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23
공간 디자이너 김재화의 스튜디오, 멜랑콜리 판타스틱 스페이스 리타(melloncolie fantastic space LITA). 이름도 독특한 이 곳은 부암동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의 스튜디오로 이전한 것은 작년 11월이지만, 그전에도 김재화는 계속 부암동에 있었다. 햇수로 치면 4년 정도. 그녀는 복잡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 동네를 좋아한다. ‘커피프린스’라는 드라마 덕분에 처음 왔을 때만큼 아니지만, 여전히 사람 많은 주말만 빼면 작업하기 좋은 평온한 환경이라고. 때마침 김재화를 만나기 위해 부암동을 찾은 날도 조용한 평일의 오후였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사진제공 | 멜랑꼴리 판타스틱 스페이스 리타(http://www.spacelita.com)
베이직(Basic)을 추구하는 디자이너
그녀와의 인터뷰를 위해 들어선 스튜디오 역시 동네만큼이나 아늑한 분위기였다. 백색의 표현과 물성을 그대로 드러낸 재료들이 전해주는 공간의 순수함, 여기에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음악은 처음 방문하는 이의 감성마저 안아주고 있었다. 스튜디오에 묻어나는 이러한 공간적 표현은 그간 김재화가 해온 디자인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에게 백(白)은 선 하나를 그어도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는 미학의 색이고,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공간의 ‘멋’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베이직(Basic)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다.
김재화가 베이직함을 선호하는 데에는 기능성과도 관련된다. 공간디자인은 아트(Art)가 아니기에 기능성은 타협의 대상이 아닌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한 공간은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들어서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생각으로, 사용자와 그들의 물건들을 위해 최대한 담백하게 비워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베이직한 김재화의 디자인이 밋밋하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인 베이직함에서 디자이너의 적절한 선택으로 결정되는 2%의 변화를 주는 것. 예를 들면 그녀의 스튜디오 공간에서처럼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사용하되, 그 단면을 드러내어 색다른 느낌을 전해준다든가, 레스토랑 42m2에서 보여준 비스듬한 선형적 표현으로 공간에 긴장감을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심플한 듯 보여도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스며들게 되면 차별화된 그 공간만의 ‘맛’이 느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김재화는 그런 작은 변화를 통해 매력적인 공간을 완성한다.
멜랑콜리와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Loita). 아름다운 문체는 물론이고, 소설 속 문장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았다는 김재화에게 롤리타는 청춘의 두근거림이자 삶의 모티브였다. 이로 인해 학창시절부터 자신의 또 다른 이름처럼 ‘리타’를 사용하기도 한 그녀는 기어이 스튜디오 이름에까지 갖다 붙이게 된다. 스스로의 취향이 한껏 묻어났다는 지금의 스튜디오 공간에는 아예 롤리타의 서문을 눈에 가장 잘 띄는 내부 회전벽에 적어놓기 까지 했을 정도다.
스튜디오 이름에서 김재화를 읽을 수 있는 한가지 단서가 더 있다. ‘멜랑콜리’. 록그룹 스매싱펌킨스(Smashing Pumpkins)의 앨범, ‘멜랑콜리 & 인피니트 새드니스’에서 차용한 것으로 스스로를 록키드(Rock Kid)라 자부하던 그녀의 청춘을 비추는 또 다른 상징적 단어다. 비단 ‘록’ 뿐만 아니라 ‘음악’ 자체는 김재화 인생 전반에 깊은 영향을 주는 감성적 매개체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북카페 ‘1974 way home(Mondo Grossd)’이나 모던바 ‘Between the bar(Elliott Smith)’ 등 네이밍에서 공간 컨셉까지 음악적 감성이 디자인의 베이스가 된 그녀의 프로젝트들을 꽤나 살펴볼 수 있다.
‘멜랑꼴리 판타스틱 스페이스 리타’. 남들에게는 한껏 튀어 보이려 지은 이름 같지만 정작 디자이너 본인에게는 청춘의 기록이자 인생에서 가장 친근한 단어들의 나열이었던 셈이다.
디자이너가 말하는 클라이언트
‘김재화에게 클라이언트란?’ 만약 그녀가 모 예능 프로그램에 나갔다면, 사회자가 이런 질문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공간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녀는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에 특히나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뒤에서도 다시 말하겠지만, 그녀의 모토인 ‘즐겁게 일하기’를 위해서라도 어떤 클라이언트와 어떤 만남을 가지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재화가 말하는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지음은 사실 간단하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갑’과 ‘을’이라는 고질적인 시스템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소통의 기본을 이루는 모습, 다시 말해 서로가 고마울 땐 고맙다고 말하고, 미안할 땐 미안한 표현을 하며, 부탁할 때는 정중한 마인드를 보여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관계에 있어 기본적인 태도이지만,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결코 실행하기 쉬운 일이 아님은 쉬이 알 수 있다.
그렇게 관계를 짓다 보니 클라이언트로 만나 인간적인 유대관계로 발전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때론 친구가 되기도 하고, 나중에는 오히려 클라이언트에게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녀는 이런 관계가 형성되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항상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디자이너의 모습이 먼저 클라이언트에게 어필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찌됐든 ‘일’적인 관계로 만나는 이상 신뢰감을 먼저 주는 것은 디자이너의 몫이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결국 김재화에게 공간이든 사람관계든 가장 중요한 맥락은 베이직, 즉 기본을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면, 그녀의 답은 바로 이렇다.
‘김재화에게 있어 클라이언트란 단지 돈을 주는 사람이 아닌 인간적 유대를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다.’
즐길 수 있을 만큼 일하는 디자이너
공간 디자인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김재화는 한마디로 ‘코 꼈다’라고 표현한다. 어릴 때부터 가졌던 공간에 대한 동경 때문에 대학도 관련학과로 진학을 하긴 했지만, 실제 공부해보니 그녀에게 공간 디자인은 너무 어려웠다. 또한 과연 이게 내 길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마당에 졸업한 선배들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온통 암울한 미래뿐이었다. 힘든 업무에 합당치 못한 대우까지. 그래서 그녀는 대학을 다니면서 오히려 공간 디자이너 뜻을 접고, 약간 방향을 틀어 공간 스타일리스트 일을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4년 전공을 끊는다는 것 또한 쉽지만은 않은 일. 막상 그간 공부한 것에 대한 아쉬움에 김재화는 ‘그래 한번쯤은 해보자’라는 심정으로 졸업 후 공간 디자인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그리고 고생 끝에 완공한 첫 공간에 불이 켜지는 순간, 그때 느껴졌던 희열이 지금까지 그녀를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아마도 많은 공간 디자이너들도 같은 기분이지 않았을까. 페이퍼에 그려졌던 공간이 실재화된 모습을 보는 것은 마치 마약 같은 희열이었단다. 시작부터 제대로 코 껴버린 것이다.
지금 공간 디자이너로서 김재화는 즐거울 수 있을 만큼만 일하자는 주의다. 그러기 위해서 스튜디오도 지금의 규모에서 더 키우려고 하지 않는다. 규모가 커지다 보면 운영적 측면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다. 물론 규모를 키운다고 해서 무조건 힘들게 일한다고는 볼 수 없다. 꽤나 운영을 잘하는 회사들도 많고. 그럼에도 그녀의 이런 생각은 항상 즐거운 만큼만 일하고, 포기할 건 쿨하게 내려놓자는 견고하고 심플한 원칙 아닌 원칙에서 비롯된다. 현재 스튜디오를 꾸려나가는 사람은 세 명이다. 만약 인력이 부족할 만한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프리랜서를 적극 활용하는 형태로 운영한다.
‘즐겁게 일하고, 행복하게 살자’. 인터뷰 내내 김재화가 입에 달았던 말이다. 즐겁기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사는 소소한 삶과 일. 어쩌면 채움이 아닌 비움으로써 사용자들에게 전해지는 ‘스페이스 리타’의 공간들 역시 그녀 삶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는지. 김재화가 펼쳐내는 소소하고 즐거운 공간이야기가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함께 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