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양(tyna@jungle.co.kr) | 2015-11-30
어두운 절벽 앞에서 돌을 밀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이쯤에서 그만두자고 하겠지만, 그 앞에 놓인 길이 진짜 낭떠러지인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일이다. 휴렛 패커드(Hewlett-Packard, 이하 ‘HP’)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산업디자인 그룹 매니저(Industrial Design Group Manager) 이일찬 씨는 그 길이와 깊이를 모르고 돌아서느니 돌을 한 번 떨어뜨리고야 마는 타입이다. 한 번 끝을 경험해본 사람은 다음번에 멈춰야 할 지점을 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지레 안 된다고 단정 짓는 사람들을 격려할 때마다 이런 말을 한다. “한계를 넘어 봅시다(Let’s push the envelope)”.
에디터 | 나태양(tyna@jungle.co.kr)
줄줄이 나열된 경력만 보면 화려하다는 생각부터 든다. 산업 디자인 현장에 뛰어든 지 십여 년 만에 HP 휴스턴 본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위를 꿰찼다. HP 노트북 디자인으로 레드닷 어워드, IDEA 디자인 어워드, IF 어워드, CES(세계가전전시회)에서 그랜드 슬램을 세 차례나 기록했다. 성패를 점지하는 능력이 있어 하는 일마다 순풍 가도였다면 듣는 사람에겐 무슨 재미랴. 미 대륙에 막 발을 디뎠을 당시 그는 그래픽 디자인이 디자인의 전부라고 믿던 시각디자인 학도, 게다가 공부를 새로 시작하기엔 제법 나이도 꽉 찬(?) 20대 후반의 토종 한국 청년이었다. 현지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을뿐더러, 햄버거 주문도 못 하고 매장에서 쫓겨날 만큼 영어 실력도 처참했다. 언어, 국적, 환경, 전공. 그가 가진 전부가 지구 반대편에서는 장벽이 됐다.
무서운 게 없어서 미국에 갔나 싶겠지만, 그는 겁 대신 악착스러운 근성을 가졌다. ‘한계를 넘어보자’는 말이 흔해빠진 미사여구로 들리지 않는 것은 그의 비유대로 수없이 돌을 떨구고 한계에 부닥쳐 가며 키운 맷집이 있기 때문이다. 운이 따라준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여전히 ‘세계 시장에 우뚝 선 한국인’이라는 성공 신화보다는 ‘도전가’라는 수식어가 조금 더 잘 어울리는 그다. 그리고 그에게는 디자이너로서 디자이너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깃거리가 있다. 미국의 실무 환경부터 HP 노트북 디자인에 대한 변(辯)까지, 이일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직접 들어 보자.
Jungle : 미국 유학 중에 산업 디자인으로 전향했다. 어떤 과정이었나.
이일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하 이):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잡지사에서 근무하는데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미국에서 특수분장을 공부해보자 싶었다. 딕 스미스(Dick Smith)나 릭 베이커(Rick Baker) 같은 특수분장사들이 어린 시절 나의 롤 모델이었기도 하고. 특수분장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하는 게 정석이지만, 외국인 신분으로는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특수분장 학위 과정이 있는 학교를 일부러 찾았다. 애초에 유학 목적은 산업디자인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게 AIP(Art Institute of Pittsburgh)에서 특수분장을 전공하는데, AIP에는 타 학과 수업을 바꿔 듣는 제도가 있어서 자동차학과와 크로스를 했던 게 계기가 됐다. 자동차 디자인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도 스케치 테크닉을 배우고 모델링 작업을 하다 보니 재미가 붙더라. 담당 교수가 눈금 0.1mm만 틀려도 점수를 깎을 만큼 깐깐한 사람이었는데, 밤을 새워서라도 요구하는 걸 맞춰 가고 타과 학생으로서 나름대로 신선한 시각을 제시하다 보니 예쁨을 많이 받았다. 특히 스포츠 유틸리티와 스포츠카를 융합한 디자인을 제시했을 땐 USS(United State Steel) 자동차 본관 전시품으로 선정될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그 이후로 자동차학과 담당 교수가 밤낮으로 나를 따라다니더라. 넌 ID(Industrial Design)라고, 그거 하고 있으면 안 된다면서(웃음). 끈질기게 설득을 당하는 통에 미국에서 아내를 만난 것도 한 가지 요인이 됐다. 아무래도 특수분장사는 수입이 일정치 않으니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길을 선택한 거다.
Jungle : HP 이전에 코닥(Kodak)에서도 디자이너로 근무했는데.
이: 특수분장도 재밌었지만,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니까 비로소 내 거라는 느낌이 오더라. 공부를 좀 더 하고 싶었는데, 이미 결혼도 한 데다가 부모님 지원을 더 받기도 면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장학금과 RA(재학생 조교)를 보장해준다는 조건으로 RIT(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 대학원에 입학했다. 두 쿼터를 절약할 만큼 학점을 꽉 채워 듣는데도 돈이 금세 동났다. 가정이 있으니 가까운 곳에서 인턴 자리를 알아보려는데 마침 학교 옆에 ‘코닥’이 있었던 거다. 포지션이 없는데도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서 샘플을 보낼 테니 피드백이라도 달라고 했다. 근데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면접을 보게 되고 없는 자리를 만들어 인턴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니 코닥에서 정규직 채용을 제의했다. 사실 코닥이 디자인으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내 인생에 큰 도움을 준 회사고 그곳에서 좀 더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싶어 수락했다. 중간중간 헤드헌팅이 들어오긴 했지만, 6년 차 됐을 때가 모멘텀이었는지 한꺼번에 제의가 몰리더라. 그중 처음으로 면접을 본 회사가 바로 HP였다. 당시만 해도 그린카드(영주권) 때문에 약간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어서 면접 담당자에게 신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이민 문제에 ‘보장’이라는 말은 없다. 하지만 HP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서 서포트하겠다는 것만은 보장하겠다”고 말하는 거다. 그게 좀 감동이었다(웃음). 흔치 않게 현장에서 채용이 결정됐다. 그래서 뒤에 잡혀 있던 면접 다 제치고 HP 생활을 시작했다.
Jungle : 몇 년 새 HP 디자인 철학(design philosophy)이 ‘뮤즈(MUSE)’에서 ‘파이(PHI)’로 바뀌었다. 디자인 철학이 바뀌면 제품에도 영향이 있을 법하다.
이: 2011년 멕 휘트먼(Meg Whitman)이 새 CEO로 부임하고 조직을 개편하면서 ‘One HP’라는 테마가 새롭게 설정됐다. 그때 론칭한 디자인 랭귀지가 ‘파이’다. ‘파이’는 진보(Progressive), 조화(Harmonious), 상징(Iconic)의 세 가지 트랙 서클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난 5년간 각각의 서클이 순차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파이 5세대인 지금은 진보나 조화보다 상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뮤즈(MUSE, Materials, Usability, Sensory appeal, Experience)’는 내가 HP에 막 합류했을 당시 시작된 디자인 랭귀지다. 개별 제품의 디자인이 괜찮고 반응도 좋았지만, 전체 제품군을 놓고 보면 HP만의 통일된 아이덴티티가 드러나지는 않던 시절이다. 지금은 제품을 보면 HP라는 것이 탁 눈에 보인다. ‘One HP’라는 명확한 주제 아래 ‘파이’ 제너레이션을 차근차근 거쳐온 결과다.
현재는 2017년부터 사용될 디자인 랭귀지를 작업 중이다. 이를 위해 12월에는 휴스턴, 영국, 팔로알토, 타이완 등 세계 본사 커머셜 그룹 팀이 런던에 모이게 된다. 2~3주간 대규모 미팅을 통해 인텐시브하게 랭귀지를 작업하고, 지사별로 디벨롭을 거친 뒤 새로운 디자인 랭귀지를 선정하게 될 거다.
Jungle : ‘Envy 14’를 시작으로 노트북 제품에 고릴라 글라스(Gorilla Glass)라는 강화유리 소재를 사용해 주목을 받았다.
이: IT분야의 시간은 유독 빠르게 흐른다. 5년만 지나도 굉장히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사용자에게 좀 더 오래 사랑받는 제품을 만들어보자는 게 내 디자인 철학이다. 디자인은 돌고 돈다고 하지 않나. 단순히 제품의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낀다. 강화유리는 CMF1)에 집중해보자는 데서 출발한 아이디어다. 소재만 바꿔도 리치(rich)한 느낌을 줄 수 있으니까 프리미엄 제품의 차별화 전략으로 도입한 거다. 물론 회사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노트북에 글라스를 쓴다고 하니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고(웃음).
1) CMF: Color, Material, Finishing
Jungle : 올해 출시된 게이밍 노트북 ‘오멘(Omen)’ 같은 경우 표면에 에칭을 새겼는데.
이: 제품 사이즈가 크면 디자인도 어딘가 허전해 보이기 쉽다. ‘오멘’은 컴팩트한 사용감과 큰 화면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14인치 바디에 15인치 스크린을 접목한 제품이다. 그래서 제품이 기본적으로 샤프한 역삼각형 형태를 이루게 된다. 여기다 전면에는 삼각형 패턴의 에칭을 넣었고, 자세히 보면 바디 후면에도 패턴이 들어간다. 패셔너블한 사람들은 벨트, 양말, 언더웨어처럼 안 보이는 곳까지 다 신경 쓰지 않나. 어차피 밑판은 편평하건 아니건 바디에서 발산되는 열(thermos) 때문에 항상 떠 있어야 하니까 삼각형 3D 패턴으로 장식해보자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미친 사람 취급 받았다(웃음). 이 패턴이 다 CNC 공정으로 깎은 건데, 삼각형 펀칭 툴 제작부터가 쉽지 않으니까 엔지니어들도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제품이 나온 걸 보니 아무도 디자인에 토를 안 달더라. ‘판타스틱’ 하다면서(웃음).
Jungle : 일각에서는 ‘ENVY’ 라인이 타 회사 제품의 영향을 받지 않았느냐는 평가도 있었다.
이: 산업 디자이너라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디자인 형태를 특정 개인이나 회사가 전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컴퓨터 제품 같은 경우 도형이 한정되어 있고 부품 같은 외부적 조건에도 영향을 받는다. 디자인하면서 ‘어? 이거 타 회사 제품이랑 비슷한 느낌이다’라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개의치 않는다. 하다 보면 닮을 수도 있고 그게 의도한 바도 아니니까. HP에는 고유의 디자인 철학이 존재하고 우리는 명확히 설정된 목표에 몰두할 뿐이다.
Jungle : IT 제품 디자인 특성상 기술 변화와 보조를 맞춰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는 그래픽 디자인이 확실히 자유도가 높을 텐데.
이: 반대로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지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그래픽 디자인은 중요한 덕목이다. 개인적으로는 디자이너 이력서를 볼 때 그래픽 디자인이 제대로 안 돼 있다 싶으면 드롭할 정도다(웃음).
HP 제품에 워딩을 넣어보자고 처음 제안한 것이 나다. 원칙적으로는 기존 아이덴티티가 있으니까 공간이 있어도 워딩을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리끼리는 ‘미트볼’이라고 부르는데(웃음). 내가 보기에 서클 로고는 얇고 좁은 모니터 프레임 사이 공간에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미트볼’을 워딩으로 교체하자고 푸시를 했다. 결과적으로는 워딩이 훨씬 고급스럽기도 하고 소비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금은 워딩이 제품 전면에까지 들어갈 만큼 발전했다.
그 배경에 그래픽 디자인이 있다. 공간 비율이 어떻게 맞아야 하고, 이런 컬러를 쓰면 대비 효과가 있고, 다이아몬드 커트를 했을 때 유광/무광의 비율은 어느 정도가 좋고……. 이런 문제들은 그래픽 디자이너가 가장 잘 안다. 그래픽 스킬 없이는 산업 디자인도 만족스럽게 성취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팀원들에게도 어디가 허전하거나 모자란 것 같으면 그래픽으로 채우라고 이야기한다.
어찌 보면 그래픽 디자인과 특수분장으로 시간 낭비를 했다고 하겠지만, 산업 디자인 경력보다 상대적으로 승진이 빨랐던 것은 두 백그라운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2D 디자인을 3D에 반영하면 굉장한 시너지가 나온다. 나는 그래픽 디자인 스킬을 바탕으로 특수분장을 공부하면서 손으로 입체를 익혔다. 그러고 나서 컴퓨터 3D 모델링을 잡으니 머릿속 아이디어가 제대로 구현되는 거다. 그런 면에서 크로스오버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Jungle : IT 기기 시장에서는 포터블함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소형화만 답도 아닌 것 같다. 6~7년 전만 해도 각광 받던 ‘넷북’은 이제 사장되었고. 앞으로 노트북 디자인의 변화를 어떻게 전망하는가?
이: 소비자에게는 태블릿이 아무리 성능이 강해도 컴퓨터의 역할을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심리가 있다. 그 심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디태쳐블(detachable) 태블릿도 성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제품을 컴퓨터 용도로 사용할 때 만큼은 컴퓨터라는 느낌을 줄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접근해보기도 했다. 패브릭 소재를 써서 닫았을 땐 모빌리티가 강조되지만, 스크린을 열면 메탈 키보드가 등장하는 ‘스펙터x2(Spectre x2)’가 그런 케이스다. 이런 실험적 아이디어들이 디자인으로 연결된다.
이동성(mobility)과 개인화(personalization)가 점점 더 강조되는 건 맞다. 그래서 포터블은 언제나 큰 과제다. 무게나 그립감에도 신경을 많이 쓰게 되고. 산업 디자이너라면 디자이너 본인보다는 소비자를 위해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소비자의 현재 요구에만 맞추면 디자인이 다소 평범해질 수도 있으니, 그 니즈를 먼저 발굴해서 소비자를 이끌어야 한다. 그래서 ‘스펙터x360’ 같은 모델은 태블릿 모드, 텐트 모드, 360도 회전각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이런 제품을 개발하면 수고스럽기도 하고 예산도 높아지지만, 소비자들에게 더 나은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면 최대한 시도해 봐야 한다.
Jungle : 그 ‘모빌리티’ 때문에 소위 ‘울트라북’이라고 하는 초경량 노트북이 트렌드가 됐다. HP 제품의 경우 조금은 무겁다는 평이 있는데 경량화보다 우선시하는 가치가 있는 건가.
이: 가장 가볍게 만드는 방법을 ‘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니다. 소재 얘기를 하자면 마그네슘이 월등히 가볍다. 그런데 마그네슘을 쓰면 피니싱 단계에서 완성도가 떨어진다. 쉽게 말해 프리미엄 라인으로 안 보이는 거다. 그렇다고 다른 특수 재료를 쓰려면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가격이 크게 올라간다. 일종의 딜레마다. 퀄리티가 낮은 소재를 써 놓고 프리미엄 제품이라 우길 수도 없지 않나. 여태 나온 제품들은 최선의 조합을 선택한 결과다. 물론 우리도 꾸준히 메탈 스터디를 통해 가벼우면서도 완성도를 높일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지금까지는 프리미엄 라인에 알루미늄을 사용해왔는데, 앞으로는 조금 다른 소재들이 시도될 것 같다.
Jungle : 게이밍 노트북 디자인의 공통점은 화려함인 것 같다. 게이밍 노트북에 흔히 들어가지만, 그 기능은 모호한 키보드 백라이트도 그렇고. 사무용 노트북과는 다른 전략이 있을 듯한데.
이: ‘오멘’의 경우 하이브리드를 겨냥한 제품이다. 모빌리티를 강조하면서도 게임을 구동시킬 수 있는 제품이라는 목표는 제대로 달성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게이머 입장에서는 여전히 중량보다는 ‘스펙’이다. 이후 ‘오멘’ 테마의 데스크톱도 출시될 텐데,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면서도 강력한 스펙에 좀 더 무게를 실을 예정이다.
나 자신도 게임광이 아니라 게이밍 노트북 디자인 프로세스가 쉽지만은 않다. 고객층을 파악하기 위해 ‘게임에 미쳐 산다’는 사람도 많이 만나봤다. 인터뷰와 리서치 양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그들이 특히 화려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키보드 백라이트 같은 경우 키보드 사용이 잦은 유저를 위해 조닝(zoning)을 제공한다는 기능적 측면도 있다.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해서 방향키로 많이 쓰는 ASWD 네 개 버튼만 다른 색으로 조명을 줄 수도 있고.
물론 나의 개인적 미감과 딱 들어맞아서 게이밍 노트북을 디자인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왜일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게이머들에게는 그들만의 세상이 있다. 그럼 인정해야 한다(웃음). 의미 있는(meaningful) 디자인으로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것이 내 일이니까.
Jungle : 최근 작업한 프로젝트에는 어떤 것이 있나.
이: 지난 11월 8일 엔비 노트 8(ENVY note 8)이 출시됐다. 가격대가 저렴하고 노트 기능에 중점을 둔 대학생 타깃의 제품이다. 스크린 너비가 8인치면 풀 사이즈 키보드와 맞지 않고, 스크린 사이즈에 맞추려면 키보드가 불편할 만큼 작아진다. 어차피 대학생이 들고 다니려면 스타일도 좋아야 하니 코어한 효과를 넣어보자고 풀 사이즈 키보드를 넣되 하우징으로 디자인했다. 스크린을 슬라이딩으로 도킹할 수 있고, 본체와 분리도 물론 가능하다.
Jungle : 미국 유학이나 현지 근무를 꿈꾸는 디자이너들에게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잠시 언급한 것처럼 신분 문제도 만만치 않을 텐데.
이: 미국에서는 신분 문제가 가장 어렵고, 안타깝기도 한 부분이다. 요즘은 예전보다 진입 장벽이 더 높아졌다. H1B(취업비자) 프로세스가 있기는 하지만, 그 절차가 굉장히 까다롭다. 쿼터제 때문에 취업 비자 허가율이 25%를 넘지 못한다. 신청자 4명 중 1명만 비자를 받는 거다. 회사 차원에서도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을 고용하는 이유를 수백 가지 작성해서 제출하는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하는데, 25%의 확률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하라면 당연히 기피할 수 있다. 그래서 학생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편이 될 수 있다.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면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 비자가 나와서 조건에 따라 1년에서 1년 반 정도의 체류 기간을 준다. 그럼 미국 회사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역량과 실력을 갖추면 길이 열리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필요하다 싶으면 회사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데리고 온다. 신분 문제가 있다? 위 선의 위 선에 물어서라도 채용으로 연결시킨다.
Jungle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면 디자이너와는 또 다른 직무 역량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역할이 많이 달라진다. 아무래도 간부급이고 결정권이 생기기 때문에 결정 상황에서 압박을 많이 받는다. 내가 혹시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닐까 싶고.
제품도 너무 많다. 4년 전 수석 디자이너(Principal designer)였을 때만 해도 내가 맡은 카테고리만 열심히 하면 잘 됐다. 지금은 당시보다 두 단계 정도 승진한 셈인데, 내가 맡았던 프리미엄 제품군보다 네다섯 배 큰 컨수머 그룹 전체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다. 디자이너였을 땐 프로젝트가 아주 많아야 네 개, 액세서리 포함하면 대여섯 개 정도였는데 지금은 뭐……(웃음).
나의 완벽주의 성향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다. ‘스펙터x360’을 디자인할 당시만 해도 2주 동안 중국 공장에 머물면서 사람들 압박하고 피니시 맞추고, 작은 일 하나까지 직접 나서서 신경 썼다. 그런데 지금 자리에서는 내가 몇십 명이 있든지 잠을 자지 않고는 불가능하다(웃음). 그래도 나는 천상 디자이너라 아이데이션(ideation)이나 스케치 세션까지는 참여하려고 한다. 3D 데이터로 빌딩해서 렌더링 들어갈 때부터는 디자이너한테 맡기고.
Jungle : 커뮤니케이션 스킬도 무시 못 할 요소일 텐데.
이: 그렇다.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잘하면 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본인이 디자인한 제품을 팔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부사장이자 디자인 치프(Chief)인 스테이시 울프(Stacy Wolff)가 존경스럽다. 디자인 센스도 엄청나지만, 채널에 어필하는 능력이 가히 천재적이다. 상대방에게 확신을 주고 설득하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옆에서 많이 보고 배웠다. 스테이시는 내가 HP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림만 잘 그린다고 디자인 잘 하는 건 아니다. 미학적인 측면에서만 보면 디자인은 본인이 어떻게 노력하고 분석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나올 수 있다. 콘셉트 스케치만 하고 끝낼 게 아니라 양산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콘셉팅 단계에서 스토리텔링 요소가 들어가야 하고, 그 바탕에 표현 능력이나 언어 구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신의 디자인을 판매로 연결시키는 것 또한 디자이너가 갖춰야 할 하나의 소양이라는 생각이다.
Jungle : 도전적인 시도들을 계속해 왔다. 주변에서 계속 ‘안 된다’고 하면 주저하게 되진 않는지.
이: 한 번 타깃이 생기면 포기를 잘 안 하는 성격이라 그렇다(웃음). 처음부터 엔지니어들과 100% 마음이 맞아서 제품이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서로 가치관이 다른데 한 제품을 놓고 일하려니 의견 대립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그 충돌 과정을 얼마나 슬기롭게 헤쳐나갔는지에 따라 제품의 퀄리티가 결정된다. 엔지니어들과 충분히 대화하면 서로 이해를 못 할 부분은 없다. 개발 과정에서 디자인이 차지하는 존재감이 예전보다 커진 것도 사실이고. 매커닉 엔지니어들, 일렉트로닉 엔지니어들, 모두 디자이너의 얘기를 들어주고 맞춰주려고 하는 분위기다. 물론 조정은 하지만, 디자인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거다.
Jungle : 크리에이티브도 어떤 인풋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필드에서 늘 시간에 쫓기다 보면 따로 영감을 충전할 시간이 없을 것 같다.
이: 맞다. 좀 더 젊은 디자이너였을 땐 웹 서핑을 하든 책을 보든, 매일 꼭 한 시간은 필요한 부분에 투자했다. 요리사도 가진 재료가 없으면 좋은 요리를 할 수 없듯이 디자이너에게도 재료가 많아야 한다. 나의 경우 건축물에서 영감을 많이 받곤 했다. 건축물처럼 거대한 매체에서 받은 영감을 작은 제품에 응축시키면 디테일이 뛰어나다. 그래서 상하이를 좋아한다. 상하이는 20세기 중반의 고전적 분위기와 2020년, 2030년의 미래적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다. 일단 땅이 넓으니까 디자이너들이 아티스틱한 빌딩들을 맘껏 세우기도 하고.
지금은 예전만큼 자기 계발에 시간을 쏟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업무량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 다섯 시간도 못 잔 지가 몇 년 됐다. 체크를 한다고 해도 순식간에 메일이 수백 통씩 쌓이니까. 대신 주변 환경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직업병 수준이다. 글로 기록하면 오히려 틀에 갇히는 느낌이라 머릿속으로만 기억해도 언젠가는 쓸모가 생긴다. 그래도 부족하다 느낀다.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큰 고충이라고 할 만큼(웃음).
이일찬 디렉터는 무엇보다도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일을 찾으라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픽 디자인에서 특수분장으로, 특수분장에서 산업 디자인으로 거처를 옮겨 온 그는 본인을 ‘행운아’라 표현했다. 몸에 딱 맞는 옷을 발견하는 과정은 방황이라기보단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이 디렉터에게 ‘내 일’을 찾으면 직감적으로 확신이 오느냐고 묻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바로 느낌이 온다”고 한다. 몸이 고돼도 기쁘게 일할 수 있는 ‘평생의 업’을 만나는 것. 절벽 앞에서도 겁내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는 이유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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