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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발랄하게 지금, 여기로

2012-11-22


양동마을의 어느 집 마당의 빨랫줄에서 발견한 보라색 버선을 보며 떠오른 단어는 ‘해학(諧謔)’이었다. 이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익살스럽고도 멋이 있는 농담’이란다. 익살스럽기만 해서도 안 되고 멋만 있어도 안 된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아 빨랫줄을 날렵하게 타고 내려가서 한옥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설 것만 같은 장면을 보고 있자니 익살도 멋도 느껴진다. 한편, 이 장면은 2012년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전통적인 풍경인데도 묘하게 ‘지금’의 순간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발랄함 때문이었다. ‘발랄하다’는 표현은 정적인 것을 묘사할 때보다는 동적이고 생기 있는 것을 묘사할 때 더 어울린다. 발랄하게 지금, 여기의 우리 곁으로 전통이 내려오고 있는 것만 같다. 박물관이나 민속촌에서 꼼작하지 못하고 멈춰져있는 전통이 아니라, 우리 곁에 머물고 싶어서 꿈트럭거리는 전통의 의미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글, 사진 | 안은희 리코플러스 대표(akkanee@empas.com)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발랄하지만 묵직한 해학

얼마 전에 한신대 신광철 교수의 주도 아래에 조선시대의 ‘용감한 녀석들(중요무형문화제 제6호 ‘통영오광대’ 보존회)’과 21세기의 ‘용감한 녀석들(개그콘서트 팀)’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공동기획으로 2012년에 주목할 한국인의 문화 DNA를 찾는 기획기사였다.1) 한국인의 해학은 서양의 유머(humor)와는 다르다. 현실을 익살스럽게 비틀면서 웃음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점에서 단순히 우스운 개념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신광철 교수는 해학(諧謔)을 풍자(諷刺)와도 구분하였다. 풍자의 ‘자(刺)’가 ‘찌를 자’인 것에 비해서 해학의 ‘해(諧)’는 ‘화합할 해’자이다. 문제를 끄집어내서 한바탕 웃고, 으르고, 달래며 다시금 세상을 함께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힘을 나눠 갖는 것이 해학의 진정한 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함께 나누고 화합해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웃음이기에 해학의 익살에는 멋과 품위가 함께 느껴지게 되나보다.
1) 조선일보, “[한국인의 문화 DNA] (1) 해학-통영오광대와 용감한 녀석들”, 2012.09.18. 기사 참조

멋과 품위가 배인 웃음이기에 해학은 ‘시(詩)적’이다. 시에서의 웃음은 대개 울음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 / 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 / 이제 울음 소리도 없습니다 / 파리 여러분! / 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 ‘에프킬라를 뿌리며’라는 제목을 가진 황지우 시인의 시다. 파리는 파리 목숨이라니. 파리가 파리로만 생각되지 않고 자꾸 다른 의미들로 대체되다 보니 우스우면서도 우습지 않게 되어버린다. 아마도 해학의 맛은 이처럼 발랄하게 작은 리듬에서 시작해서 묵직하게 깊이와 넓이로 확장될 때 느껴지는 맛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보라색 버선도 해학적인 장면이었다. 조선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와서 현재에 불시착한 듯 보이는 버선과 한옥이 발랄하게 시작해서 묵직하게 마음에 남겨진 이유를 짚어본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들의 (초)현대적인 삶과는 너무나 이질적인 삶의 장면이 아주 일상적인 느낌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는 것이 반가웠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장면이 반가울 만큼 우리와 전통의 거리가 어느새 이제는 거의 맞닿을 수 없을 만큼 벌어져버린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금, 여기로 착지시키기

『열하일기』를 ‘빛나는 유머와 뜨거운 패러독스’로 읽고 있는 고미숙 선생이 쓴 한 문장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옛날, 거기’라는 초월적 허공에서 ‘지금, 여기’라는 지상으로의 착지!’2)

학생들과 고건축 답사를 다녀온 후에는 가끔씩 우리가 어디어디 갔었는지 기억하냐고 물어보곤 한다. 그러면 대개의 경우 돌아오는 답은 ‘절들이요’다. 대흥사, 미황사, 송광사, 선암사, 부석사, 봉정사 등 남도나 안동지역의 사찰을 위주로 답사를 다니다보면 이 절이 저 절 같고 저 절이 이 절 같아 보여서 시간이 지나면 구분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옛날, 거기’의 시선으로 고건축을 바라보게 되면, 분명 우리 눈앞에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대상으로 머물러 있게 된다. 열심히 공부해야하고 배워야하는 대상이기는 하지만, 내 삶과 닿아있지는 않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대흥사 두륜산의 봄빛에 설레어봤다면, 미황사 대웅전이 석양에 물들어서 찬란한 황금빛으로 변하는 순간을 목격했다면, 그리고 비오는 날 봉정사 영산암에 앉아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파동과 함께 아늑하게 감싸이는 공간감을 느껴보았다면, 그 건축물들은 더 이상 학습이나 관념의 대상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어느새 첫사랑의 설렘을 닮은 공간으로, 인생의 뒤안길에서 마주하는 빛나는 아름다움이 공허 속에 배어 있는 공간으로, 그리고 처마선의 아름다움을 하늘이 아닌 바닥에서 발견한 공간으로, 그렇게 생생하게 내 삶의 한 장면으로 각인된다.
2) 고미숙,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4, p.389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라는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엄마가 아들에게 고생물학자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부분이다. “버드는 고생물학자가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삽화가 딸린 완벽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안내 책자를 백 조각으로 찢어서 박물관 계단에서 바람에 날린 다음 몇 주 후에 5번 가와 센트럴파크를 속속들이 뒤져서 남은 조각들을 있는 대로 찾아내서 학파와 양식, 장르, 화가들의 이름을 포함하여 회화의 역사에 대해 재구성한다면 그게 바로 고생물학자가 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고생물학자는 화석을 연구해서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뿐이라고. 열네 살이 되었다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3) 너무 까마득해서 초월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을 이처럼 생생하게 현재로 착지시켜서 설명하고 있어서, 더욱이 아들에게 필요한 현재적인 의미까지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어서, 그 아름다운 포착의 시선에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과거와 전통을 지금, 여기로 착지시킨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느낌의 의미일 것이다.
3)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민음사, 2006, p.74


그리고 들여다보기

쉬이 내버리지 못할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을 현재의 의미로 착지시키기 위해서는 우선은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열심히 들여다보다 보면 나에게로 와 닿는 의미들이 생겨나게 된다. 자신의 일상의 공간을 가만히 살펴서 곤궁한 귀양살이 속에서도 빛나는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던 조선 중종 때의 선비 기준(奇遵)의 시선을 따라가 보면, 우리의 DNA에 내재된 묵직한 해학의 깊은 맛을 느끼게 된다. 그는 햇빛도 바람도 잘 들지 않는 비좁은 집 곳곳에서 몸은 비록 유배되었으나 삶의 ‘도’를 발견하고자 부단히 정진하였다. 부엌을 천선조(遷善竈)라고 명하면서 세상만물의 선한 변화가 일어나는 공간, 즉 변혁의 공간으로 읽기도 하고, 마루를 낙천당(樂天堂)이라고 부르며 하늘의 이치를 즐기는 공간으로 삼기도 했다. 처마를 스스로를 낮춰 예를 표하는 자비첨(自卑簷)으로, 온돌을 안정되고 묵중하게 불을 받아들이는 곳인 정사돌(靜俟堗)로 명명하였다.4) 이처럼 그는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과 공간을 외로움과 고독의 벗으로 삼아 그 속에 담긴 본질을 꿰뚫어 보며 동시에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함께 들여다보았다.
4) 남현희 편역, 『조선선비, 일상의 사물들에게 말을 걸다』, 문자향, 2009. 참조

멀리서 찾지 않고, 자신의 곁에서 빛나고 있는 존재들을 놓치지 않는 방식을 배우게 된다. 우리 곁의 장면들을 곱씹어봐야 하는 타당성을 찾게 된다. 특히 아직까지는 우리 옆을 맴돌고 있는 전통과 같은 그런 것들, 잊지 말아야 하고 잃지도 말아야하는 것들을 꼭 붙들어두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보라색 버선이 전해준 발랄하면서도 묵직한 해학과 같은 것들을 지금, 여기로 착지시켜서 열심히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동네’를 돌아다니다보면,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색’이 있었다. 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허름하고 좁은 골목, 남의 집 대문과 같은 장면들은 우리들의 눈과 귀를 머물게 한다. 우리의 눈에 의해 포착되어서 어느새 우리의 마음의 의미로 포획되어 버린 장소 이야기, color of village는 그런 장소와 장면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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