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7
디자인캠프에서 학사 학력 멘토는 본인들 뿐이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확실히 ‘영(young)’ 하기는 하다. 오디너리 피플(Ordinary People)이 지휘하는 ‘반복과 확장’ 프로젝트는 그 공간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포스를 풍긴다. “우리, 오디너리 피플은 다양하고 능동적인 시도, 실험을 통해 보다 나은, 정확한, 효과적인 소통을 도모한다”. 오디너리 피플의 창작 정신을 선언하는 휘장이 눈에 띈다. 작업대에는 작업대 주인들의 셀카와 함께 언제든지 아이디어를 휘갈기듯 메모할 수 있는 낙서판이 걸려 있다. 강진 디자이너가 선별한 애플 라디오 추천 음악(?)이 작업 공간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네 명의 멘토들은 엉뚱하게도 휴식 공간의 빈 백 체어에서 발견되곤 한다.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동기들은 내 작업에 “귀엽다~”는 식의 영혼 없는 한 마디 정도 던지고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워크숍에 참여해 봐도 강연자-학생 혹은 멘토-멘티 이외의 관계 형성은 기대하기 힘들다. 강진, 서정민, 안세용, 이재하, 정인지 디자이너는 부대끼고 다니며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을 하나도 아닌 넷이나 모아 일찌감치 오디너리 피플을 결성했다. 이들을 두고 감히 ‘운 좋다’ 할 이유는 작업 메이트를 만나기가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와 디자인 지망생들에게 소통의 부재는 뜻대로 해결되지 않는 과제다.
크리스 로 멘토의 ‘직관’, 성재혁 멘토의 ‘로직’에 이어 이번에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오디너리 피플의 ‘반복과 확장’은 소통에 갈증을 느끼는 디자이너를 위한 처방전이다. ‘반복과 확장’이라는 주제 자체도 커뮤니케이션과 패턴 사이에 존재하는 교집합을 지시한다. 패턴이 반복 확장 가능한 매체이듯이, 커뮤니케이션의 반복과 확장을 통해 결과물을 끌어내는 것이 오디너리 피플 워크숍의 목표.
거칠게 요약하면 키워드를 이용한 패턴 제작 수업이라 하겠지만, 커뮤니케이션을 유기적으로 결부시킨 작업 프로세스는 꽤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반복과 확장’에서 멘티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를 소스로 삼되, 시선의 거리를 기준으로 ‘내가 생각하는 나’, ‘나와 가까운 사람이 생각하는 나’,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 생각하는 나’의 세 영역으로 범주화된 키워드를 얻을 수 있다. 말만 들어서는 피상적으로 느껴지지만, 오디너리 피플은 ‘짝꿍’ 시스템으로 프로젝트를 수월하게 풀어간다.
캠프 첫날, 멘티 14인은 무작위 추첨으로 두 명씩 짝을 지었다. 짝꿍으로 맺어진 두 사람에게 가장 먼저 주어진 과제는 ‘심층 인터뷰’ 하기. 짝꿍은 서로의 인터뷰이-인터뷰어가 되어 자기 자신을 꺼내 보여주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좋아하고,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 브레인스토밍하듯 ‘나’라는 인간을 공유하다 보면 짝꿍은 제법 친밀한 관계로 발전한다. 인터뷰를 통해 멘티는 자신의 키워드를 개진시키고, 친근한 거리에서 바라본 짝꿍에 대한 키워드도 작성한다. 이와 동시에 각각의 멘티는 누군가의 ‘시크릿 짝꿍’이기도 하다. ‘시크릿 짝꿍’은 마니또 같은 존재로, 거리를 두고 대상을 관찰한 결과를 근거로 키워드를 만들게 된다.
세 가지 시선의 키워드가 모두 취합된 뒤, 멘티는 그중에서 어떤 재료를 골라 무슨 요리를 할지 고민하는 단계로 넘어간다.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키워드를 걸러낼 수는 있지만, 근 이틀간 3인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온 키워드의 양이 워낙 많다 보니 필터링 작업조차 만만치가 않다. 오디너리 피플은 “사람들은 대개 디자이너의 일이 영감, 직관, 아이디어로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디자이너에게는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무슨 소스를 취해 어떻게 활용하는가도 못지않게 큰 문제다. 이 선택 프로세스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며 커리큘럼의 의도를 설명했다.
캠프 3일차, 키워드를 선택 과정을 마친 멘티들은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첫날부터 폼보드와 씨름하던 크리스 로 팀이나 장르 음악 포스터를 제출해야 했던 성재혁 팀과 비교하면 늦은 시작. 프로젝트를 소화하기에 일정이 빠듯하지는 않은지 묻자, 강진 디자이너는 “정말 촉박하다. 천천히 생각하고 싶어도 시간적인 압박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선택’이라는 이슈가 더욱 부각되기도 한다”고 답했다. 이에 다른 팀 멤버들은 “강진 디자이너가 가장 조급해하는 장본인이다. 디자인캠프의 취지에 맞지 않게(?) 새벽 서너 시까지 일하게 만드는 사람”이라고 응수하기도.
오디너리 피플은 기계적으로 강의만 듣고 나가는 워크숍이 아닌,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워크숍을 원한다. 처음에는 멘토 자신들조차 짝꿍 시스템의 효과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인위적인 상황에서 강제로 끌어낸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디너리 피플의 프로젝트는 현재까지 순항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만의 영한 에너지로 멘토-멘티뿐만 아니라 멘티-멘티 간에도 유대감을 형성하며 인간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내고 있다.
오디너리 피플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은 팀이기도 하다. 목표물에 그 정체를 감춰야 하는 시크릿 짝꿍의 특성상, 멘토들은 캠프 첫날 뒤풀이를 자연스러운 관찰 기회로 사용하기로 했다. 당사자들 모르게 시크릿 짝꿍을 옆자리에 심어놓은 것. 그러나 시크릿 짝꿍 키워드를 오픈 하던 날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제출 포맷이나 규격이나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내버려둔 것이 독이라면 독이 됐다. 저마다 자기 개성을 한껏 발휘해 폰트와 레이아웃만 봐도 누가 누군지 눈치챌 정도였다고.
프로젝트 마지막 날, 완성된 패턴은 배지(badge)로 제작될 예정이다. 오디너리 피플은 “워크숍이 끝나면 남는 것 없이 돌아가는 경우도 많지 않나. 그래서 스스로 만든 배지를 기념품 삼아 가져가게 하려고 한다. 우리 팀뿐만 아니라, 500개 정도를 제작해 디자인캠프 전체에 나눠 줄 계획이다. 옷이나 가방에 가볍게 달 수 있어 실용성 있는 아이템이기도 하고, 촉박한 일정으로 제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웃풋이라는 장점 때문에 배지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반복과 확장’이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하는 만큼 작업 공간 내에서도 팀원들이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이 흔히 발견됐다. 이에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한 무리에 다가가 캠프에 대한 생각을 들어 봤다.
Jungle : 오디너리 피플을 멘토로 선택한 이유는 뭔가?
이민경(이하 민): 평소에 오디너리 피플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SNS도 팔로(follow)하는 등 좋아하는 스튜디오 중 하나다. 스튜디오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을 기회라 생각했다.
이동언(이하 동): 마찬가지다. 내가 좋아하는 작업을 만드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기도 했고, 오디너리 피플의 피드백을 받으며 의견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 기대가 많았다.
Jungle : 힘든 점이 있다면?
민: 짧은 시간에 디벨롭(develop) 해내야 된다는 점이 힘들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해온 나에게는 특히 패턴의 단순화 과정이 익숙하지 않다. 일러스트의 경우 훨씬 많은 시각 정보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Jungle : 오디너리 피플이 구상한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은 도움이 되는지?
동: 현재 대입을 포기하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데, 혼자 작업을 하다 보니 한계에 부딪히게 되더라. 작업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은 욕구는 원래 있었다. 간혹 주변에 작품을 보여줘도 ‘예쁘다’는 정도지, 디테일한 피드백을 얻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확실히 동기부여가 된다. 워크숍에 참여한 멘티들의 스타일도 다양해서,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보다 보면 내 사고방식에도 변이가 일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Jungle : 다른 사람이 나를 대상으로 작성한 키워드 중 의외였던 항목이 있다면?
민: 나뿐만 아니라 대체로 시크릿 짝꿍이 보낸 키워드가 의외라는 분위기다. 내가 받은 키워드 중에는 ‘메타-물질’이 있었다. 나는 이미 과학을 포기한 지 오랜데…….(웃음)
동: 치마를 입는 일이 거의 없는데 ‘치마’가 나왔다. 나는 오히려 노숙자 패션 혹은 현지인 패션을 추구한다(웃음).
Jungle : 이제는 시크릿 짝꿍의 정체가 거의 밝혀졌다고 하던데.
민: 맞다. 몇몇 빼고는 다 안다. PPT를 보는데 이름을 대놓고 써놓은 수준이었다. 디자이너는 어쩔 수 없나 보다.
Jungle : 멘토가 뒤풀이에서 옆자리에 시크릿 짝꿍을 심어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민: 전혀 몰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분명히 들어온 순서대로 자리에 앉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장영웅(이하 장): 난 눈치챘었다. 느낌이 왔다.
Jungle : 4일 차 오전에 중간 크리틱을 한다고 들었다. 진행 상황은 어떤가? 작업을 보여줄 수 있나?
민: 보여주기엔 아직 진도가 많이 안 나갔다. 30% 정도. 처음에는 모든 키워드를 조합해야 하는 줄 알고 진행했더니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더라. 이후 키워드를 선택해서 집중적으로 활용하라는 조언을 받고 ‘이고-데스(자아상실)’를 중심으로 추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개념적인 키워드라 시각화하기가 쉽지 않다.
장: 못 보여준다(웃음). 이제 막 시작한 단계다. 현재 진행 속도만 보면 이동언이 가장 빠르다.
동: 내가 선택한 키워드는 ‘소파 귀신’이다. 한 번 앉으면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게으른 성격을 전면에 내세워 작업으로 만들어보려 한다. 이전부터 작업에 캠코더를 많이 사용해왔는데, 캠코더 영상이 아닌 스틸 컷을 활용한다는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이번 작업도 캠코더로 찍어서 잘라 붙인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소파 귀신’에는 90년대 홈 비디오 스타일을 차용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