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9-18
글을 쓰는 것도 일종에 손의 노동이라..
연신 손을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서 기록을 하지 않다 보니, 당연히 나와는 거리가 먼 소품이 노트였다.
허나, 자꾸만 엉키는 나의 단순뇌세포와 분실해가는 일들을 절절히 경험해가면서, 어느새 나도 노트를 지니게 되었다. 해야 할 일과 기억해야 하는 숫자들, 그리고 내가 만나본 이들의 이야기들을 빼곡히 적다보니, 노트는 어느새 나만의 책이 되어갔다.
견물생심이라.. 노트를 소유하게 되다보니, 어느새 노트에 욕심이 생겨 버렸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많은 지면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틈만 나면 노트를 찾아 거리를 헤매곤 한다.
그러나,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원리를 발견한 뉴턴처럼,
목욕탕에서 왕관에 들어간 순금의 무게를 잴 방법을 생각해내고 ‘유레카’를 불렀던 아르키메데스처럼 딱 맞는 것은 우연히 발견된다.
(다소 거창하지만, 내 맘에 드는 노트를 발견했을 때, 나는 이런 느낌이 든다.)
자료조사를 위해 찾아간 곳, 찾는 자료보다 더 먼저 찾은 것은 우리나라 전통 이불천으로 제본된 노트, 바늘땀으로 눈코입을 만든 동그란 얼굴이 떠억하고 붙어있는 노트, 드문드문 감침질로 마감된 노트 들이었다. 손으로 한땀 한땀 따내어 멋스럽고, 천이라는 소재의 촉감으로 포근한 노트들이 장롱안의 차곡히 개여있는 이불마냥 놓여있었다.
누구야? 누가 이걸 만든 거야?
처절한 외침 끝에 내가 발견한 것은 노트 안에 들어있는 ‘식은땀’이라는 메모 한 장!
나는 그렇게 식은땀을 찾아가게 되었다.
식은땀과는 무엇보다 섭외방법이 기억에 남는다.
식은땀의 연락처를 수소문한 끝에, 몇 다리를 건너건너 내가 받은 것은 메일 주소뿐.
식은땀은 전화도 없고, 그 흔하다는 핸드폰도 없단다.
반신반의하며 보낸 메일, ‘작업실 구경가고 싶습니다’에 회신이 왔고, 그 후 방문일정을 정하고, 방문전날 약속을 확인하고, 찾아오는 길을 설명 받는 모든 일은 메일로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인터뷰 섭외는 기자와 디자이너가 처음 만남을 가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어색함도 줄이고, 확실한 약속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관례상 전화로 인사를 드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메일로만 진행된 섭외는 그 방법으로 인해, 나는 식은땀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순도 100%의 호기심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 취재: 이정현기자 / tstbi@yoondesign.co.kr
작업실 소개에 앞서 식은땀에서 제작한 노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작업실을 찾아가기 전 내가 식은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이 노트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다녀온 후기를 쓰기에 앞서 작업실이 어떠했다고 쓰는 것보다 이 노트와 같은 작업실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하다.
노트 앞에 달린 얼굴이나 표지 속 그림, 그리고 이불천으로 마감된 포장에서 느껴지는 5,60년대의 정취처럼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은 그러했다.
+ 위의 그림과 사진은 식은땀의 홈페이지 getgotgot.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식은땀이 보내 준 약도와 찾아오는 길을 설명해 준 글
‘어.. 저기 정유있네!’
‘어.. 이게 작은 슈퍼인가.’
‘음.. 여기구나’
찾아가는 길 내내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지만, 옆에서 안내해주는 듯했다.
참으로 자상한 안내였다.
대로변에 나있는 현관문을 열면, 식은땀의 작업실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상과 문패가 있다.
여기가 약도에 있었던 1층이다.
안쪽에 슬쩍보이는 싱크대나 바닥이 다 들어나는 장판 등..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듯한 분위기에 놀랐고, 조금은 당황했다.
그리고, 2층에 올라가서야 이곳에 작업실을 정하게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좋았던 이유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식은땀 작업실에는 전화가 없다.
익히 알고 있는데.. 뜬금없이 전화기가 있다.
그것도 수화기가 아주아주 묵직한 옛날전화기..
전화기 가운데는 그 전화기의 번호가 있기 마련인데..
식은땀 작업실 전화기에 번호가 있을 리 만무하다.
대신, 단발머리 안경 쓴 아이 얼굴..
이 사람이 바로 식은땀을 비지땀나게 운영하고 있는 우지현씨이다.
현관 옆에 걸린 긴 거울
집을 나설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살펴 볼 수 있도록 으레히 현관 앞에는 거울이 있기 마련이다.
거울을 보니, “오늘 내 모습 어때? 좋지?”하고 폼을 재고 있는 듯한 여인이 있다.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지금 나도 그 여인처럼.. 어깨 쭈욱 피고, 가슴 펴고.. ‘나 어때?’하고 있지 않은가..
유쾌하다!
식은땀을 운영하는 이의 이름은 우지현이다.
앞서 전화기에서 보았듯이,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조금 작은 체구의 여인이었다.
회사를 다니다가 작업실을 차려 놓고 보니,
일일이 챙겨하는 일과 계산해야 하는 일도 많고.. 막상 사는 게 만만치 않더란다.
말그대로 등에 ‘식은땀’나는 일이 매일매일 있어서, 작업실 이름을 식은땀이라고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명함에 글귀가 절절하다.
‘요즘 사는 거 어떠냐구?’
명함을 받고 내 명함도 내밀어야 하는데..
왠지 내 인사보다는 이에 답해야 할 것만 같아서, 한참을 고개 숙인 채 생각했다.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까?
말그대로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처음 식은땀의 작업실은 이곳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사무실 건물에 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작업을 하면서 갇힌 느낌을 버릴 수 가 없었고, 작업실의 이사를 감행하였다.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 버스안에서 매일 보던 집이 바로 이 작업실이었다.
이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찍어둔 집이 있음을 알렸고, 2층 대리석집이라 호언장담했는데..
집보러 온 날, 외진 곳에 허름한 벽돌집인데다 사람의 관리가 뜸한 듯하여 모든 사람들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책 미술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작업을 하고 싶으니, 연락을 주세요”
라는 메모를 남기고 돌아온 것이 지난 겨울이었고, 그렇게 이 작업실에 오게 되었다.
“이 집 왜 좋으세요?” 하고 묻자
“글쎄요..” 답하며, 덧붙인 말
“이 집은 빛새는 집이에요. 이 집은 허름할 뿐만 아니라 붕괴직전이에요. 그래서, 벽의 갈라진 틈사이로 빛이 들어와요. 해질녘에 불끄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빛이 사악 하고 들어온답니다”
2층 작업실도 1층 만큼이나 작았다.
연두색 흑벽, 갈색 나무바닥, 고동색 나무기둥, 나무 창틀, 낮은 천정, 조금 어두운 조명..
어릴 적 시골 큰집에 갔을 때 보던 그 방이었다.
‘노트와 같은 공간에 있었구나’
투닥투닥 안마손
노트 외에 제작하고 있는 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것은 안마손이다.긴 손잡이가 있어서 손을 뒤로 넘겨 두들기면 제법 시원하다.
내가 얼굴로 보이냐
지점토로 제작한 소품들이 작업실 곳곳에 있다. 작업실을 지키는 사자들이다.삐죽거리는 얼굴, 넙적한 얼굴, 푸른 얼굴들이 가득하여 보니, 향꽂이란다.‘아~아’하고 벌린 입에 향을 꽂는다.
작업실 벽마다 자잘하게 메모들이 많다.
가만히 내용을 보니, 일기같다.
간단한 그림과 함께 한 일에 대한 흔적을 붙여 놓았다.
같이 한 사람들이 작업실에 온다면, 참 기분 좋을 것같다.
재봉틀이라는 공식명보다 미싱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물건.
원래 바느질을 잘 했느냐는 질문에 ‘전혀 못했어요’라며 손을 내젓는다.
원래 딴 생각이 있거나 하기 싫으면 할 수 없는 건데.. 꼭 해야한다고 생각하니 미싱 다루는 것이 수월해졌다고..
미싱을 배우고 싶은 분께 2가지 얘기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첫째는 ‘미싱 바늘에 실끼우는 것’을 잘하자.
둘째는 ‘늘 자신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기성품은 정확하게 재단되어 있는데, 자신이 한 것은 그렇지 않은 게 허다하며 이것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지현씨가 해 준 기억에 남는 말은 ‘괜찮아’다.
허술하지만 그 허술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작업하면서 ‘괜찮아’라고 말해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량생산되어 나오는 제품의 특성은 너무도 정확하고, 너무도 정리되어 있다.
정확한 사물에서 오는 강박관념들. 이를 풀어주는 것이 식은땀의 작업들이다.
아래의 그림은 식은땀의 우지현씨가 ‘작업실이모저모’에 보낸 메시지이다.
‘요즘 사는 거 어떠냐구?’
물어본 식은땀의 대답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