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08
지난 10월 19일 영국무역투자청이 주최한 영국 디자인 세미나(UK Design Seminar 2011)가 주한영국대사관에서 열렸다.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이 행사를 위해 영국의 내로라 하는 유명 디자인 에이전시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해외에서 바라보는 한국 기업들의 위상을 설명해주기에 충분했다. 2006년부터 꾸준히 한국 기업과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해 온 영국의 디자인 에이전시 키네어 듀포트(Kinneir Dufort)는 일찍이 한국 기업들의 디자인 니즈에 주목했고, 또 그에 걸맞는 성과를 내왔다.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사진제공 | Kinneir Dufort(www.kinneirdufort.com )
키네어 듀포트(Kinneir Dufort, 이하 KD)는 1977년 설립된 디자인 전문 회사로, 영국에서는 그 규모와 매출이 상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다. 제품 디자인이 주력 분야였던 KD는 영국이 제조기반 사회에서 벗어나자, 전체 신제품 개발 과정을 지원하는 디자인 컨설팅 업체로 거듭났다. 그리고 현재는 신생 기업부터 글로벌 대기업, 헬스케어부터 보안산업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보다 나은 제품과 사용자 경험’을 강조하는 KD는 한국과 돈독한 인연을 맺고 있기도 하다. 일찍이 CJ제일제당, LG생활건강, 삼성메디슨 등의 한국 기업과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사내에 2명의 한국인 디자이너도 두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번에는 또 다른 한국 기업과의 비즈니스 기회를 위해 세미나에 참석했다. 영국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역사도 짧은 한국 디자인 시장에 이들은 왜 이토록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 KD의 디자인 디렉터 크렉 와이트만(Craig Wightman)과 최세근 프로젝트 매니저, 이혜영 디자이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Jungle : 오늘 영국 디자인 세미나에는 어떻게 참석하게 되었나?
크렉_ 키네어 듀포트(이하 KD)는 4년 전부터 한국의 클라이언트들과 함께 일하면서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한국은 상당히 흥미로운 디자인 시장이다. 영국과는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과 일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이다. 영국이 가진 유서 깊은 디자인 문화와 한국의 다이나믹한 문화의 장점을 잘 배합하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오늘 이 곳에 온 이유도 이런 문화의 퓨전을 이용해 한국 회사들의 제품과 서비스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한국 디자인을 이끄는 리더들이니, 이들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한국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싶었다.
Jungle : 한국에서는 어떤 회사와 함께 일했나?
크렉_ CJ와 함께 프리미엄 오일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우리가 3D 스트럭처 같은 컨셉을 디자인했고, CJ 측에서 그것을 한국 시장에 맞게 적용시켰다. 왜 한국 제품을 디자인하는데 영국에 있는 회사의 도움이 필요했을까 궁금할 수 있는데, 한국을 잘 아는 CJ와 유럽의 문화를 잘 아는 우리의 디자인 감각이 만나 세계 시장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일이 잘 되어 LG생활건강, 삼성메디슨과 제품 디자인 및 디자인 전략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Jungle : 영국의 디자인 시장이 한국보다는 훨씬 큰데도 한국의 디자인 시장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한국 디자인 시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인가?
크렉_ 우리 프로젝트의 절반 이상은 해외에서 진행된다. 대부분이 글로벌 시장을 타겟으로 하기 때문에 국적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우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인도 등지에 있는 클라이언트와 함께 다국적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 디자인팀에 자극이 된다. 디자이너들에게는 이러한 경험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다이나믹한 경험이 다른 곳에서도 잘 반영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한국과 영국간의 특별한 관계도 이 곳에서 업무를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인들은 영국의 긴 디자인 역사와 그 유산을 존중해주고, 영국인들은 한국의 디자인 접근 방식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때로는 이것들이 모두 섞여 제품에 녹아들기 때문에 이런 관점이 잘 맞는 것도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이혜영_ 비즈니스 측면에서 유럽 및 미국의 디자인 업체와 한국의 디자인 업체는 제품을 개발하는 과정이 매우 다르다. 예를 들어, 한국의 헬스 케어 제품들은 한국에서는 잘 팔리지만 유럽에서는 생소하다. 양쪽 시장의 다른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에 다른 접근법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이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최세근_ 이렇게 다른 문화를 토대로 서로 자극을 받으면서 재미있는 화학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Jungle : KD의 강점은 무엇인가?
크렉_ 우리의 강점은 디자인을 대하는 오픈된 태도와 접근 방식이다. 클라이언트는 단순히 해결책만을 원해서 오지는 않는다. 디자인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우리의 인사이트와 관찰한 것을 이용해 디자인 한다. 또한 첫 단계에서부터 클라이언트를 동참시켜 함께 디자인 프로세스를 진행해 나가기 때문에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Jungle : KD의 디자인 프로세스에서는 디자인 리서치가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는 많은 학생들은 리서치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지만, 늘 ‘어디까지 리서치를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에 직면한다. KD에서는 어디서 리서치를 그만두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정해진 시점이 있는가?
크렉_ 좋은 질문이다. 사실 그냥 놔두면 정답을 찾지 못한 채 계속 리서치만 하기 쉽다. KD에서는 효과적인 리서치를 위해 2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리서치 분야에 훌륭한 전문가를 두는 것이다. 리서처는 프로그램을 정의하고, 언제 우리가 결론을 내고 다음 단계로 가야 하는지, 원하는 결과를 찾을 수 없을 때 어떻게 리서치 방법을 바꿀 것인지 등의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 하나는 더 현실적인 이유다. 클라이언트가 지불하는 비용 때문이다. 상업적인 맥락에서는 리서치도 프로젝트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과정에 대한 비용을 충분히 지불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일할 수 없을 것이다.
이혜영_ 나 역시도 학생 때 이런 고민을 많이 했다. 과제할 때, 리서치는 많이 했지만 시간 분배가 잘 되지 않아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KD에서 가장 먼저 한 프로젝트도 리서치였는데 그 때 왜 리서치 전문가가 필요한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한 리서치를 보여주면 그걸 보고 더 해야 할지, 그만 해도 될지 이야기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 기업에도 리서치 팀이 있지만, 이 사람들은 리서치를 통해 디자인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리서치 그 자체가 목표이기 때문에 끝도 없이 리서치만 하게 된다. KD같은 디자인 회사에서는 지금 내가 하는 리서치가 전체 프로세스에서 어떤 부분인지 눈에 보인다. 그래서 계속 경험을 하다 보면 내게 필요한 인사이트를 얻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온다. 그런 감이 올 때까지 계속 해보는 수밖에 없다. 사실 비즈니스에서는 리서치 기간과 예산을 정해놓기 때문에 그 범위 내에서만 리서치를 하게 된다. 효율성을 위해서 스스로 기한을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Jungle : 두 분은 한국 출신의 디자이너다. 어떻게 해서 영국의 디자인 회사인 KD에서 일하게 된 것인가?
최세근_ 나는 영국에서 디자인 대학과 대학원까지 마치고 2004년부터 KD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영국에서도 대기업이 아닌 일반 디자인 회사에서는 그게 쉽지 않다. 이런 일 때문에 미리 겁먹고 영국에서 일하기를 포기하는 유학생들도 많다. 나는 운이 좋았던 덕분인지 KD에서 내 포트폴리오를 좋아해 주었고, 그간 했던 경험들이 인정을 받아 이 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혜영_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유학을 생각했었다. 그러다 아무래도 실무 경험이 필요한 것 같아 대기업 보다는 전체 디자인 프로세스를 알 수 있는 디자인 회사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때 마침 KD가 학교에서 디자인 세미나를 연 것이 인연이 되어 이 곳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는데, 영국처럼 디자인 역사가 깊은 곳에서 일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나에겐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나중에 왜 나를 뽑았느냐고 크렉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영국 학생들도 그렇고 한국 학생들도 제품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다들 그 분야로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오는데, 나는 디자인 전략 쪽을 강조해 포트폴리오에서 디자인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는 점이 특이해서 뽑았다고 하더라.
Jungle : KD에서 디자이너에게 요구하는 가장 큰 능력은 무엇인가?
크렉_ 디자인 기술과 감성도 있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로 더 넓게 보고, 남들과는 다른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디자이너가 필요한 지에 따라 차이는 있다. 어떤 때는 기술적인 디자이너가, 어떤 때는 전략적인 디자이너가 필요하지만 우리의 영역은 매우 넓기 때문에 여러 분야를 커버할 수 있는 디자이너도 필요하다.
최세근_ 확실한 것은 최소 한 가지는 다른 사람보다 잘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케치면 스케치, 렌더링이면 렌더링, 프레젠테이션, 모델링 등등. 디자인도 분업이라 디자이너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자신만의 강점이 하나는 있어야 여러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한 덩어리가 되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수 있다. 다 적당히 잘해서는 안 된다.
이혜영_ 본인이 디자인에 어떤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