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21
1990년대 자동차 디자인은 차량의 구조나 기능, 생산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보다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삶과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욕구를 적극적으로 만족시키는데 초점이 모아졌다. 이러한 변화에서 디자인은 미학적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감각화의 기술이 되었으며, 현대적 생산 방식의 중요한 일면을 담당했다. 이제 자동차의 성공은 기술이나 성능의 기본적인 동등함을 전제에 둔 상황에서 디자인의 미학적인 품질에 의해 좌우되었다.
글 |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새로운 자동차의 출현은 인간의 감성영역을 이입하려는 디자인으로 시도되었다. 은유적, 상징적, 역사적이며 재미와 위트가 이입된 형태는 감성적인 스타일의 연구 결과였다. 역사를 활용한 디자인은 정교한 옛스타일로 회귀하는 시도였으며 감성디자인의 주요 소재였다. 과거에 유행했던 형식을 인용하는 것은 대중의 기억 속에 친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클래식카의 기억을 불러 일으켜 좋았던 과거에 대한 심리적 갈망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레트로카는 대중적이며 일반적인 자동차와 구분되고 과거의 호시절을 상기시켰으며, 재미있는 형태를 보는 즐거움을 제공해 주었다. 레트로카를 운행하는 것은 취미가 되었으며, 복고의 물결을 일으켰다. 레트로카의 유행은 차별화를 향한 대중의 갈망이 드러나는 것이었으며, 자동차업체들은 이러한 욕망을 새로운 자동차 시장을 창출하는 전략적 차원으로 활용하면서 나타났다.
소비시대의 세분화된 요구를 이해하고, 그것을 자동차의 디자인에 활용하여 성공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닛산과 마즈다를 주축으로 하여 클래식카의 역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클래식카를 바탕으로 레트로카의 유행을 이끌었다. 86년 도쿄 모텨쇼에 나온 닛산의 Be-1은 리터카인 마치(March)를 베이스로 영국의 오스틴 미니(1959년)의 이미지를 리스타일링한 차량이었다. 뒤이어 발표된 파오는 르노의 베이식카인 캬틀(1961년)을 리스타일했고, 곧이어 쿠페형 피가로를 선보였다. 이 모델들은 복잡한 구조나 첨단 장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이 마치의 메커니즘을 그대로 사용하여 단순하게 만들어졌다. 간단한 조작과 기능에 더불어 다른 차량과 확연히 구분되는 개성 넘치는 스타일은 레트로디자인의 장점이었다.
복고의 물결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주역은 1950-60년대 유행했던 소형 스포츠카를 인용한 마즈다의 미아타였다. 60년대의 소형 스포츠카는 재규어, 포르쉐, 로터스 등 호화 스포츠카 메이커가 오픈 드라이빙을 즐기는 자동차 매니아를 위해 제작한 차량이었다. 소형 스포츠카는 70년대 석유파동에 따른 연료절감형 소형화 추세에 밀려 주춤했다가, 80년대 들어 개인주의적이고 사치지향적인 흐름에서 다시 주목을 받으며 레트로 스타일의 주된 차종이 되었다. 1989년 출시된 미아타는 로드스터의 향수를 갖고 있는 소비자층을 대상으로 하여 영국의 로드스터 엘란에서 스타일을 가져와 최신의 기술력으로 설계한 차량이었다. 미아타는 저렴한 가격과 적당한 성능, 편의성을 갖추어 중장년층에게는 젊었을 때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앞바퀴굴림차에 익숙한 젊은층에게는 뒷바퀴굴림카의 특이한 감각을 경험하게 하였다. 74년 폭스바겐 골프를 기점으로 일부 대형고급차외에는 앞바퀴굴림차가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미아타는 스타일의 신선한 느낌만이 아니라 운전에서도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스포츠카의 전통적인 비례를 가지고 현대적으로 각색한 미아타는 차량 자체보다는 복고풍의 새로운 룩의 이미지전략이 만들어 낸 성공작이었으며, 자유와 즐거움의 표상으로 현대인의 개별적 삶과 심리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만족시키는 대표적인 차량이었다.
미아타의 이러한 디자인 전략은 ‘느낌’이라는 특성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이 차를 계기로 차량의 성능적인 특성 보다는 느낌이라는 측면에 중심을 두면서 감성을 공학적 기술로 다루는 감성공학(Kansai Engineering, 86년)분야가 생겨났다. 감성공학이란 인간이 제품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욕구로서의 이미지나 느낌을 물리적인 디자인 요소로 해석하여 제품에 반영하는 기술을 일컬었다. 인간의 감성을 디자인 요소로 바꾸는 과정은 느낌의 형용사를 이용하는 형용사 분석법(Seantic Differential Method)을 탄생시켰고, 디자인의 기본적인 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미아타의 성공으로 ‘감성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자동차업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90년대 디자인계의 주된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무언가를 줄 수 있는 ‘감성 디자인’은 자동차의 성공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전략이 되었다.
미아타를 통해 감성 연구에 성공한 일본 업체는 시각적인 감성요소만이 아니라 이외의 청각, 후각, 촉각 등의 감각 요소를 반영한 디자인으로 확장해 갔다. 자동차에서 가장 소리가 큰 엔진음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줄여 듣기 좋은 소리로 바꾸는 엔진소리연구에서부터 고급차의 분위기를 줄 수 있는 도어 소리 만들기, 전동시트나 파워윈도의 작동음에 이르기까지 고급스러운 감각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개선하였다. 또한 차량에서 나는 여러 가지 화학재료의 냄새를 제거하는 연구까지 일본의 감성디자인은 오감전체를 대상으로 하였다.
미아타를 시작으로 일본의 자동차업체들은 다양하고 깜찍한 디자인의 소형 오픈카를 대량 생산하며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9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들은 세계의 자동차산업을 이끄는 리더의 지위를 얻었다. 이러한 성공은 소비자의 요구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생산시스템을 갖추고 소비자 집단을 분절하고 생활양식을 대상화하여 라이프스타일에 따른 제품개발을 신속히 진행해 나감으로써 이루어졌다. 일본의 성공을 따라 서구의 다른 업체에서도 가격을 낮추고 엔진 성능이 좋아진 새로운 로드스터 모델을 잇따라 출시했다. 유럽, 미국, 일본의 틈새시장에서 오픈카가 붐을 일으켰고, 고급스러운 모델에서 대중적인 모델까지 다양한 차량이 등장했다. 특히 이 중에서도 BMW Z3와 메르세데스 컨버터블 SLK는 인기가 매우 좋았다.
98년에는 폭스바겐이 옛 비틀(VW Beetle)을 기본으로 하여 리디자인한 뉴비틀을 출시했다. 비틀은 1934년 값이 싸고 구조가 간단하여 수리가 쉬우며 5명의 가족이 탈수 있는 국민차의 개발을 약속한 히틀러에 의해 탄생했다. 비틀은 1938년 설계가 완성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비틀(무당벌레)이라는 애칭으로 생산되었고, 2002년 맥시코에서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2,200만대 이상이 팔려 세계 자동차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많이 생산된 차로 기록되었다. 뉴비틀은 구형의 실루엣을 모방하여 역사적인 자동차로서의 비틀의 위상을 계승하였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간결한 디자인으로 옛 비틀을 재구성한 독특함은 가벼운 젊은 감성을 느끼게 하였으며, 레트로 스타일의 가장 성공적인 자동차로 인기를 모았다. 미국에서는 크라이슬러의 PT Cruiser가 초기의 미니밴인 Suburban의 모양을 본 뜬 레트로스타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레트로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모델은 없지만, HCD-1, 엘란, 마티즈 디아트 등이 레트로카의 세계적인 유행을 부분적으로 반영한 차량이었다. 현대자동차의 최초 컨셉카이자 티뷰론의 전신인 HCD-1은 소형 스포츠카의 복고 붐을 반영한 타르가 스타일의 로드스터였고, 기아자동차의 엘란도 영국 스포츠카 메이커인 로터스와 기술제휴하여 생산한 정통 스포츠카였다. 또한 98년 마티스가 베스트셀러카로 인기를 얻으면서 복고풍으로 장식한 ‘디아트’로 출시되었고 현대도 드레스업 모델로 개조한 아토스 ‘유로파’를 선보였다. 드레스업은 성능 변화와는 상관없이 차량의 외관에만 변화를 주는 꾸미기를 말하는 것으로 소형차의 복고 열풍을 외장의 그래픽 처리를 통해 빠르게 반영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소형 클래식카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형태로 재등장한 레트로카들은 기술적이고 경제적이며 이성적인 것보다는 개성적이며 감상적인 것에 몰두하는 현상,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특색있는 차량이라는 의미를 담아내며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일면을 대변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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