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북유럽의 놀이터(playground)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듯하다.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가족 중심 문화와 아이들에 대한 배려가 잘 되어 있으니 놀이터라는 공간을 들여다보면서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필자가 보고 느낀 이곳의 놀이터는 이미 많은 부분에 있어서 브랜드화되어 있고, 아이들의 연령대별로 구획이 잘 나누어져 있으며, 정부에서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근처의 주거단지를 보더라도 기획 초기부터 햇빛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 및 디자인되며, 놀이터를 둘러싸는 형태로 아파트 단지가 구성되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단지 내 노른자 위에 아이들의 공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계를 통해 입주민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집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장점을 얻는다.
앞서 연재한 글에서도 다루었듯이 대중교통, 은행, 마트 등 어디를 가든지 아이만을 위한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어른들과 동등한 시선으로 배려하는 것이 이곳의 보편적인 문화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슈되고 있는 노키즈존(No kids zone), 이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아이들을 위해 신경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먼저 단순한 이유로는 ‘아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필자의 주변 동료들만 봐도 자녀가 3~4명인 가정이 대부분이다. 나라에서 보장받는 복지나 교육이 안정적이므로 아이를 키우는데 부담이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에 대한 배려는 놀이터에 대한 관심과 투자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이들이 나라의 미래임을 말뿐인 아닌 실천으로 보여주는 예시라 할 수 있다.
정밀하게 설계되고, 과감한 상상력으로 디자인하는 아이들의 공간. 이러한 놀이터는 심지어 그 지역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일상적인 놀이터라는 공간을 체험하러 사람들이 찾아오다니 필자는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들도 아래의 사진들을 본다면 쉽게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덴마크의 항구도시 오르후스(Århus)의 놀이터 디자인 프로젝트. 이미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정도로 유니크한 디자인을 보여준다. (Århus, Denmark)
놀라운 상상력과 디테일이 돋보인다. (Århus, Denmark)
(상,하) 러시아의 테마파크 ’VDNKh’를 위해 디자인한 놀이터. 코스모스: 우주로 떠나는 여행/제작 설계 과정.
이곳 놀이터 중에는 보통 우리가 상상하는 테마파크 수준의 퀄리티, 아니 그 이상을 보여주는 곳이 많다. 물론 북유럽의 모든 놀이터가 이와 같은 디자인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특화된 놀이터로 인해 그 지역 자체가 랜드마크가 되어 많은 사람의 발길을 붙잡기도 하고, 실제로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혁신적인 문화의 중심에는 놀이터를 디자인하는 덴마크 회사 ‘몬스트룸(Monstrum)’(
monstrum.dk)이 있다.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 근교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 회사는 2003년에 설립된 이래로 전 세계 수많은 놀이터의 기획과 디자인을 주도해오고 있다. ‘놀이터 디자인(Playground design)’이라는 특별하고 독창적인 분야에 있어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들만의 디자인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몬스트룸. 얼마 전 필자는 이 회사의 창업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올레 닐센(Ole Barslund Nielsen)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갖게 되었다. 아래 내용은 덴마크 본사에서 그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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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트룸(Mostrum)사의 창립자 올레 닐센(Ole Barslund Nielsen, 사진 우측)과 필자.
(Jo) 몬스트룸이라는 회사에 대해 소개해 달라.
(Ole) 덴마크 출신의 올레 닐센(Ole Barslund Nielsen)과 크리스티안 젠센(Christian Jensen), 두 사람이 만나 2003년에 창립한 회사로 어린이를 위한 놀이터를 설계·디자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당시 5살 된 아들에게 직접 놀이터를 만들어주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 실제로 우리의 첫 프로젝트는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을 위한 놀이터 디자인이었다.
놀이터 디자인(Playground design)이란 정확히 어떤 일인지 설명을 부탁한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공간. 즉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놀이터라는 공간을 디자인하고 설계하는 일이다. 단순히 미끄럼틀이나 그네를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놀이터 전체의 이야기를 구성하려고 한다. 가령 성(castle)을 모티브로 한 미끄럼틀과 그 성을 향해 날아가는 독수리 형상의 구조물을 함께 구성하여 아이들이 다양한 상상력과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드는 식이다. 바로 이러한 구성을 통해 아이들은 놀이터를 그들만의 창의력과 이야기를 만드는 곳으로 재창조한다.
놀이터 디자인 분야만이 가지고 있는 독창적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순수한 상상력과 창의력의 지속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상상의 나래를 펴고 이야기에 같이 동참하게 하는 것도 아주 즐겁고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가 디자인한 놀이터를 통해 잃어버린 동심을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보람될 것 같다. 놀이터라는 공간이 가진 특별함을 통해 남녀노소 누구나에게 더 많은 영감을 주고 그들만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디자인팀은 주로 어떻게 디자인 영감을 얻는가?
디자인 팀원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그들만의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표현한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건축, 애니메이션, 만화 등 어디서든 아이디어는 나온다고 믿는다.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
진행했던 모든 프로젝트가 모두 소중하지만, 최근 끝마친 레고하우스의 놀이터를 설계·디자인한 프로젝트가 기억에 남는다. 덴마크 빌룬드(Billund)에 위치한 레고하우스 테라스 8군데에 각기 다른 다양한 컨셉을 바탕으로 한 놀이터를 디자인했다.
덴마크 빌룬드에 위치한 레고하우스(LEGO house, Billund, Denmark)에 지어진 8개의 놀이터 프로젝트와 아이디어 전개과정.
앞으로의 놀이터 디자인 혹은 놀이터 문화를 어떻게 예측하는가?
가급적이면 클래식, 그러니까 전통을 고수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미래의 언젠가는 첨단의 장비와 센서로 무장한 시스템이 놀이터라는 공간에도 들어오겠지만, 그것들은 빠르게 가치를 잃어버리고 싫증이 날 것이다. 아이들은 순수하게 뛰어놀고, 경험하는 전통방식을 통해 상상력과 창의력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아시아 또는 한국의 놀이터 문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어렵겠지만 공간 구성에 있어서 너무 조심스러워(too careful) 하는 것 같다. 놀이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상황들, 즉 아이들이 뛰고, 넘어지고, 다치고, 또 일어서고 이러한 행동들에 대해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이들은 또한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성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덴마크, 오덴세 동물원(Odense Zoo, Denmark) 안에 있는 놀이터 디자인과 아이디어 전개 과정.
아직 놀이터 디자이너라는 분야는 생소하다. 이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어떤 것을 갖추어야 하는가?
아주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고, 자신이 무엇을 즐기는지 스스로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아이들을 위해 배려하는 디자인 작업이 될 것이므로 그에 따른 섬세한 디테일과 상상력이 요구될 것이다.
앞으로 몬스트룸의 비전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전 세계의 놀이터에 상상력과 이야기를 심어주고 싶다. 우리 회사는 별도로 광고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셜 미디어나 각종 매체의 기사 그리고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단순히 재미있는 놀이터보다는 이야기가 있는 공간을 만들려고 주력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이는 앞으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될 것이다.
덴마크 본사 내에 있는 워크샵 플레이스(Workshop). 실제 놀이기구들이 제작되는 공간이다.
몬스트룸 본사 오피스의 오픈 플레이스(open place). 직원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본질(本質)을 이야기하다
그렇다. 결국에는 이야기(story)인 것이다. 비단 디자인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둘러봐도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느냐에 따라 우리들은 공감하고 끌리게 된다. 단순히 재미있는 미끄럼틀이나 예쁜 그네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터 전체가 가진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지속 가능한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놀이터라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선장이 되기도 하고, 해적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공주가 되어 성에서 파티를 열기도 하고, 고래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아이들의 상상력에 엔진을 달아주는
‘스토리 디자인(story design)의 완벽한 사례’인 것이다.
각종 컴퓨터 게임이나, SNS 등 첨단 시대가 낳은 부속물들이 놀이터의 경쟁 상대가 되는 시대이며, 아이들은 점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변하지 않는다. 아니,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지속하여야 할 그들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우리는 빠르게 격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주변의 모든 것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과 첨단의 테크놀로지가 마치 홍수처럼 계속 넘어 들어온다.
하지만 변치 말아야 할 것, 지속하여야 하는 요소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본질(本質, Essence)을 유지하며 첨단의 시대 흐름에 맞춰 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나,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하나의 사명과도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놀이터라는 공간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것은 아이들만의 순수한 본질을 지켜주는 상당한 책임감이 따르는 중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꿈, 희망, 도전, 소망 ….. 본질을 유지하며 변치 말아야 할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