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27
서울에서 먼 지방일수록 공공의 적으로 몰릴만한 공공디자인이 자주 눈에 띄게 되는데, 비난하는 디자이너의 터전은 모두 서울이다. 그때마다 어떤 ‘불균형’을 고민하게 된다.
기울어진 저울을 수평으로 맞추려는데 올릴 가장 무거운 추는 문화체육관광부가 부산 서면에 지원하는 도시 계획 사업일 것이다. 서면의 거리를 특화 시키는 사업의 총책임을 맡은 동의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박광철 교수를 만나, 부산다운 거리를 위해 그가 구상중인 묘책을 들어 보았다.
에디터ㅣ 이안나(anlee@jungle.co.kr), 사진ㅣ여승민
부산의 ‘서면’은 옛 행정구역명이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에 있는 부전동(釜田洞)으로 동쪽은 전포동, 서쪽은 당감동, 남쪽은 범천동, 북쪽은 범전동과 접해 있다. 하지만 해운대 앞바다에선 그 모두를 통칭해 서면이라고 부른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옛 명동과 닮아 있다. 패션과 유흥이 혼재된 젊음의 도시이면서 동시에 어학원과 금융권이 밀집되어 있다. 동 떨어져 보이는 이것들을 한데 모아, 어울리게 제 자리를 찾아주는 일은 여실히 그의 몫이다.
부산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이제 딱 14년을 채우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오히려 서울이 멀게 느껴지겠지요. 서울과 부산을 일주일에 너덧 번 오갑니다. 서면 거리조성 사업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진행하는 관계로 사업을 계획하고 조율하기 위해 서울에 가는 일이 대다수지요.
서면의 거리이 눈에 띄는 점은 건물에 입주한 사업체의 업종이 모두 같거나 비슷한 점입니다
씨족사회 마냥 건물의 층층마다 죄다 치과거나 성형외과예요. 아마 편리를 위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특색 있는 거리가 아닌 만큼, 건물이라도 통일성을 주어 고객을 유치시키려는 것이지요.지금은 발 디딜 틈도 없습니다. 대신 지중화가 잘 되어있고 지역주의가 크지 않아서 핸들링을 잘 하면 거리 개선 사업하기 좋은 도시이기도 하지요.
지금 하시는 사업을 설명해 주세요
요즘 경향인 토털 디자인 개념의 특화거리 사업입니다. 녹생성장의 기반을 조성하는 첫 단계로 공공시설, 공공매체, 공공공간을 종합적으로 정비합니다. 2009년부터 시작하는 4개년 계획이지요.
얼마나 진행됐나요
70~80% 정도 사업계획안이 완성됐습니다.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젊음의 거리 7일원(서면교차로 - 부전도서관 - 피에스타 - 메디컬거리)이 사업대상지로, 부산 젊음의 거리로 대표되는 서면을 ‘젊음이 만나는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 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특화된 거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콘셉트가 필요한데 서면은 ‘사랑, 우정, 약속 & 열정’이라고 정했습니다.
서면은 해운대를 비롯해 먹거리, 놀거리가 밀집된 젊음의 거리로 수많은 인파가 몰리지만, 그 수를 충당할 기반시설이 취약했습니다. 또한 아까 말했듯이 건물 전 층이 성형외과나 치과일 정도로 의료시설이 잘 마련돼 있지만 일본처럼 의료 관광객을 유치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거리를 잘 조성해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서 무엇보다 인프라를 구축시키는 것이 시급합니다.
부산의 명품거리가 만들어 지겠네요. 서울과 비슷해 지겠는데요
위험한 말이긴 합니다만, 제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거의 공공디자인 가이드라인에 어깃장 낼 만한 것들입니다. 간판을 작게 만들어봐야, 그 간판을 보기 위해 조명을 환하게 비춰야 하는 것이 아이러니이고, 파나플렉스 간판에서 채널간판으로 바뀌는 것은 과거 새마을 운동과 다를 게 뭐가 있겠냐는 것입니다. 도시를 이루는 큰 줄기만 만들고 나머지는 조금 여유를 주고 있습니다.
인터뷰 전에 읽었던 서면 프로젝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사적인 명승지나 고적 등을 캐릭터로 삼지 않겠다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과 홍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지요. 강북로를 중심으로 거리를 개선시키고 노인계층이 많은 동래를 실버타운과 베드타운으로 정하고, 서울의 신촌 대학가와 흡사한 경성대와 부성대 길은 젋 은 층을 공략하는 거리로 만들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부산 시민들이 만들어 온 거리의 문화와 쓸모를 조금 구체적으로 나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부산하면 바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자연은 명승고적과 달리 ‘부산다운 랜드마크’로 쓰여야 할 것 같은데요
광복로 사업을 할 때도 바다가 가까우니깐 물을 끌고 오자고 했었습니다. 용두산이니깐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조형물을 만들자고 했는데, 재정상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건물 양식은 사실 다 엇비슷합니다. 그 때 조형물을 곳곳에 두면, 도시라는 테두리가 만들어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인상을 남기기 위한 아이디어지요. 백 년이 지나도 보존 가치가 높은 상징물을 만들자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상주의입니다. 5년, 10년으로 중장기 계획을 만들어 도시를 윤이 나게 만드는 작업이 우선이기에 지금은 조형물의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겪는 애로사항은 있으신가요?
인력입니다. 커리어가 1~2년 밖에 되지 않은 사람들이 현장을 지휘하면서 도시는 난립하게 됩니다. 공공시설물로 쓰일 조형의 재료적 물성을 모르면서 우선 만들고 보자는 막무가내와 도시의 특색을 고려해서 만든 다른 지역구의 우수한 디자인 사례를 무작정 부산에 대입시키려는 안일함이 저를 지치게 만듭니다. 손발이 맞아야 일을 할텐데, 공무원들 마저 자주 부서가 바뀌는 통에 디자인하랴, 교육시키랴 정신이 없습니다. 가치 있는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면서 차근하게 알려주자고 마음 먹었으니 잘 될거라 믿습니다.
앞으로 공공디자인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으세요
공공디자인은 사업적인 측면에서 2~3년 더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 후 혹독한 반성을 치르는 계기가 올 거라고 봅니다. 그 과정을 지나야 정갈한 디자인이 나오고 한국적인 디자인을 거론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부산 서면도 혹독한 반성을 치를 것 같으신가요
그건 좀…(웃음). 제품 디자인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관할하는 사업인 만큼, 시민의 30%가 만족하면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길을 닦으면서 옛 것을 떠올리는 것은 사람다운 마음입니다. 제아무리 매끈하게 만든다 해도, 슬레이트 지붕과 구멍 난 유리창에 붙은 아스테이지 필름을 그리워 하는 것까지 타박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거리 개선 사업에서 향수에 젖게 만들만한, ‘자갈치 아즈매’같은 부산다운 것들은 그대로 두고, 특화 거리만 곳곳에 만들어 정리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냄비근성, 굴뚝산업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나쁜 어감을 담아 쓰는 것이 아니고, 그게 한국인의 국민성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네트워크를 더하면, 공공디자인은 빠르고 효과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서울과 부산이 네트워킹 돼서 지금 서면이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불과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공공디자인 사업이 벌써 이만큼 온 까닭은 우리의 속도 덕이고요. 긍정적으로 도시를 바라보는 일이 가장 좋은 공공디자인 습관입니다.
박광철 교수는 인터뷰가 끝나자, 재미있는 건 지금부터라며 연구실로 안내했다. ㄷ자 모양의 수납장에는 빽빽하게 신발 디자인 시안들이 들어차 있었다. 모두 제자들과 만든 작품들로, 이미 독일에서 시판되는 것들도 있었다. 신발을 신어보니 찰진 흙덩이를 밟는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14년 간 제품 디자인 교수로 일하면서 무수히 많은 신발 디자이너를 양성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박라인’이라는 무리까지 생겼단다. 곁에 서있던 타과 교수가 한 마디 거들었다. “디자이너로서 태가 나고, 사람을 끄는 타입이다”라는 것. 그가 고민하는 디자인 인력 문제는 차츰 나아질 것이 눈에 선했다. 곧 새로운 ‘박라인’이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의 편안한 리더십으로 뭉친 사람들이 조금씩 바꿔갈 부산의 거리가 어떤 얼굴로 날 반겨줄지 기대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