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22
장기 불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온갖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의 외식 산업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시장이다. 10년 전보다 2.6배 늘어난 38조원 규모로 그들은 추정하고 있으니, 아닌 게 아니라 엄청난 마켓이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처럼 거대한 시장에 군침을 삼키고 있는 마당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이란 가히 전쟁터에 비할 수 있음이 어느 정도 짐작가지 않는가. 음식이 맛있으면 찾아주겠지 하는 순박한 수준으로는 결코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수억씩 날리고 몇 달새 문을 닫고 마는 청담동 일대의 무수한 레스토랑들을 보라). 좀더 절박하게 표현하자면 신의 계시와 같은 절대적인 조언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서두가 길었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딱 하나 있다. 마리·셰봉·일 치프리아니·마티네 드 보·강가·이키이키·달·뭄바·로지·야키 바·나인 브리지·안나비니·더 레스토랑·타스트방…. 너무 쟁쟁해 헤아리기조차 숨가쁜 이들 인기 레스토랑을 만든 ‘더 써머셋 호텔 시스템즈’의 신성순 사장이다. 그의 손을 거친 레스토랑들이 대부분 아주 패셔너블한지라, 그를 인테리어 디자이너쯤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인테리어 정도는 신성순이 하는 일에 극히 일부일 뿐이라고 할까. 그와 그의 회사가 하는 일은 레스토랑의 컨셉트를 잡고, 수익률을 분석하고, 메뉴를 개발하고, 인테리어와 익스테리어를 디자인하고, 직원들을 선발해 훈련시키고, 최종적으로 마케팅을 통해 ‘띄우는’ 작업까지를 두루 포괄한다. 이름하여 레스토랑 컨설팅 업무라고 부르면 적당할 것 같다. 또한 그는 중식당 마리와 최근 오픈한 청담동 애프터 더 레인의 오너이기도 하다. 큰 키에 나직한 목소리, 핀 스트라이프가 쳐진 베이지색 수트 차림이 썩 잘 어울리는 그에게 최근의 관심사를 물었다.
“아주 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서요, 온통 그쪽에 정신이 쏠려 있습니다. 롯데가 인수한 소공동 미도파 백화점 자리에 대형 푸드 코트가 생기거든요. 처음엔 제가 컨설팅만 맡을 예정이었는데, 하다 보니 사업까지 직접 맡게 되었어요. 그리고 지난 6월에는 긴자에 한정식집을 오픈하기도 했고요, 좀 있으면 록본기에 코리안 카페를 만듭니다. 전 항상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오감을 자극하는 그의 레스토랑들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반 보만 앞서 있어, 세련돼 있으되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 즉 적당한 거리감이 있다는 개인적 소감을 언급했더니, 그는 정색하며 허심탄회하게 스스로를 평가했다.
“저는 꼼꼼하게 공부한 뒤 당위성에 의해 결론을 끌어내는 스타일이지 결코 천재가 아닙니다. 실제로 학교도 남들보다 오래 다닌 편이에요. 학부에서는 고분자공학을 전공했고, 디자인학교에서 제품 디자인을 공부한 적도 있고, 외식경영학 석사 학위도 있어요.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 공부도 했고요.”
신성순이 요즘 만드는 레스토랑들은 뭐랄까, 아주 정적이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물질 풍요 속의 디자인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 안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한 번씩 다 시험대에 올랐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은 정신의 평화를 구원하는 시대다. 어린 시절의 다락방, 자연을 통한 치유, 라이프스타일 갤러리로 각각 구성될 예정인 소공동 푸드 코트, 그가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극찬해 마지 않는 담양 소쇄원의 제월당을 가만히 떠올릴 때의 심상이다. 그는 또한 레스토랑에는 문화적 자생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용 없는 껍데기의 수명이란 길어봐야 고작이다. 레스토랑 사업에서 패션이나 라이프스타일 운운하는 문화적 코드가 갈수록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신성순에게 당위성을 갖춘 ‘변치 않는 트렌드’가 아닐까.
EDITOR : 조주희
자료 제공 : f1 The Style
기사 제공 : 팟찌닷컴(www.patzz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