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은지│네덜란드 | 2014-01-27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때, 예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예술 운동이 함께 일어났다. 이 운동이 더욱 놀라운 점은 런던이나 베를린, 파리와 같은 대도시가 아니라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한 데 있다. 1917년 몬드리안(Piet Mondrian)과 후스자(Vilmos Huszár), 반 델 렉(Bart van der Leck), 반 두스버흐(Theo van Doesburg)가 함께한 ‘데 스틸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오래된 것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현대적 삶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시도했다. 작은 잡지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일까? 이번 ‘몬드리안&데 스틸’을 기획, 진행한 헤이그 시립 박물관의 큐레이터 한스 얀슨(Hans Jassen)을 만나 데 스틸의 역사적 의미와 특징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전시 공간 안에서 표현해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글, 사진│현은지 네덜란드 통신원(hej0410@gmail.com)
얀슨은 이번 상설 전시를 기획한 가장 큰 이유로 ‘데 스틸 운동’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와 평가를 꼽았다. ‘데 스틸 운동’이 가진 문화적, 역사적 중요도에 비해, 이에 대한 전시는 드물었다고 한다. 특히 이 운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네덜란드에 상설 전시관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나 맥락 없이 작품을 나열해 놓은 것을 보면서 전시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전시 작품을 선택하고, 배치하는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써서 탄생하게 된 전시 공간은 1925년 몬드리안이 썼던, ‘집, 거리, 도시’에서 영감을 받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곳곳에 ‘데 스틸 운동’의 특성을 녹아들게 하려고 했다.
20세기의 중요한 아방가르드 운동은 베를린, 취리히, 파리 등 큰 도시를 기점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데 스틸 운동’은 네덜란드의 작은 도시들-위트레흐트(Utrecht), 라이든(Leiden), 암스테르담(Amsterdam) 등의-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이는 네덜란드가 갖고 있는 지역적 특징과 이 운동이 갖고 있는 특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광역도시(metropolitan)가 발달한 곳이었다는 점, 또한 하나의 다양한 의견을 동시에 수용해서 ‘데 스틸 운동’이 진행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이것은 또한 네덜란드 특유의 민족성과도 이어진다. 각자의 작품과 생각을 전하는 데 집중하면서, 하나의 결과보다 의견이 오가는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헤이그시립박물관은 ‘데 스틸 운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베를라헤(Hendrik Petrus Berlage)가 디자인했다. 얀슨은 베를라헤가 작업한 이 공간을 이번 전시에 전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데 스틸의 본 모습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부 벽면을 벗겨내, 베를라헤가 디자인했던 수많은 기둥들이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만나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데 스틸 운동’의 본질이라 생각한 얀슨은 이를 감추거나 보여주는 등의 방법을 통해 당시의 모습과 소통을 꾀했다. 어떻게 보면 베를라헤를 향한 반항이었다고도 할 수 있기도 하지만 화이트 큐브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읽히기도 했다. 다만 관람객이 직접적인 경험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 전시 디자인에는 얀슨 외에도 예술가 크라인 더 코닝(Krijn de Koning)과 건축가 안느 홀트롭(Anne Holtrop)이 참여했다. 163개의 방은 데 스틸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작품으로 다가온다. 가장 바깥쪽 벽면은 전시장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작은 사각의 방들이 점 작아지면서 공간이 소멸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데 스틸의 디자인 원칙이 얼마나 동시대 적인지를 관람객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바우하우스(Bauhaus)와 비교해보면 ‘데 스틸 운동’의 근원과 더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바우하우스가 대량생산으로 불특정 다수를 위해 제품을 만들었다면, 데 스틸의 작가들은 항상 특정한 사람을 위한 것을 디자인했다. 이 때문에 사용자(user)와 디자이너의 관계는 훨씬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사회 공동체를 위한 예술 (Gemeente schapskunst)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바우하우스(Bauhaus)와 비교해보면 ‘데 스틸 운동’의 근원과 더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바우하우스가 대량생산으로 불특정 다수를 위해 제품을 만들었다면, 데 스틸의 작가들은 항상 특정한 사람을 위한 것을 디자인했다. 이 때문에 사용자(user)와 디자이너의 관계는 훨씬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사회 공동체를 위한 예술 (Gemeente schapskunst)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좁은 길과도 같은 전시장을 지나치다 보면 여러 건축 모형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활약을 보여준 4명의 건축가들의 모형을 한데 모은 것인데, 이중 헤니 빌라(Villa Henny)만이 ‘데 스틸 운동’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의 작업을 한데 엮은걸까. 얀슨은 이 운동이 아주 획기적이고 특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물론 ‘데 스틸 운동’이 디자이너와 사용자 간의 거리를 좁히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그 속에 사용된 방법들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데 스틸 운동’에 적합한 건축물이지만, 당시의 친분을 이유로 담론의 대상이 보지 못했던 얀 다우커(Jan Duiker)와 이와는 반대로 친분 때문에 잡지에 소개된 멜니코프(Konstantin Melnikov)의 사례를 함께 전시해놓았다. 이것은 ‘데 스틸’이 보여주는 모호한 경계와도 맞닿아 있으며, 데 스틸의 신화화라는 오류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이번 전시는 몬드리안, 리트벨트 그리고 추상화라는 단편적으로 암기된 지식에서 벗어나 ‘데 스틸 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생생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디자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드로흐 디자인(Droog design)의 뿌리를 알 수 있는 전시였다.
http://www.gemeentemuseum.n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