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29
공병각. 디자이너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손글씨로 잘 알려진 캘리그래퍼. 손글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따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법한 감수성 넘치는 그의 글씨. 비록 공병각처럼은 안된다 하더라도, 이제 그의 글씨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생겼다. 산돌과의 협업으로 공병각의 손글씨가 폰트로 만들어진 것. CF나 뮤직비디오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그의 글씨를 이제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이다. 이 즐거운 낭보에 많은 이들이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정글에서도 오랜만에 공병각을 찾았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료제공 | 산돌커뮤니케이션
폰트, 그의 생각이 변하다
손글씨의 폰트화. 원래 공병각은 원치 않았었다. 몇 해전 어느 인터뷰에서도 당당히 밝혔다. 그는 폰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손글씨가 가진 아날로그의 감성을 디지털화 한다는 것 자체가 추구하는 작업 이념과 맞지 않았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폰트가 되면 자연스레 자신의 손글씨 영역이나 입지가 줄어들 수 있다는 걱정이 이유였다. 그랬던 그의 손글씨가 폰트로 나왔다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의구심에 공병각은 스스로의 생각이 작년을 기점으로 바뀌었다고 태연하게 말한다. 폰트 제작이 새로운 작업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창 여러 도구와 질감으로 다양한 글씨체를 표현하기 위한 노력과 개발을 하던 중이었어요. 한 글씨체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해왔던 손글씨는 졸업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지난 손글씨는 폰트로 마무리 짓고, 새로운 작업에 중점을 두고 싶었어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제는 공병각의 손글씨가 익숙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러면서 불거진 하나의 이슈는 폰트에 대한 그의 생각을 돌려놓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따로 가르쳐주거나 한 적이 없는데, 제 손글씨를 따라 하는 사람들이 점차 나오더라고요. 어떻게 연습했는지 몰라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써내는 것을 보니, 차라리 폰트로 대중화 시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예 폰트라는 소스가 되어 좀 더 활용도 있게 제 손글씨가 사용될 수 있도록 말이죠.”
산돌과 협업으로 태어난 공병각체
처음 폰트 제작 의뢰가 여기저기서 들어왔을 때 이미 한번 거절했던 터라, 생각이 바뀐 뒤로는 그가 먼저 폰트 회사에 손을 내밀어야 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공병각의 손을 잡아 준 곳은 산돌커뮤니케이션이었다.
2,350자. 한글을 폰트로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숫자. 산돌과 협업을 시작하며 공병각은 이 숫자에 지레 겁부터 먹었다. 일일이 다 써야 되는 거 아니나며. 감성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 없는 게 손글씨인데, 한자 한자 쓴다는 것은 아무리 폰트라 할지라도 너무 기계적인 방식이었을 테니 그가 겁먹을 만도 했겠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손글씨가 폰트가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유연했다. 준비된 문장들을 통일된 글씨로 쓰고 나면, 폰트디자이너가 거기서 요소를 끄집어내어 완성하는 식이었다.
“주어진 문장을 한번에 쓰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어요. 글씨라는 게 복사처럼 계속해서 똑같이 나올 수가 없거든요. 쓰다가 잠시 쉬기라도 하면 앞에 썼던 것과 느낌이 달라지기도 하고요. 그 정도 장문의 글을 한번에 써내려 본 적이 없었기도 했고. 그렇게 끊김 없이 단번에 써야 했던 점이 가장 힘든 과정이었죠. 거의 몇 천 자를 한방에 쓴 거 같아요”
공병각의 폰트는 총 4가지 종류로 출시되었다. 그의 손글씨 감성을 최대한 원본 그대로 표현하려 한 ‘공병각필', 펜의 특징을 살려 가독성을 높인 ‘공병각펜', 매직펜의 두꺼운 질감이 독특한 분위기를 전해주는 ‘공병각매직', 그리고 디지털 환경에 어울리도록 타블렛으로 제작한 ‘공병각타블렛'이다.
폰트는 폰트일 뿐이다
자신의 완성된 폰트를 만나 본 공병각은 그래도 폰트는 폰트일 뿐이란다. 디자인 소스로써 손글씨의 느낌이 다양하게 활용될 수는 있겠지만, 폰트가 된 이상 더는 손글씨가 아닌 ‘손글씨 형태의 폰트’라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의 감성을 담아 종이에 표현하던 분위기까지 폰트가 담아낼 수는 없을 테니. 그러나 반대로 손글씨가 갖기 힘든 폰트만의 장점도 있었다.
“보통 글씨를 쓸 때,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린다 생각하고 약간의 덩어리감을 주곤 해요. 때문에 폰트로 나온 공병각체가 제 손글씨와 완전히 똑같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죠. 대신 폰트에는 정갈한 맛이 있는 것 같아요. 분위기에 치중하며 그때 그때 느낌이 다른 손글씨가 폰트를 통해 하나의 완성본이 된 느낌이랄까요.”
또한 그는 디자이너라면 손글씨 폰트가 있더라도, 손글씨와 폰트의 느낌 양쪽을 모두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일까. 공병각은 이번 폰트 출시와 발맞추어 손글씨 쓰는 법에 대한 책을 펴내기도 한다. 이미 여러 에세이집을 선보이며 작가로도 활동한 공병각. ‘손글씨 잘 써서 좋겠다(양문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이번 책에는 자신의 감성이 아닌 사람들에게 손글씨를 알려주는 ‘팁’을 담아냈다.
“남들이 제 글씨를 따라 쓰는 걸 보고, 그럴 바에 차라리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었어요. 디지털 환경에서는 폰트로, 아날로그에서는 책을 통해 제 손글씨 소스를 제공하는 거죠. 폰트나 손글씨나 서로의 장단점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으면 해요.”
자신만의 글씨를 쓸 수 있다면 이미 캘리그래퍼
공병각 폰트의 출시는 많은 이들이 기다려온 소식이기도 하다. 그만큼 현재 손글씨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는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손글씨 바람에 공병각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의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유쾌했다.
“지금 캘리그래퍼들이 주목 받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글씨를 못쓰기 때문이에요.”
그랬다. 디지털이 이끌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손에 연필을 쥐고 있는 시간은 예전처럼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보니 글씨를 잘 쓰는 캘리그래퍼가 자연스레 부각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어떻게 하면 글씨를 잘 써요?’, ‘캘리그래퍼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하죠?’’와 같이 수도 없이 받아 봤을 법한 뻔한 질문들이 꽤나 불편하단다. 왜냐하면 남들보다 많이 쓰면 잘 써지는 게 글씨이기 때문이다.
“글씨라는게 만 명이면 만 명의 스타일이 다 달라요. 비슷할 순 있지만 똑같을 순 없죠. 각자가 자기만의 서체를 이미 가지고 있는 거에요. 남들이 좋다고 해야 좋은 글씨라고는 생각 안 해요. 어떨 땐 못쓴 글씨가 필요할 때도 있고요. 어설프고 엉뚱한 감성을 담을 수 있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자기 글씨를 사랑하면 되는 거에요. 꾸준히 많이 써봐서 눈 감고도 쓸 정도가 되면, 그땐 남들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죠. 내 글씨가 완성된 것이니까요. 그럼 캘리그래퍼에요.”
그의 말처럼 공병각 역시 캘리그래퍼가 되고자 한 적은 없었다. 디자이너로서 뭔가 새로움을 추구하고 싶었고, 남들과는 차별화된 디자인 소스가 필요했을 때 꺼내든 게 손글씨였던 것 뿐. 손글씨야 말로 자신만의 창작물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창작물을 좋아해주던 사람들로부터 캘리그래퍼라는 타이틀을 자연스레 전해 받게 된 것이다.
언제나 꿈꾸는 새로움
폰트와 책을 가지고 오랜 만에 대중들 앞에 서게 된 공병각. 그의 다음 발걸음은 또 다른 새로움이다. 정해진 것은 없다. 아니, 어떤 새로운 일을 할지 정하는 게 계획일 수도 있겠다. 죽기 전까지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그다. 오늘의 계획은 내일의 새로움을 위해, 다음 달의 계획은 그 다음 달의 새로움을 위해.
“늘 새로운 것을 꿈꾸고, 만들어내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받고 하는 게 즐거워요. 항상 이런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갈 예정이에요. 이게 항상 제가 대답하는 앞으로의 계획입니다.”
자신의 무기였던 기존의 손글씨를 이제 사람들에게 물려주고 떠나는 그의 다음 새로움은 무엇인지 사뭇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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