간, 한솔뮤지엄을 천천히 산책하듯 둘러본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사진제공 | 한솔뮤지엄(http://www.hansolmuseum.org)
대지 22만평, 한솔뮤지엄의 광대한 공간은 700m의 길이의 늘어져 있는 형태로 놓여있다. 덕분에 산책하듯 걷기에는 좋다. 길을 따라 자연과 건축, 그리고 예술을 있는 그대로 즐기면 된다. 차근차근 걷는다 치면 관람거리는 약 2.3km, 뮤지엄을 전부 둘러보는데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느림의 미학이 담긴 뮤지엄의 여정은 웰컴센터에서 시작된다.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인 이곳은 주차장과 세미나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웰컴센터를 지나면 하늘과 맞닿은 연분홍 패랭이꽃 들판이 널찍이 눈에 들어온다. 패랭이 꽃이 전해주는 봄 향내와 함께 미국의 조각가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의 작품, ‘For Gerald Manley Hopkins’ 가 반겨주는 이 곳은 플라워가든(Flower Garden). 약 180그루의 하얀 자작나무가 내어주는 상쾌한 길로 이어지는 플라워가든은 이제 막 뮤지엄 여정을 시작하는 이들의 발걸음을 산뜻하게 풀어준다. 플라워가든을 지나 꺾어지는 돌담을 지나면 워터가든(Water Garden)을 앞세운 뮤지엄 본관이 육중한 자태를 드러낸다. 알렉산더 리버만(Alexander Liberman)의 1997년작, ‘Archway’가 문지기를 자처하고 있는 워터가든은 뮤지엄과 주변 자연, 하늘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또 하나의 세상을 수면 위에 그려 넣는다.
이처럼 첫 눈에도 장관인 뮤지엄 본관 입구의 장면은 돌담으로 가려졌다 한 순간에 나타난다. 경치를 숨겼다 내보이는 ‘장경기법'으로 안도의 건축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다(물론 안도만의 방식은 아니다). 뮤지엄 외관은 파주석으로 쌓아 올린 벽으로 둘러싸인다. ‘안도 타다오'하면 곧 떠올려지는 노출 콘크리트는 내벽으로 세워진다. 파주석의 외벽은 지붕과 사이가 벌어져 있는 모습이다. 건물 내부 복도에서 보면, 이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간접 조명을 대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벽은 그냥 껍데기처럼 서있을 뿐, 실제 건물을 지지하는 것은 노출 콘크리트의 내벽이다. 뮤지엄 본관의 공간은 비정형의 기하학적 형태로 길게 늘어진 구성을 취하고 있다. 건물과 맞닿은 외부의 수경 공간과 더불어 사선의 꺾임으로 드러나는 예각의 날카로움, 건물 중앙에 놓인 삼각형의 내부 정원 등 안도가 자주 사용하는 건축 어휘들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개관기념전, ‘A Moment of Truth(진실의 순간)’가 열리고 있는 뮤지엄 본관은 페이퍼갤러리와 청조갤러리로 구성된다. 종이의 역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페이퍼갤러리는 한솔그룹이 지난 1997년 세웠던 ‘한솔종이박물관'을 전신으로 한다. ‘한솔종이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종이박물관으로 개관 이래 다수의 지정 문화재와 다양한 공예품 및 전적류를 수집, 보존해왔던 곳이다.
페이퍼갤러리는 다시 4개의 테마로 나뉜다. 종이(紙), 가지다(持), 뜻(志), 이르다(至)의 의미를 가진 4가지 ‘지'가 각 테마의 주제다. 먼저 ‘종이를 만나다’라는 부제가 달린 ‘紙’에서는 종이의 탄생 전후의 이야기가 담긴다. 종이의 탄생과 전파 과정, 그리고 우리의 한지 제작 기술 등이 각종 유물과 시각 자료로 선보여진다. 두 번째 테마, ‘持’의 부제는 ‘종이를 품다'로 지승, 지장, 지호, 전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종이 공예품들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세 번째 ‘志’는 ‘종이에 뜻을 품다’라는 주제의 테마다. 이곳에서는 고려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이자 국보인 ‘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권36’을 비롯하여, 선조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전적(典籍)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종이에 이르다'라는 이야기로 펼쳐지는 마지막 테마 ‘至’에는 독일의 설치예술그룹인 ‘ART+COM’의 작품, ‘The Breeze’가 놓여있다. ‘The Breeze’는 마치 먹물 방울과도 같은 형상으로 떨어지는 ‘빔'이 물결치는 종이 위에 ‘뿌리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묄세’라는 용비어천가의 한 구절을 써내려가는 과정을 관람객들이 직접 실행해 볼 수 있는 체험 작품이다. 이상의 4가지 주 테마 외에 페이퍼갤러리에는 종이 발명 이전의 기록 매체였던 파피루스(Papyrus)를 관찰할 수 있는 ‘파피루스 온실'과 관람객들에게 직접 판화의 경험을 제공하는 ‘판화공방'도 마련되어 있다.
페이퍼갤러리가 박물관의 성격을 가졌다면, 청조갤러리는 순수 미술관이라 볼 수 있다. ‘청조'는 한솔그룹 창업주인 이인희 고문의 호에서 따온 이름으로 갤러리 콜렉션의 대부분은 이 고문이 40여 년간 수집한 소장품들이다. 청조갤러리 역시 4개의 방으로 구성되며 김환기, 박수근, 이쾌대, 이중섭, 백남준, 장욱진, 도상봉, 권진규 등 20세기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회화, 판화, 조각, 비디오아트 등 100여 점의 작품이 각각 나뉘어 전시된다. 특히 5.2m 높이의 타워에 TV모니터와 탈을 결합시킨 백남준의 ‘커뮤니케이션 타워’는 시공간의 제약 없는 소통의 의미을 담아내며, 한솔뮤지엄을 대변하는 상징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뮤지엄 본관의 개관기념전은 내년 2월 28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뮤지엄 본관을 나오면 조지 시걸(George Segal)의 조각 작품, ‘Couple on Two Benches’가 관람객들을 마중한다. 그리고 그 뒤로 신라 고분을 모티브로 한 스톤가든(Storn Garden) 자리한다. 9개 스톤마운드가 주는 부드러운 돌의 곡선 느낌이 더해진 이곳의 자연은 앞서 만났던 플라워가든과는 사뭇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꼬불꼬불한 스톤가든의 길을 지나면, 한솔뮤지엄 측 스스로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제임스터렐관이 숨은 자태를 살포시 드러낸다. ‘빛과 공간의 예술가'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터렐의 작품들은 공간에 투영된 빛을 활용하는 특성으로 넓은 공간이 필요한 반면, 작품을 느낄 수 있는 수용 인원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퍼블릭 미술관으로서는 터렐의 작품을 수용하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터렐의 대표작들인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 호라이즌(Horizon), 겐지스필드(Ganzfeld), 웨지워크(Wedgework) 등 4개나 되는 작품을 한번에 공개한다니, 뮤지엄측의 자랑일 만도 하다. 터렐의 4개 작품이 한 곳에서 대중들에게 공개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제임스터렐관 역시 ‘진실의 순간’을 주제로 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이 과연 모두 진실일까. 터렐의 ‘빛’은 실제와 허상을 넘나들며, 관람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돔 형태로 천장에 5mx4m 타원형 구멍이 뚫려 있는 스카이스페이스는 빛으로 하늘의 진실을 감춘다.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하늘의 색은 주변 벽에 스며드는 조명 빛에 따라 파랗게 보이기도 하다가, 갑자기 보라빛으로 물들기도 한다. 조명 빛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인지 되는 하늘. 어느 것이 진짜 하늘인지 관람객의 눈으로는 알 수 없다. 특히 해가 완전히 질 때, 하늘이 순간적으로 검게 물드는 모습은 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이다. 스카이스페이스 옆 공간 호라이즌에는 하늘과 연결되는 황홀한 계단이 놓여있다. 호라이즌은 스카이스페이스의 수직 버전이라 보면 되는데, 계단을 통해 바깥 하늘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사각형의 구멍 크기는 터렐이 직접 정한 것인데, 그는 관람객들에게 딱 그 만큼의 하늘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어 겐지스필드에서는 빛의 산란이 공간의 진실을 가린다. 두 개의 광원에서 투영된 빛의 퍼짐은 마치 안개 속을 헤매이는 듯한 기분을 전달한다. 관람객들은 안개 속에서 공간 깊이감에 대한 판단마저 흐려지게 된다. 웨지워크는 우리의 시각이 암흑을 거쳐 빛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극적인 환영을 선사한다.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질흙같은 어둠의 길을 조심스럽게 지나 눈 앞에 드러나는 빛의 공간은 마치 또 다른 차원의 세계인 양 이질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제임스터렐관을 마지막으로 한솔뮤지엄이 마련한 프로그램은 마무리 된다. 하지만 관람객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다시 돌아가는 길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 100여점의 한국현대미술, 해외유명작가들의 야외조각, 그리고 제임스 터렐 등 한솔뮤지엄의 볼거리를 숨 가쁘게 둘러봤다면 가는 길에는 좀 더 자연의 바람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시간만 맞는다면 뮤지엄의 멋진 야경도 선물로 안겨 받을 것이다.
한솔뮤지엄의 입장료 및 기타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http://www.hansolmuseum.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