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4
스테판 사그마이스터, 오스트리아인이며, TED에도 몇 번이나 출연한 진지하면서도 자유분방한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작년 9월 26일부터 11월 25일까지 3개월에 걸쳐 광화문의 세종문화 전시장에서 그의 전시가 있었다. 전시회장 파사드 위에는 그가 디자인한 커다란 원숭이가 3개월간 내내 엎드려 있었지만, 신기한 것, 이상한 것에 무감각해진 도시민들은 그저 또 하나의 장치물이려니 하고 지나다녔고, 원숭이는 서울시민들의 머리만 내려다보다가 사라졌다. 전시장에 들어가니, 기아 소울이 알파벳을 잔뜩 써 붙이고 서있었다. 글자 역시 친근한 시각매체여서 그런지 작은 글씨들을 잔뜩 붙인 앙증맞은 녀석이 귀여워 보였다.
전시 관람료는 12,000원, 설명기기 대여료는 3,000원이다.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250명이나 되는 학생들에게 리포트 써 오라고 과제 내준 것이 미안하기도 했고. 이렇게 입구에서 망쳐진 기분은 스테판의 작품을 보는 동안 풀려졌다가. 잠깐 사이에 전시장 구성의 컨셉이며 그 보여주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나빠졌다가 하는 들쑥 날쑥한 상태로 계속되었다. 작품을 보면 기분 좋고,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을 보면 기분이 나빠지고의 과정이 반복된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전시회를 살펴보자.
글 | 조현신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 교수(lilyb@kookmin.ac.kr)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연스러운 호흡-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작품들
숱하게 회자되고,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는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디자인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자연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이하고 즐겁지만 이상한 점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 신기하고 재미있다.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면 매년 눈이 오는데도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소리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데 즐겁고 유쾌하다. 이런 감정은 우리가 자연의 일종이며, 그래서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우리의 유전자가 반응하는 신비이며 기쁨이기도 하다. 사그마이스터의 작품은 이런 종류의 기쁨을 준다. 생각하거나, 이해하거나, 설명을 들을 필요 없이 그냥 우리의 직관에 직접 호소한다.
잠시 근래의 디자인 전시들을 생각해 보자. 근래 디자인 전시를 가면 무언가 튀고 기이한 것들이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등장한다. 일상적인 디자인 결과물에도 이런 점들이 많이 보이지만, 특히 클라이언트 없이 디자이너들이 자신들의 감성 혹은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작품들은 과다한 의미부여, 관람객들과의 무의미한 인터랙션, 혹은 철학적 해석을 요구한다. 근래 젊은 디자이너들의 전시장에 갔다가 젊다고 너그럽게 보아주기에는 너무 인위적이고 오글거리는, 한마디로 과도하게 작위적인 결과물들로 인해 기분이 상한 적이 있었다. 디자인은 없고 디자인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드러내고픈 이 시대 왜소한 청년들의 실상을 본 느낌이라고 할까. 디자인이 이제는 갈 데가 없이 그냥 자신의 틀에 갇혀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왜소한 실험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가지 뚜렷한 것은 그 또한 갈데없이 개념만 난무하는 예술을 좇는데, 그것도 본체가 아닌 그 개념의 지향점만을 좇는구나하는 생각이었다. 그런 와중에 디자인을 디자인답게. 즉 기발하면서도 쓸모 있고, 의미있으면서도 심각하지 않게 디자인하는 사그마이스터의 자연스러움이 더 반가웠는지 모른다.
한 가지 예를 보자. 리바이스의 세계 에이즈날 캠페인 포스터. 검진을 받은 후 포스터의 일부를 떼어가게 만들었다. 어렸을 적 무언가 잘하면 잘했어요 하고 스티커를 붙여주었듯이, 받기 싫은 에이즈 검사를 받았으니 에이즈 병균을 이쁘게 인쇄한 동그란 종이 딱지 하나로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고 이 포스터가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에이즈 감염률이 저하된다고 한다. 떼어가니 없어지는 자연스러움이면서, 재미있고 동참을 요구하는 디자인인 셈이다. 어떤 장소에 가서 친구에게 글을 써라, 하고 싶은 말을 해라 등의 인터랙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소중하고 중요한 행위를 한 후 그것의 보상으로 작은 징표를 가져가는 것이다.
자연스러움 – 일상에 대한 해석, 스스로 통로 되기
이런 자연스러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 행위를 잘 관찰하는 힘에서 오는 것이다. 즉 디자인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과 그를 가장 잘 표현하고픈 무심함이 그 힘을 생산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어떤 분야이건 한 분야의 대가들이 지닌 공통점은 자연스러움에 있다. 바이올린으로 세계를 사로잡은 안네 소피 무터가 자신의 바이올린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 그녀와 악기와 하나가 된 것 같이, 마치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듯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녀가 뽑아내는 바이올린 가락은 그냥 우리의 감정대로 흐른다.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우리의 감성을 바이올린 가락을 통해 전달한다. 완벽한 기예와 자신이 연주하는 곡에 대한 해석이 낳는 힘이다.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작품은 그런 고도의 기예와 일상에 대한 해석이 어우러진 결과이다. 경사 45도 엘리베이터를 시각화한 뮤지엄 플라자 로고, 옷을 만드는 작업장에서 매일 보는 다리미와 그 다리미 주인의 가녀린 모습 같은 일러스트와의 조합, 카페인으로 창작의 시간을 달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표현한 2500개의 종이 커피 컵 포스터, 창작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자기 몸에 상처를 내서 그 고통을 직접 전달하는 등의 행위는 일상을 채우는 것들에 대한 깊은 관찰과 애정에서 우러나온다. 그는 대상을 자신이 어떻게 배열하고 구성할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보다는 대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관찰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스스로 리바이스 청바지 포스터 제작에 대해 밝혔듯이. 그리고 이 관찰은 근래 스토리텔링 디자인에서 고가를 치는 리서치나 자료 분석위주가 아닌 대상의 본질에 대한 성찰에 기인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의 작품에서는 디자인 대상의 본질적 가치가 부각되지, 작가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즉 디자이너의 작위성이나 어설픈 주장, 조형의식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진지하게 그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살리고 싶어 하는 전달자 혹은 통로가 될 뿐이다.
전시방법 – 박제처럼 보여주기
그럼 이런 그의 작품을 전시 기획이나 주체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었는지 잠깐 보자. 첫째 입장료가 너무 비쌌다. 성인 12,000원에 게다가 해설기 대여료까지 3,000원을 받았다. 문화 산업의 본령을 잃은 것일까. 관람료 12000원이면 해설기 정도는 그냥 빌려주어서 무언가 풍성한 문화적 저력을 좀 더 가지라고 독려해도 될 텐데 하는 아쉬움 혹은 주최측이었던 모 신문사에 대한 무시의 감정이 들었다. ‘쪼잔한 사람들’ 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면서. 학생들에게 가서 보고 전시회 평을 써오라고 해서 가책도 느꼈다.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무시당해도 좋고, 관람객의 사정 따위가 무엇이랴, 돈만 벌면 되지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 역시 주최측과 기획 대행사의 수준을 보여주는 일이니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의식을 천박한 자본주의라고 한다. 문화산업도 이제는 문화의 시대에 자본을 끌어들이는 첨병 역할을 할 뿐이고, 거대 신문사 역시 그 일에 뛰어 드는 하나의 주체일 뿐이다.
둘째 자연스럽고 유희적인 작품을 박제화시켜 전시했다. 책이며 전시도록이 유리 박스 안에 무슨 보석처럼 전시되어 있어, 표지나 내지 한 장 볼 수 있을까 만질 수도, 뒤져볼 수도, 종이의 감촉을 느낄 수도 없다. 근래에 아니 고작 4년 전에 인쇄된 대학의 도록마저도 학생들에게 한 권 다 보도록 제공하지 못하는 이런 기획은 정말 문화의 궁핍을 보여준다.
디자인 역사책을 보다 보면 답답할 때가 많다. 대학원 재학시절 한창 서양 그래픽 디자인사를 공부할 때 비엔나 분리파 작품의 하나인 잡지 「신성한 봄」의 표지를 보고 그 일러스트의 낭만적 신비감이 어쩌면 그리 아름다운지 감탄에 감탄을 했었다. 그리고 그 안의 편집이며 삽화를 보고 그 마음은 젊은 시절의 나를 어찌나 열병처럼 괴롭혔는지. 오스트리아에 가면 꼭 그 잡지의 내지를 보고 오리라는 작정까지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한 대학 도서관에는 라이프 잡지 전 권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는데 장갑을 끼고, 정해진 자리에서 그 잡지를 보게끔 해준다. 이미 다 한정판으로 사라진 그 오래된 잡지마저도 이렇게 독자나 관람자를 위해 개방을 하는데 하물며 마리코 모리의 웨이브 유에프오 북, 더글라스 고든 전시 도록, 월드 체인징 등 판매하는 것으로 만들어 졌거나 인쇄된 것 즉 유일품이 아닌데도, 유리 박스 속의 박제가 되어 있으니 이들은 무슨 컨셉으로 이런 전시를 한 것일까.
문화적인 것과 문화를 파는 것은 다르다
전시의 종류에 따라. 만지도록 만들어진 것은 만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사고방식 아닐까? 오프라인에서 브로슈어, 전시도록, 신문은 만지도록 되어있는 매체이며 이 매체가 지닌 아날로그적 파워 즉 물성의 풍부함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것이 오히려 스테판의 디자인 컨셉이다. 그가 제안한 숱한 물성이 다른 재료를 이용한 타이포그라피 하나만 보아도 그의 시각물이 얼마나 물질의 본성 그 자체를 귀중한 자료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입증한다. 그런데 이런 브로슈어나 도록을 들쳐보지도 못하게 하는 이 전시 형태는 기획사의 기획의도를 폄하하게 만들 수 밖에 없다. 폄하의 변을 들어보자.
첫째 이들 즉 기획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감동을 주는 책이나 잡지를 보면서 들쳐보고 감탄하고, 그 감촉을 느껴보고 싶은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전시 기획자로서 체화된 지식이 없이 기계적으로 ‘전시 = 유리관 보호’만을 생각하는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매너리즘은 자연스럽지 못하기에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작품을 오히려 둔화시킨다. 둘째 그게 아니라면 관람객의 수준이며 교육효과 따위는 무시하는 오만함의 결과이다. 자신들은 그런 경험이나 즐거움을 느끼면서 관객은 그것을 호흡할 능력이 없다는 판단에서 이런 전시방식을 택했는지 모른다. 즉 실무자들의 문화적 오만함의 결과이다. 아니면 셋째 그 잡지나 브로슈어를 구입할 수 없거나 구입하지 않으려는 재정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최측 신문사의 재정까지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도 저도 아니면, 그것이 이미 한정판이 되어 구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스테판 사그마이스터가 개인적으로 소장한 자료를 빌려다가 전시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너무 변명이 옹색하지만 정 그렇다면 그렇게 설명이라고 해 놓아야 관람객들에 대한 예의이며 동시에 상식적인 행위이다. 정 보고 싶으면 전시가 끝나고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겠다는 제시까지 있다면 책임 있고, 자질 있는 문화기획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진정 문화의 힘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한계가 있다면 서로 이해하고, 소통을 하려는 스마트한 제시들. 그런 것을 문화적인 것이라고 하지, 돈 받고 잘 팔리는 상품 보여주는 행위자체는 문화를 파는 행위 즉 문화산업일 뿐이지, 문화적인 것은 아니다. 결국 어떤 이유가 되었건, 물성의 힘, 공감각적 디자인의 힘, 상상력의 원천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이해하지 못한 기획사의 무지와 혹은 오만이 빚어낸 결과인 것이다.
밖으로 나오니 원숭이는 여전히 광화문의 시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여섯 마리의 원숭이가 각각의 단어를 하나씩 들고 다른 시에 설치 되어 있었는데 광화문에서는 그 엎드려 있는 자세로 보니, ALWAYS 라고 쓰여진 단어를 들고 있던 원숭이가 온 것 같다. 여섯 마리의 원숭이는 이런 말의 한 단어를 각각 들고 있었다고 한다. "Everybody Always Thinks They Are Right." "모두들 항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세상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흘러가는데, 이 전시는 혹시 이런 옳다 그르다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냥 매너리즘에 빠져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욱 들었다. 하지만 전시 방식이 어쨌거나 이질감 없이 기능적이며, 상업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작품들이 박제화 된 전시방법 보다는 힘이 센 것 같다. 긍정은 언제나 부정을 이기니까. 즐겁고 재미있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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