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03
한 장의 사진 속에 여인이 서 있다. 젊은 여인이다. 여인의 몸은 정면을 향하지만 시선은 허공을 향하고 있다. 풍만한 몸매, 약간 고집스러운 인상을 풍기는 얼굴에는 건강한 혈색이 돈다. 표정은 없다. 웃음기 사라진 눈빛에서는 좀처럼 기분을 읽기가 어렵다. 또 다른 사진의 여인. 이 흑백 사진에서 여인은 앉아있다. 이번엔 누드다. 길고 검은 머리가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다. 그녀 역시 아무런 표정이 없다. 잠깐, 그녀는 방금 전 사진과 같은 여인이다. 평범하지만 익숙지 않고 유명하지도 않은, 이 이름 모를 여인은 제니 스코벨(Jenny Scobel)의 작품 속 모델이다. 그녀는 이렇게 익명의 여인을 포함해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 미쉘 파이퍼,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 등 한결같이 여인들을 작품의 피사체로 활용한다. 작가는 이미지 수집과 편집의 과정을 통해 여성의 토르소(torso)를 창출한다. 그녀는 주로 오래된 잡지에서 오려낸 여성의 얼굴과 몸, 그리고 배경을 재조합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중에는 오드리 햅번, 미쉘 파이퍼와 같은 할리우드 배우를 포함해 익명의 여성, 작가의 지인, 그리고 제니 스코벨 자신의 이미지까지 다양한 여성의 이미지가 재료로 사용된다.
글 | 월간 퍼블릭아트 조숙현 기자
사진 | zeno-x gallery 제공
유명한 이미지, 상징적인 이미지는 복사와 노출의 과정을 거쳐 클리쉐(cliche: 진부한 고정관념)로 전락한다. 이 명제는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른바 ‘사진 세대(picture generation)’의 활동으로 증명됐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 리차드 프린스(Richard Prince), 바바라 크루거(Barbara Cruger), 쉐리 레빈(Sherrie Levine) 등 전복적인 사진작가들은 이미지의 전신을 해체하는 작업 과정과 재조합하는 결과물로 전유예술을 창조했다. 이 세대는 자본과 상업에 농락당하고 미디어에 의해 왜곡되는 문화예술을 조롱했으며,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고유의 가치가 얼마나 간단히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동안 ‘이미지의 재현’이라 못 박힌 사진의 기능과 영역은 이로써 대단히 새롭고 넓은 지평을 맞이하게 되는데, 제니 스코벨의 사진 작업 또한 기본적으로 이 범주 안에 속한다. 그녀는 미디어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사진에서 차용한 이미지들을 일종의 포토 콜라주 작업을 거쳐 회화작품으로 재생산한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현대사진작가들이 시도한 작업 과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만의 독특한 개성과 고유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예외 없이 오로지 여성을 대상으로 다룬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한 명, 드물게는 두 명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여성들은 웃지도 않고 정면을 응시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 점이 관람자로 하여금 익숙함의 범주를 벗어난 간극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하는 TV, 신문, 잡지, 인터넷 등의 미디어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관람자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상냥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은 관람자의 비위를 맞추는 천사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대중들은 여성들의 이런 태도를 받아들이는데 너무나도 익숙하다. 이것은 익명의 페미니즘 아티스트 그룹 게릴라 걸스의 메시지(“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옷을 벗어야 합니까?”)를 떠올렸을 때 대단히 시사적이다. 그러나 제니 스코벨의 작품 속 여성들은 그들의 상황, 기분, 삶을 결코 포장하지 않으며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그들은 관람자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누드로 포즈를 취해도 유혹의 제스처를 풍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 인간적인 매력은 빛을 잃지 않는다. 동일 범주 안에 속하는 신디 셔먼이나 바바라 크루거가 페미니즘 예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진을 이용하였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제니 스코벨이 일부 작품의 모델로 차용한 버지니아 울프는 누구인가? 20세기 문학의 최고의 모더니스트이자 페미니스트 아니던가? 이렇듯 여러 가지 정황상 제니 스코벨의 페미니즘적 성향은 짙은 혐의를 내포한다.
그러나 그녀의 회화는 페미니즘의 전유물처럼 군림하는 모던하고 강렬한 느낌보다는 노스텔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진 콜라주 작업 단계에서 그녀는 인물의 머리, 몸통, 그리고 뒷 배경 이렇게 세 부분으로 한 작품을 구성하는데, 배경은 주로 1930~40년대의 역사와 풍경을 다룬 미디어, 만화 등에서 차용해 편집한다. 때로 작가가 직접 빈티지 옷가게에서 구입한 의상을 입고 찍은 사진을 콜라주 재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배경은 인물이 표현하지 않는 서브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것은 ‘죽음의 두려움’과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반되는 개념으로, 작가를 양극단을 지배하는 감정의 구체적인 요인을 시각화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어두컴컴한 하늘에 드리워진 먹구름과 주인공이 입은 옷의 꽃무늬로 형상화된다. 불길한 먹구름은 여인을 불안하게 만들지만 그녀는 곧 감정을 추스르고 가정으로 돌아가 익숙한 행복을 맛볼 것이다. 배경의 분위기로 인해 작품 속 여인들은 한층 목가적이고 사색적인 인상을 남긴다. 특수 제작한 나무 패널과 목탄 등 재료의 선택도 한 몫 한다. 이런 까닭에 그녀의 작품은 사진의 기능을 수행했던 사실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그녀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화가로는 15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사실주의 초상 화가 한스 멤링(Hans Memling)이 있다.
그녀의 작품은 1980년대 중반 초기작을 거쳐 근래에 이르면서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초기작은 콜라주의 과정을 강하게 어필했다. 얼굴과 몸의 불균형적 비례, 꿰매 붙인 이음새의 과격함으로 이미지 재조합의 흔적이 강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부터 현재의 근작에 이르러서는 콜라주의 테크닉이 매우 자연스러워졌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의 주변 사람을 모델로 삼은 작품의 경우, 그녀의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앳된 소녀의 모습에서 청년기를 거쳐 중년 여성의 모습까지 한 여인의 변천사를 예술작품을 통해 지켜보는 것은 단순한 친근함을 넘어서 여성을 한 인간으로서, 존중심을 가지고 초월한 존재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제니 스코벨의 작품은 이렇듯 여성스러움을 포기하지 않고 사회와 예술에 아직까지 만연한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고를 탈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제니 스코벨(Jenny Scobel)은 1955년 미국 오르빌(Orrville)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8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다수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개최했다. 뉴욕 Molloy College Rockville Centre에서 열린 ‘Unsolved Mysteries’을 비롯해 독일 Galerie der Stadt Backnang, 미국 윈스턴세일럼(Winston-Salem), 벨기에 Zeno X gallery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룹전으로는 2004년 독일 카셀 Museum Fridericianum 에서 열린 ‘Sagt holde Frauen: 15 zeitgenossische Kunstlerinnen und das Medium Zeichnung’을 비롯해 독일 뤼베크 Overbeck Gesellschaft의 ‘Women Portraits’, 뉴욕 DFN Gallery의 ‘Dangerous Woman’ 등에 참여했다. 현재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