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31
서울 연희동에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한 문화공간들을 찾아 나섰다가 어느 카페의 2층 테라스를 올려다보니, 빨간 파라솔 하나가 슬쩍 고개를 빼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보는 척 관심 없는 척 새초롬한 표정으로, 그러나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힐끔거리는 듯 보이는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과 호기심은 서로 반비례의 관계인 듯 보이기도 한다. 예전만큼 세상이 별로 궁금해지지 않는 나이에 가까워지는 요즘, 빨간 파라솔의 생기가 가득한 장면을 보니 이 세상의 모든 호감의 시작이 호기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김소연 시인의 말에 새삼 공감하게 된다. 한동안 궁금한 대상이 없었기에 호감가는 대상도 없었고 그래서 사랑하는 대상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경험자의 눈과 마음으로 대충 스캔하며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이미 알고 있다는 지레짐작으로 인해 굳이 대상을 지켜볼 만큼의 관심이 생겨나지를 않는다. 지켜보지 않으니 알아가기 위해서, 즉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기다리지도 다가가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니 호기심은 지켜봄, 기다림, 다가섬이라는 세 가지의 행동양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세상을 향해 지켜보고 기다리고 다가서는 호감의 ‘열기’를 그 동안 잊고 살고 있었구나 싶은 자각을 호기심 가득해 보이는 빨간 파라솔이 새삼 일깨우는 장면이었다. * 김소연의
<마음산책>
중 8장의 제목 ‘다가갈까, 기다릴까, 지켜볼까’를 차용하여 만든 제목임
마음산책>
글, 사진 | 안은희 리코플러스 대표(akkanee@empas.com)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지켜볼까
최근에 삼청동에 들어선 건축가 김헌씨의 두 개의 건물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나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기하학적인 외관이 삼청동 거리에서 얼마나 이질적인 풍경을 만들어낼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실제로 가서 보니 내가 알고 있다고 여겼던 그 거리가 어느 새 내가 알지 못하는 거리의 모습으로 변신 중에 있었고, 그런 까닭에 그 건물들은 생각했던 것만큼 ‘튀지’는 않았다. 아마도 건축가는 삼청동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또 질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속’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전통’보다는 ‘변화’쪽에 더 무게를 두고 결론지었을 것이고, 건축가의 인터뷰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비슷해지느니 독특해지겠다는 건축가들 특유의 자의식까지 발동하여 저런 형태의 디자인을 내놓았을 것이다.
"삼청동은 우리나라에 몇 남지 않은 보석 같은 곳이고 그래서 내겐 죄의식밖에 없다. … 처음엔 뉴욕식 붉은 벽돌 건물도 고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꼭 삼청동스러우냐?'라는 질문에 대해선 나도 답할 수 없었다. 비슷한 건물로 묻혀버리게 할 바에는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생명력 있는 건물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 김헌 인터뷰 (출처: news.chosun.com)
이해는 되었지만, 공감은 되지 않았다. 만약에 건축가가 ‘삼청동스러움’에 대해서 ‘고민’하기에 앞서 ‘궁금’해 했다면, 뭔가 다른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삼청동이 걸어온 시간들과 앞으로 걸어갈 시간들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지켜볼 수 있는 거리조절이 아쉬웠다. 궁금하다는 호기심은 상대에 대해 잘 알고 싶다는 마음이고, 상대를 잘 알기 위해서는 한동안 지켜보고 관찰할 수 있는 시간과 거리를 필요로 한다. ‘삼청동스러움’이라는 답을 서둘러내야 한다는 압박감보다, ‘삼청동’이라는 문제 자체에 즐겁게 집중했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다른 느낌의 ‘튀는’ 디자인이 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만 같다. 고민이 자기 내면으로 향하게 하는 내향적인 통찰법이라면, 호기심은 상대의 주변을 맴도는 외향적인 접근법이다. 그런 까닭에 호기심은 때때로 고민이 치명적으로 안게 되는 주관적인 오류를 ‘지켜봄’이라는 거리두기를 통해서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 오기도 한다.
사진출처
하겐다즈 플래그쉽스토어 news.nate.com
라임스톤 건물 news.chosun.com
기다릴까
호기심으로 인해 상대를 한동안 지켜보고 나면, 점차 호감의 근거를 찾게 되고, 그 근거들이 충분해지면 지켜보던 대상이 어느새 자신에게 의미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열중하고 열광하게 만들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한동안 다른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계속 앞서 읽었던 책과 비교당하는 불운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다음 책이 끝까지 읽혀졌다면, 이는 아마도 앞선 책과는 다른 그 책만의 호감의 근거들이 하나둘씩 발견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유발시키지 못하는 책은 끝까지 읽혀지지가 않는다. 즉, 기다려주지 않는다. 기다림이란 상대의 매력 없이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행위이다. 그래서 기다림은 지켜봄과는 달리 상대에게 매료되는 지점이 각기 다를 수 있는 주관적인 취향이 두드러지고, 더불어 상대의 매력이라는 모호함에 휘둘리게 되는 수동적인 특성도 가지고 있다.
최근에 읽고 있는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라는 책이 요즘 내게는 기다림의 대상이다. 인도사회의 문화와 역사적 상식 없이 읽으려니 평소 읽는 속도의 3배 이상 천천히 읽게 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속도로 읽혀지는 책이었다면 대개는 포기하고 다른 책으로 넘어갔을 법도 하건만, 이 책은 천천히 읽혀지면서도 설레는 마음이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 처음에는 생경함에 매료되었으나 그것이 익숙해지자 나중에는 거의 의무감으로 읽어냈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비교해보면, 「한밤의 아이들」은 화수분처럼 계속 호감의 근거들이 생겨나고 있는 책이다. 상대에게 지속적으로 매혹 당하게 되면, 나만의 의미로 포획되기 전까지는 수동적으로 기다려야할지라도 그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그래서 ‘욕망의 모호한 대상’, 즉 호기심의 대상은 기다림을 유발한다.
다가갈까
어린 시절에는 호기심의 대상이 생겨나면 지켜보고 기다리는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고 성큼 그 대상에게 다가서기도 한다. 거절내지는 배척의 경험치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면서 이러저러한 경험이 쌓이다보면, 때로는 아무리 지켜보고 기다려도 구애의 대상이 내게 마음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다가서보지도 못하고 호기심과 호감을 서둘러 접어버리기도 한다. 이는 비단 연애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꿈과 미래에 다가서는 것을 포기했을 수 있고, 누군가는 관계 전반에서 그러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다가섬은 비록 좌절의 경험치가 축적될지라도 기꺼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굳이 다가서지 않고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기심의 매혹을 즐길 수는 있지만, 다가섬은 모호했던 욕망의 대상을 마주보게 만들기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힘을 축적하게 한다.
지켜봄이 상대에 대한 폭을 넓혀가는 과정이라면, 기다림은 자신의 폭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다가섬은 서로의 폭을 재어보고 맞추어보는 과정이다. 그런 까닭에 다가섬이 빠진 호기심의 행위들은 깊이에 다다르지 못하고 너와 나 각자의 얇은 표면에서만 맴도는 쳇바퀴 같은 과정에 그칠 수도 있다. 깊이에 지나치게 경도될 필요는 없지만, 깊이가 담보되지 못하는 넓이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불혹의 나이는 미혹에 흔들리지 않아야 할 나이라고 공자님이 말씀하셨다지만, 오히려 더 깊숙이 미혹 속으로 침잠해야 할 나이인 것 같다. 끝없이 미혹되고 매혹되는 열정을 쏟을 호기심의 대상을 더 열심히 찾아 나서야 할 나이인 것 같다. 특히 세상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어설픈 착각과 세상에 대한 미적지근한 태도를 걷어내고, 어린 시절보다 더 성큼 다가설 수 있는 용기를 쥐어 짜내야 할 나이인 것 같다. 그런 까닭에 호기심이 호감이 되고 호감이 열정이 되는 온도의 변화를 지켜보고 기다리고 다가서며 더 깊숙이 체감하는 나이로써의 불혹을 개인적으로 즐길 수 있길 바래본다.
*‘동네’를 돌아다니다보면,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색’이 있었다. 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허름하고 좁은 골목, 남의 집 대문과 같은 장면들은 우리들의 눈과 귀를 머물게 한다. 우리의 눈에 의해 포착되어서 어느새 우리의 마음의 의미로 포획되어 버린 장소 이야기, color of village는 그런 장소와 장면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