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6
불과 2일 차에 접어들었을 뿐인데 눈에 띄게 일사불란해졌다. 첫날 오리엔테이션 및 자리 배치로 다소 어수선했던 현장의 인원들은 프로그램 시작과 동시에 본격적인 프로젝트 작업에 들어갔다. 성재혁 멘토(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교수)와 15인의 멘티는 전날 제출한 과제들을 놓고 오전부터 크리틱을 벌이고 있었다. 성 멘토의 커리큘럼 주제는 ‘스타일 연습’. 프랑스 문학의 거장 레몽 크노의 작품 〈문체 연습〉(Exercises in Style, 1947)에서 제목을 빌려 왔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흔히 생각하듯 의미는 고정된 대상이고, 형식은 의미를 담는 그릇일 뿐일까? 〈문체 연습〉은 레몽 크노의 유작 가운데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문체 연습〉에서 레몽 크노는 하나의 내러티브에 99가지의 형식을 적용한다. ‘주인공이 ‘S 버스’에서 두 시간 동안 겪는 해프닝’이라는 단순한 스토리는 서정시, 타이포, 분석, 논리적으로 접근하기, 제삼자의 눈으로 보기 등 각기 다른 형식을 입고 반복 변주된다. 레몽 크노의 문학적 실험은 의미를 변화시키는 형식의 힘을 보여준다.
실상 의미는 형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표현 양식에 시각적 요소가 결부된다면 더욱 그렇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을 목적으로 제작되는 디자인에서 스타일은 메시지 전달의 매개체로 역할 한다. 시각예술 분야만 해도 이미 수많은 하위 장르를 보유하고 있지만, 개별 아티스트의 다양성은 장르라는 가지 안에서 또 한 번 스타일을 세분화시킨다. 클라이언트 혹은 소비자의 니즈를 만족시키는 일이 디자인의 과업일지언정, 디자이너의 스타일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근본적인 색깔처럼 결과물에 묻어나게 마련이다.
‘스타일 연습’은 디자이너를 위한 일종의 스타일 훈련 프로젝트다. 성재혁 멘토는 디자이너라면 응당 자신만의 스타일을 인지해야 한다는 기조 하에 제법 까다로운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캠프 첫날, 멘티 3~4명으로 꾸려진 총 4개 팀은 성 멘토가 쓰고 있던 마술사 모자 속에서 키워드를 무작위로 추첨했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두 개, 명사 두 개. 미션의 단서다. 각 팀은 네 개의 키워드를 조합하여 하나의 문장을 지어낸 후, 해당 문장에서 연상되는 음악 장르에 적합한 시각적 콘텐츠를 포스터 형태로 구현하게 된다. 개별 팀원은 각자의 직관에 따라 자율적으로 미션을 해석할 수 있지만, 익일에는 자신의 작업물을 다음 팀에 넘기고 다른 팀이 작업하던 미션을 이어받아 자신의 음악 장르와 스타일을 덧씌워야 한다. 예를 들면, ‘박근혜’와 ‘샤머니즘’을 엮은 문장에서 도출된 인디 음악 포스터는 다음 날 다른 디자이너에 의해 EDM 포스터로 변신한다. 이 같은 릴레이 재작업 과정을 나흘 동안 반복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인당 4장, 총 60개의 포스터가 완성될 것이다. 캠프 마지막 날엔 이 60장의 포스터 전부를 전시한다.
‘스타일 연습’의 분위기는 전날 살펴봤던 크리스 로 팀과는 사뭇 달랐다. 크리스 로 멘토가 크래프트맨십(craftsmanship)을 상실한 디지털 시대 디자인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직관’을 강조했다면, 성 멘토의 수업은 ‘로직(logic)’에 무게를 싣고 있기 때문이다. 성재혁 멘토는 대개 반목과 불통으로 묘사되곤 하는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의 관계에 새로운 인사이트를 제시하고자 한다. 성 멘토에 의하면 클라이언트는 ‘설득’의 대상이 아닌 ‘소통’의 대상이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감각적이거나 감성적인 태도로만 디자인에 접근한다면 클라이언트와는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클라이언트는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전문가의 의도를 전문적인 시각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직무라면, 디자이너는 당위성을 바탕으로 목적을 잘 달성하였음을 클라이언트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이로써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는 수월하게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오전 크리틱 세션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 신호등의 멈춤 신호는 왜 빨간색인가? 예를 들면, 몸을 다쳐서 보니 붉은색 피가 흘러나오더라. 이러한 경험이 축적되면서 빨강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색으로 굳어졌을 수 있다. 비상구 표지는 왜 녹색인가? 녹색은 빨강의 보색이다. 화재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이라는 기능성을 기반으로 선택된 것이다. 이렇듯 디자인에는 직관과 감성뿐만 아니라 논리, 상징, 과학도 있다. 디자이너가 그저 ‘내 눈에 보기 좋아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디자인을 설명한다면 얼마나 많은 클라이언트가 동의할 수 있을까? 그 역시 “내 취향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면 그만이 아닌가?”
성 멘토는 디자인의 스타일과 내용은 자의적이기보다 합리적으로 관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호학적인 관점이 돋보이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이미지 기호학을 깊이 있게 다루기에 6일 과정은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이에 성 멘토는 새로운 방향에서 디자인에 접근하고, 생각할 거리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나가는 데 커리큘럼의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주어진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작업은 이미 많은 디자이너가 익숙하게 느끼는 방식이다. 이와 달리, ‘스타일 연습’의 멘티들은 기존의 시각체계라는 소스에 시각적인 재작업을 가하게 된다. 변주와 자기화 과정을 통해 로직을 훈련하고 스타일을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오전에는 공개 크리틱을 진행하고, 점심 식사 후에는 작업에 매진하는 것이 ‘스타일 연습’의 하루 일과다. 성 멘토는 멘티들의 작품을 돌아보며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멘티들은 노트북을 들고 자문을 구하러 오기도 하고, 멘토의 조언을 묵묵히 노트에 받아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때로는 성 멘토에 맞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보려는 시도들도 있었지만, 성 멘토의 통찰력을 당해내기가 쉽지 않다. 매일 한 장의 포스터를 완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언어, 음악, 디자인 간의 인터랙션을 성취해야 하는 ‘스타일 연습’의 커리큘럼은 빡빡해 보이지만 생각만큼 큰 스트레스는 없다고 한다. 성 멘토가 팀을 살펴보면서 중간중간 “완성도에 집착하지 마라. 러프해도 상관 없다”고 상기시키는 덕분인 듯했다.
성재혁 멘토는 작업에만 몰두하는 심각한 분위기가 못 미더웠던지, 커리큘럼 상에 없던 미션을 즉흥적으로 추가하기도 했다. 바로 크리스 로 멘티들의 타이포그래피 작품 중 하나를 택해 그 조형을 포스터에 반영해 보라는 것. ‘스타일 연습’ 팀에서는 캠프 참가자 간 커뮤니케이션과 새로운 영감을 위해 급조된(?) 이 미션을 ‘옆 반 테러’라고 부른다. 다음 날은 크리스 로 팀에 이어 오디너리 피플 팀 테러를 고려중이라나.
번외 리포트_ 디스 이즈 컴피티션!
디자인 캠프는 캠프장인 토탈 미술관 지하 2층과 지하 1층의 캠프 데스크를 연결하는 사이 공간에 빈백 소파와 닌텐도 wii를 비치, 프로젝트에 지친 멘티들이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놓고 있다. 그러나 첫날의 어색함 때문인지 인기척 없이 덥기만 하던(?) 휴식 공간에 오늘은 오디너리 피플이 난입했다. 캠프장 내 울려 퍼지는 고함과 웃음소리에 계단을 올라가 보니 오디너리 피플의 강진 디자이너와 이우녕 대표가 검도 시합을 벌이고 있었다.
오디너리 피플의 승리와 함께 경합은 한때 소동으로 끝나는가 하더니, 이내 디자인 캠프 공식 아이스크림 배(杯) 닌텐도 wii 대회가 조직됐다. 팀당 한 명의 대표를 선출, 3판 2승제로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패배 팀 멘토는 승리 팀의 전 구성원에게 아이스크림을 제공하기로 했다. 출전 대표들은 프로젝트 작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신속하게 선정됐다. 김지후(이준혁&한명수 대표, 체육부장), 하유리(성재혁 대표, 닌텐도 위 보유자), 윤지원(크리스 로 대표, 닌텐도 위 경험자), 장영웅(오디너리 피플 대표, 이름값 하러 나옴)이 바로 그들. 아이스크림을 염원하는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지원 교수의 사회로 경기가 시작됐다.
경쟁 종목은 날아오는 아이템을 타이밍에 맞춰 올바른 방향으로 베는 것이 포인트로, 상당한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 게임이었다. 첫 번째 라운드에서는 닌텐도 위 경험자와 무경험자의 대결, 즉 크리스 로 vs 오디너리 피플의 매치가 이뤄졌다. 쑥스럽게 플레이를 시작한 두 사람 가운데 먼저 승기를 잡은 것은 크리스 로 팀의 대표로 나선 윤지원 멘티. 장영웅 멘티는 높아지는 응원과 탄식 소리에 당황한 듯하더니, 2회전부터 뒷심을 발휘하는 발군을 보이며 스코어를 올리기 시작했다. 막상막하의 결전 끝에 승리를 거둔 주인공은 김영웅 멘티. 크리스 로 멘티의 표정은 다소 씁쓸해 보였다.
곧바로 성재혁(대표 하유리 멘티) vs 이준혁&한명수(대표 김지후 멘티)의 경기가 이어졌다. 디자인 캠프 최연소 참가자 하유리 멘티는 가정에 닌텐도 wii를 보유한 숙련자다. 김지후 멘티는 닌텐도 경력은 없지만 서든 어택을 마스터한 건장한 청년. 김지후 멘티가 1회전의 흐름을 주도하며 생각보다 쉽게 1승을 올리자, 하유리 멘티는 “집에 닌텐도 wii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해당 게임은 플레이해 본 경험이 없다”며 변명했다. 그러나 하유리 멘티 역시 2회차부터 심기일전, 최종적으로 김지후 멘티를 누르고 성재혁 멘토링 팀에 아이스크림을 선물했다. 숙련자답게 과장된 모션 없이 침착하게 승점을 거뒀다는 총평이다.
경기 후, 패배자들은 8월 중순의 무더위와 토탈미술관의 가파른 언덕을 헤치고 아이스크림을 공수해 왔다. 그러나 몇몇은 아직 승부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 대부분의 멘티들이 위치로 복귀한 후에도 빈백 소파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