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31
국내에서 유일하게 디자인평론가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한국 디자인을 통찰해온 최범. 그가 10년 동안의 저작물을 엮어냈던 첫 디자인 평론집에 이어, 불과 2년 만에 두 번째 평론집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를 펴냈다. 이 책은 다사다난했던 지난 2년 간의 한국 디자인계를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다.
에디터 | 이상현(
shlee@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한국>
최범은 디자인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전면에 걸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학계와 업계, 저널과 기관 등 다양한 주체들이 디자인에 대해 설명하고 주장하고 논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 디자인’에 대해 그처럼 오랫동안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해온 이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가 천착하는 한국 디자인이란, 한국적 디자인 스타일에 국한된 말이 아니라 바로 한국 디자인의 ‘현실’이다.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이 땅의 디자인, 그 현실과 정직하게 마주서기 위해 그는 두 눈을 부릅뜬다.
“디자인평론가로서 나의 일차적 관심은 ‘한국 디자인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이라는 사회 내에, 우리 것과 외국 것, 짬뽕과 오리지널, 고급한 디자인과 디자인이라고 부르지 않는 시장 바닥의 것들까지, 이것저것이 한데 섞여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는 이 현실 말이다.”
심도 있는 눈으로 그간 한국 디자인의 여러 층위를 통찰했던 최범은, 많은 사건 사고가 속출했던 한국 디자인의 지난 2년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디자인계에 관심과 수혜가 쏟아졌던 시간, 낙관적인 미래를 내다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시간, 샴페인이 흐르고 폭죽이 터졌던 이 시간을, 최범은 ‘한편의 쇼였다’라고 일축한다. ‘산업을 위한 디자인에서 삶을 위한 디자인으로의 이행’, ‘삶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한국 디자인’을 말해왔던 그로서는, 여전히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하고 애드벌룬마냥 둥둥 떠오르고만 있는 한국 디자인을 망연히 올려다 보며,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라는 탄식 조의 말을 쏟아낼 수 밖에 없었을 터. 그리고 주머니 속 송곳처럼 뾰족한 말이 이어진다. “한국 디자인이 급기야 산업의 도구를 넘어서 정치적인 선전 선동의 도구로 화하고 있다.”
최범이 말하는 디자인의 정치적 도구화는, 세계화 논리 속의 디자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는 세계화 이후 우리의 디자인 담론이 크게 증폭했지만, 정작 현실은 별반 달리진 것이 없다고, 어찌 보면 더 빠졌다고 꼬집는다.
“최근 한국 디자인의 두드러진 변화와 흐름은 바로 ‘세계화 논리 속의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10년 전부터 세계화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를 휩쓴 화두였다. ‘세계 일류도시’와 같은 선동적 구호를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이 말대로 과연 우리는 세계 일류도시에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렇듯 한국 사회에서 세계화란, 현실과 동떨어진 채 ‘실체 없는 구호’로만 역할하고 있다. 한국 디자인도 예외 없이 세계화를 부르짖는 상황이 됐는데, 한국 디자인의 현실 역시 전혀 세계적이지 않다. 차라리 ‘세계화를 떠드는 디자인’이 아닐까.”
여기서 그가 말하는 한국 디자인의 세계화는, ‘글로벌 디자인’과는 구별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디자인이란 삼성이나 LG 등의 대기업들이 세계 시장을 타깃으로 생산하는 디자인을 말한다. 그러니까 삼성 애니콜의 해외 진출을, 곧 한국 디자인의 세계 진출로 확대 해석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세계화가, 글로벌 기업이 성공한 제품 몇 개를 만드는 것으로 완성되는 걸까. 이는 엄밀히 말해 기업 디자인의 성과로 평가되어야 옳다. 막말로 뜻도 모른 채 너도나도 마냥 세계화를 떠들고 있는 형국이다. 의미 없는 말들이 한국 디자인계를 공허하게 뒤덮고 있다.” 최범은 이렇듯 세계화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넘어서, 좀더 구체적으로 한국의 디자인 현실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는지 정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세계화를 떠든 지난 2년, 그가 평가하는 한국 디자인의 현실은 세계화는커녕 오히려 더욱 부박해졌다.
“이렇게 빈 껍데기 세계화를 외치는 지금, 상대적인 균형 잡기를 위해 한국 디자인의 현실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디자인계 내부에서 세계화에 대한 목소리는 범람하는데, 정작 한국 디자인에 관해서는 신기하리만치 말이 없다. 디자인 저널이나 대학 교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계 디자인 흐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하지만, 정작 자기 집 앞의 쓰레기통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물론 세계 디자인의 흐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자기 집 앞 쓰레기통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거다. 나는 이 불균형, 이 모순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화와 함께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지역화’에 눈을 돌린다. 지방 자치제와 더불어 ‘지역의 정체성 찾기’에 골몰했던 지자체들은 가장 손쉬운 해결사로 디자인을 호출했고, 결국 지역 디자인의 수준이 크게 떨어져버린 결과를 초래했다고 그는 평가한다. “생뚱맞은 CI와 캐릭터, 보기 싫은 간판과 가로등은 결국 문화의 획일화와 이미지의 평준화를 야기했다.” 최범은 이를 ‘한국 디자인계의 무능력’이라고 말한다. 기업 디자인과 지역 디자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작부터 달라야 하는데, 오로지 비즈니스적인 접근으로 일관했다는 것. “결국 한국 디자인계의 무능력은 관료주의 미학을 나라 곳곳에 뒤덮은 꼴을 만들었다."
오랜 시간 ‘공공 디자인’의 중요성에 대해 고민했던 그다. 공공 디자인을 산업으로서 종주하는 한국 디자인의 개념을 확장시킬 중요한 화두로 제시해왔다. 따라서 공공 디자인이 현실과 분리된 채 지역 정치의 도구로 전락하고 마는 작금의 세태가 오랫동안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첫번째 평론집에서, 전에 이야기되지 않았던 공공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낙관’했던 최범은 지난 2,3년간의 한국 디자인계를 지켜보며 거의 ‘낙담’에 빠지게 됐다. “전혀 아닌 일이 태연하게 앞에서 벌어지고 있을 때의 어이없음과 당혹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디자인의 순수한 개념을 다르게 오역하고 있는 모순에 가득 찬 현실을 지켜보며, 그 예로 정치 디자이너의 출현을 이야기한다.
“한국 디자인계의 변화의 지점을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최근 굉장히 문제시 되는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정치적인 디자이너의 출현이다. 나는 'Poli-designer’라는 단어로 정리하는데, 이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정치와 야합하는 디자이너들을 지칭한다. 나는 디자인과 정치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며, 좋은 의미의 정치적인 디자이너의 역할도 긍정한다. 하지만 한국 디자인계에 출현한 작금의 정치적인 디자이너들은 한국 디자인 발전 전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전혀 관심 없는 채로 정치권에 기꺼이 이용당하는, 권력과 결탁하는 사람들이다.
몇 년간 한국 디자인에는 대형 이벤트들이 속출하고 있다. 책에서나 봤던 유명 디자이너들과 그들의 작품을 이 땅에서 직접 만날 수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를 세계화의 한 예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다만 그 이벤트의 내용이 뭐냐, 누구에게 이익이 되느냐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벤트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해외 디자이너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파워 디자이너들인데, 그들의 행보를 살펴보면 자신의 권력 키우기와 연결이 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디자인올림픽’의 주인은 시민도, 디자이너도 아니었다. 그것은 디자인적인 쇼도 아니었고, 순수하게 정치적인 쇼였다. 정치적인 쇼를 위해 디자인을 이용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치적인 디자이너들의 불순한 야합이 있었다. 그간 한국 디자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었는데, 정치적 디자이너의 출현은 앞으로도 중요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디자인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디자인이 실체성과 목적성을 상실한 채 한편의 쇼로 소비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디자인의 개념에 대한 몰이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범은 이번 두번째 평론집
<한국 디자인 어디로 가는가>
에서 가장 먼저 용어의 정의를 통해 생각과 주장을 설득력 있게 구체화하고 있다. 디자인에 관한 용어 정의는 개념과 인식의 확산을 불러일으킨다. 다양한 신조어가 양산되는 지금, 그 뜻을 모른 채 단지 구호화되고 있는 한국 디자인계의 모습은 결국 개념과 인식의 부재, 나아가 그릇된 해석과 오남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한국 디자인계는 정확한 뜻과 함의도 모른 채 말을 쓴다. 특히 오용되고 남용되는 대표적인 말이 ‘디자인산업’일 것이다. 그 말이 맞냐 틀리냐,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 생각 없이 무차별적으로 디자인산업을 떠든다. 아마도 이 말을 ‘얼짱’ 정도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냥 갖다 붙여 쓰면 멋져 보인다고 여기는 걸까. 말을 의미론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장식적인 효과로 사용할 때, 개념과 인식은 생겨날 수 없다. 한편, 한국 디자인계에서 새롭게 떠오른 말은 바로 ‘디자인문화’와 ‘디자인정책’일 것이다. 이 용어는 불과 몇 년 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디자인산업과 마찬가지로 최근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얼마 전 디자인정책 관련 모 학회가 있어 봤더니, 디자인정책을 연구할 능력이 없는 구성원들이 모여 만든 것이더라. 디자인정책 학회라면 관련 논문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일종의 침바르기를 했구나 싶더라. 이렇듯 현재 한국 디자인계는 바람잡이들, 기회주의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통해 디자인문화가 무엇인지, 한국 디자인정책의 나아갈 방향성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물론 내 생각과 주장에 대해 동의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재하는 게 한국 디자인의 현실이다.”
한국의 디자인평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외로운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편으론 ‘너무 짜릿하다’고 눙치듯 이야기한다. 한국 디자인에 플러그를 꽂고 그 혼선의 현실을 짜릿짜릿해 하며 반응해온 디자인평론가 최범. 전구빛처럼 환한 진실을 앞으로도 밝혀주길 응원한다.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