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07
틀리면 지울 수 있도록 사랑은 연필로 쓰라지만, 지우고 지워도 연필자국은 남는다.
이제 사랑은 만년필로 쓰자. 틀렸다고 지울 필요 있나, ‘사랑’인데.
3인의 캘리그래퍼가 만년필을 향해 연서를 띄운다.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중학교 다닐 때부터 문방구에서 파는 학용품에 관심이 많았고, 손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년필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도서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쓰던 로트링(Rotiring) 아트펜을 유심히 봐두었다가 영풍문고에서 구입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어언 10년 째 쓰고 있습니다.
요즘은 디지털 아닌 것이 없을 정도지만 펜은 우리 손에 숟가락만큼이나 많이 쥐어지는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용품이자 귀중품인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펜을 고르는데 있어 손에 쥐었을 때의 감촉과 글씨 쓸 때의 느낌이 중요한데, 로트링 아트펜은 적당한 무게와 유연한 필기감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로 사용하는 로트링 아트펜 1.9mm로는 캘리 스탬프의 글씨를 쓰고, 광고 작업은 물론 사진과 함께 엽서로 만드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잉크가 말라 글씨를 쓸 수 없을 때는 마시고 있던 커피에 찍은 후 슬쩍 침을 발라 사용하곤 하는데, 검게 얼룩진 입술로 잉크가 번진 커피를 마시는 모습에 따가운 시선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펜과 종이를 늘 소지하는 오래된 습관은 생각들을 정리하는데 깊이를 더해줍니다. 자판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지만, 속도 보다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할 때 펜으로 구상을 하면 그 시간이 더 의미 있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전할 때 감정을 더해주는 것이 바로 손글씨가 아닐까 합니다.
나만 할 수 있고, 내가 해야만 의미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손글씨를 쓰는 일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만년필의 성능이나 가격을 떠나 중요한 것은 펜을 잡고 손으로 써내려간 글이 나와 당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보고 싶어요’ 펜으로 적어보는 마음의 글씨를 보고 읽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글 | 밤삼킨별 캘리그래퍼
쓱~쓱, 싹~싹. 종이 위로 써지는 글자 만년필 소리는 손가락 마디마디를 타고 가슴까지 전해오는 즐거움이었다. 그 즐거움은 글씨 쓰고 그림 그리는 나에게 상상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입학식과 졸업식 같은 시즌에 선물용으로 인기를 끌던 만년필. 나에게는 평상시에 자주 쓰던 필기구라기보다 귀하게 여기어 간직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렇게 고이 간직하다 보면 잉크가 굳어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아쉬움과 후회를 안고 선물상자에 담겨있던 만년필을 보면 첫사랑의 편지 같은 아련함이 느껴진다. 그 시절의 가족, 친구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만년필은 흑백사진 같은 추억이 아닐까?
라미(LAMY) 조이(Joy).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만년필이다. 어느 날 후배의 어지러운 책상 서랍 속에서 내 시선을 끈 만년필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선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곁에 두고 부담 없이 쓰기에 좋은 것이었다. 평소 붓펜 같은 도구를 간단한 습작용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가끔은 만년필로 특유의 소리를 느끼며 여유를 즐길 때도 있다.
캘리그래피는 지필묵을 기본으로 한 감성 글꼴을 탄생시키는 작업이다. 하지만 도구와 재료에 대한 제한이 없으므로, 만년필 또한 캘리그래피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좋은 도구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만년필은 서양, 붓은 동양이라는 필기구로서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전하는 사람의 정성과 마음이 담긴 만년필의 감성과 손글씨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담고 있는 글씨, 그리고 만년필. 편지 또는 일기장 속의 마음과 일상의 작은 메모들 속에서 붓과 함께 오래도록 함께한다면 그처럼 기쁘고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글 | 캘리그래피스트 박병철
몇 년 전 ‘꽃피는 봄이 오면’에 다닐 때 김혜진 실장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만년필과 잉크예요. 장미향이 날 것 같은 보르도색 잉크와 어두운 나무색의 소박하고 평범한 모양의 펜대, 힘이 들어가서 오히려 멋진 글씨를 만들어 주는 거친 펜촉의 매력에 애장품이 되었어요.
그 이후로 캘리그래피 작업을 하면서 몽블랑(Montblanc), 라미 조이 등 정말 많은 만년필이 생겼지만 놀랍게도 루비나또(Rubinato)만큼 만년필 고유의 투박한 필기감을 표현하는 펜은 없는 것 같아요. 쓸 때 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거든요. 아날로그적인 필기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펜이에요. 그래서 잘 다듬어져 부드럽고 비싼 만년필보다 거친 루비나또의 새 펜촉을 더 좋아해요.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펜보다 마른 붓처럼 뻣뻣한 것이 강렬한 서체를 만들어 주거든요.
요즘에는 이렇게 다듬어지지 않아 소박한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어요. 그렇지만 가끔씩 콘웨이(Conway)의 순은 만년필이나 예술작품 같은 까렌다쉬(Caran d’ache)의 마리오 보타(Mario Botta) 만년필도 욕심이 나긴 합니다. 특히 몽블랑의 블루 느와르(Bleu-noir)는 농도 조절로 딥블루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거든요. 또 몽블랑 잉크는 잘 번져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하죠. 이를테면 물을 조금 묻혀 눈물이 번진 것 같은 효과를 낼 수도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검다는 오로라의 검정 잉크처럼 강하고 진한 느낌도 좋아해요. 오로라의 잉크를 쓸 때면 넷째 손가락에 반지처럼 문신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요. 언젠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해보고 싶네요. 섬세한 만년필로 그린 것처럼 말이죠.
글 | NHN 경험디자인팀 팀장 장태경
rotring artpen
독일어로 ‘빨간 원’을 뜻하는 로트링. 제도펜의 대명사로 디자이너와 설계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브랜드다. 특히 아트펜의 다양한 두께는 일반 필기는 물론 캘리그래프에도 제격.
lamy joy 15
라미의 만년필은 원산지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디자인이 특징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디자인과 펜촉 호환율 90%를 자랑하는 실용성은 독일을 빼다 박은 듯 하다.
rubinato mozart wood set
앤티크 필기구의 대표 브랜드인 루비나또. 일일이 잉크를 찍어 글씨를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불편함을 매력으로 승화시키는 만년필이다. 중세 유럽을 느낄 수 있는 펜.
pelican p52
펜촉의 굵기를 뚜껑의 색깔로 알 수 있는 펠리칸 스크립트 만년필은 캘리그래프를 위해 만들어졌다. 주황색이 눈에 띄는 p52는 펜촉의 굵기가 2.0mm이다.
sailor profit calligraphy
가는 촉이면서도 풍부하고 안정적인 잉크흐름을 가지고 있어 동양권에서 사용하는 문자를 쓰기에 적합한 만년필. 펜촉이 납작하지 않고 굽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sheaffer calligraphy
세계 최초로 진공튜브를 사용한 만년필을 제작함으로써 일대 기술혁신을 가져온 쉐퍼. 로고의 하얀 점은 쉐퍼만의 독창성을 상징한다고. 심플한 디자인과 다양한 굵기의 펜촉이 캘리그래피를 한층 깊이 있게 만들어준다.
제품협찬 베스트펜(www.bestpen.co.kr)은 몽블랑, 라미, 로트링, 쉐퍼, 오로라 등 다양한 종류의 만년필을 취급하고 있는 것은 물론, 각 만년필의 역사와 사용법 등 다양한 정보 공유를 통해 만년필 사용자를 배려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