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6
한국건축사를 전공하는 이들은 반드시 연구해야 할 분야가 있다. 그것은 바로 불교건축이다. 372년 고구려에 전래된 불교는 현재까지 1600년의 역사를 가진다. 고대에서 중세,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의 전시대에 걸려 존재했던 불교건축은 한국건축사를 알고자 할 때 반드시 알아야 되는 분야였다. 필자도 90년대 후반 한국건축사를 전공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불교건축에 대한 연구도 같이 시작하였다. 그런 연유로 박사학위 논문을 고대 불교건축으로 하게 되었다. 현재 진행형인 불교건축에 대하여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시기별 분류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글 | 김상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
기사제공 | 건축디자인신문 에이앤뉴스
우리 불교건축은 인도건축? 중국건축?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B.C. 500년경 북인도(지금의 네팔)지역의 석가족 왕자인 고타마 싯다르타가 불교를 세우고 부타가 되었으며, B.C. 3세기 전인도지역을 통일한 아소카왕이 본격적으로 불교를 발전시켰다. 정복왕이었던 아소카는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인도 전국에 스투파라는 부타의 사리를 보관하는 기념비적 건축을 세웠다. 스투파(stupa)는 고대 귀족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정상, 꼭대기라는 말인데, 백성들이 사용한 팔리어로는 투파(thupa)라고 하였다. 스투파는 5개의 형태가 모인 구조물로 방형 또는 원형기단인 메디(medhi), 반구형 돔인 안다(anda), 안다 위의 발코니인 하르미카(harmika), 안다 가운데 기둥인 야슈티(yasti)와 야슈티에 여러 층으로된 원형의 차트라(chattravali)가 있다. 차트라 위의 최상부에는 보석형태의 칼라사(kalasa)가 있다. 이 5가지의 형태(메디, 안다, 하르미카, 차트라, 칼라사)는 고대 인도의 우주관을 담고 있다. 인도는 우주가 5가지의 요소, 지(a, 地, earth), 수(va, 水, water), 화(ra, 火, fire), 풍(ha, 風, air), 공(kha, 空, space)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하였다. 5대와 스투파는 그 형태와 의미가 서로 대응하는데, 지(地)는 정방형으로 메디를, 수(水)는 원형으로 안다를, 화(火)는 삼각형으로 하르미카를, 풍(風)은 반원형으로 차트라를, 마지막으로 공(空)은 보석형인 칼라사로 표현되었다. 고대인도 불교의 우주관이 스투파에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도불교는 기원후 3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대승불교의 발전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승려 나자르주나(龍樹, Nagarjuna)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인 나자르주나콘다(Nagarjunakonda)의 사원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기존에 유행했던 스투파와 근동으로부터 전래된 불상을 모신 불전, 그리고 대승승려들의 공간인 승원 등의 공간이 구성되어 있다. 고대불교건축의 기본요소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이후 인도는 힌두교화가 되어 현재는 네팔과 부탄, 스리랑카 등 일부 국가만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중국은 기원전후로 불교가 전래되었다. 당시 한나라 수도였던 낙양에 백사마를 비롯한 여러 가람이 등장하였다. 중국은 이미 중국에서 탄생한 유교와 도교가 종교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의 불교는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건축의 형태도 짐작하기 어렵다. 아마도 일반 주거를 사원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라 추정되며, 부도사라는 이름으로 인도의 스투파와 같은 형태의 건축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중국불교의 전성기는 4세기 이후이다. 4세기 중국은 혼란의 남북조시대였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지의 시대가 지난 후 북중국의 선비족과 남중국의 한족이 대치했던 시대이다. 낙양과 서안 등 중국의 중원인 화북지방을 차지한 선비족국가인 북위는 중국불교의 중심역할을 하였는데, 그 배경에는 북방에서 싸움만을 지속했던 선비족의 하급문화로는 한족백성을 다스리기 어렵기 때문에 중국의 종교가 아닌 불교를 도입하고 국교로 삼아 새로운 문화국가로의 발전을 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북위에 밀려 남중국인 강남지방으로 도읍을 옮긴 동진은 매우 선진화된 귀족문화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불교도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북위(북조)의 강력한 국력 지원과 동진(남조)의 화려한 귀족문화는 한문으로 된 불교경전의 출판과 거대가람의 조성을 탄생하게 되었다. 구마라습을 필두로 한 인도승들의 불경의 한문번역은 반야경, 묘법연화경(법화경), 아미타경 등의 대표적인 대승경전을 편찬하였고, 낙양에는 고대가람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영녕사와 돈황석굴, 운강석굴 등 석굴건축이 발전하였다.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의 불교건축은 중국식의 전통건축과 융합되어 발전하였는데, 전통적인 중국식건축인 양궐(兩闕) 형식의 배치형식과 인도 스투파의 중국화에 따른 탑을 중심으로 하는 단탑(單塔) 형식의 배치가 발전하였다. 9세기부터는 하나의 마당에 전각이 둘러싸인 원(院)이 여러 단위가 모여 생긴 원락식(院落式) 가람배치가 일반화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럼 우리나라의 불교건축 배치의 원형은 어디일까? 우리나라의 불교는 중국의 승려와 인도의 승려로부터 거의 동시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불교전파의 전초기지는 중국이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4세기는 중국불교가 매우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국불교가 중국불교란 말은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국화된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고, 이후 우리나라는 한국불교가 발전하기 까지 중국의 영향아래 발전하게 된다.
일본에 의해 정리된 고대불교건축사
우리나라의 고대 불교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남북국시대)를 말한다. 4세기에서 10세기에 이르는 탑을 중심으로 한 가람배치가 일반적이었다. 인도의 스투파가 중국의 탑이 되었고, 그 탑이 마당의 중심구조물로 되어 주변에 전각이 둘러싸는 형식의 배치이다. 이러한 배치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일반적인 고대가람의 배치 형식이다. 고대가람에 대한 연구는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제국이 한국과 중국을 침략하면서, 자신들의 고대가람들과 비교연구를 하면서 그 배치형식의 연관성이 들어났다. 섬나라인 일본은 항상 대륙으로의 진출을 자신들의 지상과제로 여기면서 발전하였다. 고대로부터 중세,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륙으로의 진출과 대륙과의 관계를 목표로 모든 역량을 다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 인류학과 고고학, 그리고 미술사학 등의 학문이 발전하면서 건축역사학 또한 발전하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이 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채 방황하던 시기에 일본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역량을 과감하게 나타내었다. 대륙과의 관계를 통해 대륙으로의 침략을 정당화했으며, 자신들이 유럽에서 배웠던 고고학적 분석방법을 한국과 중국에 적용하여 수많은 자료를 축적하였다.
1938년 평양의 청암리에서 금강사로 추정되는 사지를 발굴하면서 일본학자들은 큰 탄성을 지르게 된다. 가람의 배치가 일본 최초 가람배치인 아스카데라(飛鳥寺)와 큰 유사성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탑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 서쪽 3면에 금당이 놓여 있고, 남쪽에 문이 있는 소위 1탑3금당형식의 배치였다. 1937년 발굴의 원오리사지, 그리고 이후의 상오리사지와 정릉사지에서 탑 좌우에 금당이 놓이는 배치형식이 나와 고구려의 배치형식이 1탑3금당형식임을 말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말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청암리사지의 배치형식이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의 궁궐형식인 5성좌배치와 그 맥이 같다고 주장하였으며, 중국의 5성좌 배치형식이 고구려에 영향을 주었고, 최종적으로 일본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중국에 청암리사지와 같은 형식의 배치가 존재하였음에 의문이 드는 것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거나 발굴된 가람배치에는 청암리사지와 같은 배치를 찾을 수 없다.
청암리사지의 추정 창건연대인 498년 이전의 중국자료를 찾아보아도 1탑3금당형식의 모습은 그치 찾기가 쉽지 않다. 또 하나의 의문은 다른 고구려의 사지에 있다.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정릉사지에서 보이고 있는 1탑3금당의 배치는 청암리사지와 다른 배치를 보이고 있다. 8각탑을 중심으로 좌우에 전각이 배치되어 있는 형식은 청암리사지와 같으나, 탑 북쪽의 전각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릉사지의 경우 전각이 북쪽에 있으나, 탑과 전각사이에 회랑이 있어 공간이 사실상 구분이 되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70년경 통일된 신라의 가람배치는 탑이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게 된다. 일본의 학자들은 신라의 사천왕사, 망덕사, 감은사에서 발전한 쌍탑(雙塔)가람 형식이 일본에 전래하여 나의 약사사와 대관대사 등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주장의 전제에 당시 중국에서 먼저 쌍탑가람이 유행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은 현재 당시에 세워진 중국가람 중에는 쌍탑가람의 존재가 없다. 문헌상 나오는 2개의 탑이 나타난 가람은 한국과 일본에서 나타난 형식과 다르게 나타난다. 중국에서 600년대 나타난 2탑가람의 모습은 일본에서 700년대 중엽에 나타난 가람배치형식과 유사하며, 한국에서는 그 형식이 전무하다. 이러한 문제는 일본이 19세기 고고학의 발전에 따른 일방적인 연구의 결과이며, 자신들의 대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사관에 입각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국은 그러한 일본의 연구결과를 조용히 동조하고 있다.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르다. 사천왕사의 경우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나타난 가람배치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 가치를 찾지 못하고 일본인들이 연구한 잘못된 결과를 7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대부분의 한국건축사에서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종속화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려후기 불교건축과 고딕건축
역사는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순환된다. 이것은 서양건축과 동양건축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이다. 철학에 정·반·합이 있듯이 건축에도 정·반·합이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의 흐름은 전 세계가 공통으로 진행된다. 서양건축에서 비잔틴, 로마네스크와 고딕의 중세시기와 르네상스, 바로크의 근세시기가 있듯이 한국건축에도 중세와 근세의 건축시기가 구분된다. 고려시대 한국의 불교건축은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통일신라시기에도 국교가 불교이기에 큰 발전을 이루었지만, 고려시대의 모든 역량의 중심이 불교와 상관있게 진행되었다. 국력 또한 통일신라시기보다 크게 발전하였다. 외국에 ‘Korea’라는 이름의 국명도 이때 생겨나게 되었다.
불교의 발전은 불교건축의 발전과 맞물린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는 흥덕사, 불일사 등 유명한 거대 가람들이 있었다. 태조 왕건이 고려수도를 개경으로 하면서 국가주도의 거대가람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개경주위에 10개의 가람들을 배치해 수도를 2중으로 감싸 수도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들 가람들은 신라시대의 호국가람의 영향을 받아 그 배치가 이어졌으며, 승려들은 공무원이 되어 국가가람에 근무를 하게 되었다. 수도를 중심으로 위치한 가람 외에도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 고려를 대표하는 불교건축이 지어졌다. 그 예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이다. 안동과 영주, 그리고 예산의 산골지역에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최고의 걸작품들이 들어섰다. 현대건축에서 대부분의 뛰어난 작품들이 서울과 부산, 그리고 광역시를 중심으로 건축되어진 것을 보면, 고려시대 상기의 지역에서 이러한 명작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고려시대 불교건축에 대한 국가적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된 최고(最高)의 불교건축들은 다른 시대의 건축들과 비교하면 구조미가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기둥의 높이, 공포의 크기와 조각, 대들보의 길이, 도리의 수 등 모든 부분에서 큰 규모를 보이고 있으며, 장식성 또한 매우 뛰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으로부터 사찰건축이 그 시대의 최고의 건축기술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건축이 수도와 대규모의 도시(당시 광역시 규모의 도시는 평양-서경, 서울-남경, 경주-동경)가 아닌 중소도시의 외곽에 세워졌다는 것은 불교건축에 큰 정성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의 영향을 받아 건축기술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이다. 상기의 건축들이 세워진 1200년대의 유럽은 중세 고딕건축이 유행했던 시기이다. 중세의 유럽은 기독교, 즉 가톨릭이 국교로 되었으며, 고딕건축은 사원을 중심으로 발전했던 시기이다. 우리가 배웠듯이 고딕건축은 종교를 위한 건축이었으며, 종교의 신앙심을 건축으로 승화시켰던 시대이다. 하나님을 향해 최대한의 높이를 만들고자 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교회장식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교회건축의 높이에 대한 열망은 구조에 대한 공학적 연구를 촉진하게 되었고, 장식에 대한 열정은 수공업과 미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13세기 고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건축물의 높이를 높이기 위해 나무다루는 기술이 집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장식의 발전은 불상, 창자 등과 같은 불교공예의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같은 시기, 같은 종교적 열정을 가진 고려시대 불교건축 장인들과 유럽 고딕성당의 장인들은 다른 종교이지만 같은 이상향을 생각하면서 같은 목적과 결과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 4동중정형의 불교건축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격은 후 전화복구를 위해 모든 국력을 쏟아 부은 시기이다. 조선이 고려에 이어 건국되면서, 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사대부들은 고려의 패망원인을 불교의 폐단으로 문제 삼았고, 불교의 포교를 제한함과 동시에 불교종단까지 통폐합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불교계의 재부흥을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 시 휴정, 유정, 그리고 영규대사 같은 승병장들의 활약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전화로 불타버린 가람 복구의 승인을 받아냈으며, 백성들이 유교대신 내세가 강한 불교를 다시 찾는 계기가 되었다.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과 같은 2층 규모의 대규모 불전들이 다시금 세워지게 되었으며, 관음전과 명부전과 같이 전쟁으로 인한 아픔을 달래주는 전각들을 중심으로 교세가 점차 확장되었다.
이 시기의 특징으로는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대웅전을 세우고 동쪽에는 요사채, 서쪽에는 대방과 같은 전각을 배치하였으며, 남쪽입구에는 누각을 세워 마치 관아처럼 방어시설과 같은 배치로 변화기 시작하였다. 개방적이었던 가람의 배치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폐쇄적인 ㅁ자형태의 배치로 변화된 것이다. 17세기 이전의 가람의 중심은 탑과 마당이었다. 탑을 돌면서 기도하는 요잡례와 마당에서 열리는 야단법석이 불교행사의 중심이었으며, 일반 백성은 행사를 참여하면서 문화생활을 접하는 계기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접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개방된 구조의 가람배치가 발달했던 것이다.
18~19세기를 거치면서 가람은 ㅁ자형배치에 더 나아가 대웅전의 내부공간의 확장과 장식화가 급속히 전개되었다. Prologue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620년대에 세워진 흥국사 대웅전의 불단 앞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불단을 배면으로 옮기는 현상과 함께, 대웅전 정면의 장식성이 심화되는 반면 배면은 간단하게 표현하는 실용적인 수법이 발달하게 된다. 이전의 대웅전에서는 탑을 도는 배불의식과 함께 불상과 대웅전을 도는 의례가 발달하였지만,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불상에 108례, 즉 절을 하는 의례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건물을 둘 필요 없이 불상 앞의 공간만이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높은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고, 어렵기만 했던 배불대상이 일반 백성에게 가까운 존재로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귀족불교에서 일반인들을 위한 대중불교로의 변화를 말하고 있으며, 가람이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백성들의 안식처가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후 19세기를 지나면서 개인적 배금주의에 빠진 백성들의 무관심으로 불교는 점차 회복하기 어려운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여 수많은 가람이 폐사하기에 이르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불교건축은 오랜 역사를 이어온 우리 국민의 대표적인 종교건축으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대 불교건축에 대한 단상
여러분들이 전통건축답사를 가면 대부분 전통사찰, 즉 가람을 많이 찾게 된다. 40~50대의 연령층의 사람들은 답사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내가 20년 전에 왔을 때는 이렇지가 않았는데?”라는 말이다. 실제로 20년 전의 전통사찰과 현재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진 수덕사나 부석사, 송광사, 범어사 등의 대가람들은 박물관 건립, 템플스테이 등 각종 행사를 위한 건축물이 많이 들어서고 있어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건축이 시대에 따라 그 사용자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불교건축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건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다만 그 변화과정에서 수백 년, 아니 천년이상을 지켜온 역사적 장소에서는 고려되어야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장소가 가지는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시대에 맞는 변화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보존해야 할 건축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며 단순히 옛 것을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도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전통사찰 변화의 문제는 활용을 넘어 환경파괴에 이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키는 것에 있다. 사용자편의만을 위주로 둔탁한 콘크리트로 거대한 크기로 건물을 짓고 있으며, 문화유산 경관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전문가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 하고 있다. 이미 수많은 유명 대찰들에서 이러한 문제점이 발생하였으며, 현재는 그 문제로 인하여 전에 보지 못했던 산속의 성곽을 만들고 말았다.
아직까지 수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불교건축들이 남아 있다. 지난 20여 년간 이루어졌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동참해서 자연친화적 환경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된다. 건축가들도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그냥 바라만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보존과 활용을 위해 노력해야한다. 하지만 우선 그 노력의 배경에는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전통건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전통건축을 전공한 사람들에게만 맡겨서는 풀기 힘든 문제이다. 모든 건축인이 우리 건축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진정한 전문가가 되어야만 앞으로도 우리건축이 후손들에게 올바로 전승될 것이다.
김상태 Sangtae Kim
필자는 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학과장)로 몸담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미국 UCLA International Institute, Center for Korean Studies에서 POST DOC.연구과정을 밟았다. 주요 논저로는 신라시대 가람의 구성 원리와 밀교적 상관관계 연구, 7ㆍ8세기 동아시아 2탑식가람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노인행태와 주거설계기법에 관한연구 외 다수가 있다. archisk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