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3-26
여기 뜻있는 배움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이세영 강사와 시각디자인과 학생들.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그들은 ‘한 권의 나비 프로젝트가 한 학기 수업 안 부럽다’고 거침없이 얘기한다. 수업 시간에 배운 편집디자인 이론을‘나비’라는 실험적인 책을 만드는데 응용했고, 이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 뛰어다니며 현장 답사 및 자료 수집에 열정을 쏟았던 이들의 색다른 도전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자료제공. 경기대 디자인공예학부 시각디자인 전공 학생들
취 재. 김미진 기자 / nowhere21@yoondesign.co.kr
나비의 탄생은 2001년 편집 디자인에 관한 수업에서 시작됐다. 학생들은 우리의 문화 속에 스며있는 한국적 기호와 형태를 발견하고자 그 결실을 담아내자는 의도로 나비의 아이덴티티를 설정하였다.
이를 계승한 나비 2호의 출격은 작년 가을학기, 32명의 학생들과 이세영 강사에 의해서 재개되었다. 원대한 포부, 혹은 무모함(?)으로 걸러진 자들만이 모여,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고 자료 조사 및 현장 답사만 3,4개월이 걸렸다. 방학까지 반납해 가며 9월부터 다음 학기 개강 전까지 장장 7개월의 대장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기존의 수업 과제는 정해진 주제 아래 일정한 양식을 지니고 있거나, 단편적이었던 것에 비해 나비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전통소재의 재발견’이라는 컨셉 아래 각자 한 개의 주제를 정하고 심도 깊게 파고드는 이른바 밑 빠진 독에 물붓기식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자료를 모으는 과정도 방대했지만, 이를 토대로 한국적인 것에 대해 재해석하는 과정 역시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소재는 많지만 그래픽적으로 재표현이 어려운 주제 때문에 계속 고민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나비 1호가 실험적인 타이포그라피를 사용했다면, 2호는 정보전달에 충실한 타이포그라피, 이미지 사용 등을 염두해 두고 제작하였다. 각 주제를 일관성 있게 이어나가기 위해서 과장된 부분들은 추려내고 폰트의 사용을 줄이는 등 세심한 부분까지 주의를 기울였다.
25개의 주제
앞편 : 탄생, 인체부적, 백수백복도, 고서, 비천선인상, 현무경, 장승, 해와달, 도설, 문자도, 문양, 천하도, 무용
뒷편 : 죽음, 인체지도, 낙서, 고악보, 신선, 벽사부, 비문, 하늘, 태극팔괘, 놀이, 충무연, 십이지
나비 2호에서는 우리네 삶의 화합과 복을 비는
<인체 부적>
과
<백수백복도>
오래되거나 낡은 책이라는 의미의 고서가 아닌, 현대 그래픽 디자인의 모태가 되는 예술품으로서의
<고서>
우리 전통의 악보 속에 나타나는 기하학적 기호 체계와 그 기보법에 대해 소개한
<고악보>
음양의 조화에서 시작하여 우리 문화 속에 스며있는 해와 달의 형상을 찾아 소개한
<일월>
유학의 어려운 이론들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도설>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형태의 부적을 소개한
<벽사부>
잊혀져 가는 옛 놀이를 계절별로 소개한
<놀이>
등의 다양한 주제를 접할 수 있다.
놀이>
벽사부>
도설>
일월>
고악보>
고서>
백수백복도>
인체>
나비?
나비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보기 흉한 애벌레에서 인고의 시간을 거쳐 아름다운 나비가 탄생하듯이 시작은 미약했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결과물이 나오길 바라는 학생들의 의지이다.
그리고 어느 기상학자가 얘기한 나비효과(북경에 있는 나비의 날개짓이 태평양 폭풍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카오스 이론의 일종)가 그것이다.'나비' 프로젝트의 작은 시작이 앞으로 디자인 업계 폭풍을 일으키는 가능성이 되기를 그들은 꿈꾸고 있다.
전통소재의 재발견!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디자인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서양의 것을 모방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짧지 않은 한국 디자인의 발전 과정에서 우리 것에 대한 시도는 산발적으로 이뤄져 왔다.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도 한국적 디자인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훌륭한 소재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구시대적 유물로 치부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비는 토착화 디자인이라는 의지를 내세우고 있다.
앞뒤가 없는 파격, 자유로운 발상
탄생-죽음-인체지도-십이지 4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조명한다.
탄생
죽음
이미지를 더욱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선을 금색으로 칠하고, 인체의 형태를 색으로 만들었다. 제각기 크기와 밀도가 다른 이미지 때문에 전체적인 레이아웃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지만, 매 페이지마다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해 사람의 옆모습을 위 아래로 형상화 시켰다.
십이지
나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발로 뛰면서 얻어낸, 방대하고 희귀한 자료들이다.
인터넷 서핑을 시작으로 전국 도서관을 전전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가 직접 인터뷰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료 수집에 있어 남다른 인고의 과정과 기행을 겪은 두 팀의 학생들을 만나보았다.
정글 : 주제가 비문인데 굉장히 독특하다. 무엇에 관한 내용인가?
자료 조사차 방문했던, 윤열수 인사동 박물관 원장님의 제안에서 힌트를 얻었다. 특히 비석에 있는 타이포가 흥미로워서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비문’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는 실험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이다.
정글 : 10군데 이상의 묘지를 찾아다녔다니 상당히 이색적인 경험인 것 같다.
비문이라는 주제로 접근해야 했기에 묘지에서만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처음 찾아간 곳은 망우리 공동묘지였는데, 탁본을 뜨기도 했던 일제치하 독립운동가들의 묘가 볼품없이 망우리 묘지에 내버려져 있어서 기분이 씁쓸했다.
그렇게 한참 탁본을 뜨다 보니 어느새 주위는 점점 어두워졌고 사람들의 발길도 끊겼다. 비문이 잘 보이지 않아서 감으로 작업할 정도로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다 주위를 정리하고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했는데 나중에 현상해보니 동일한 각도에서 몇초 차이로 찍은 사진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 카메라에 빛이 반사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주위엔 가로등 하나 없었고 그 몇 초 차이로 사진이 다르게 찍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의 사진
비문에서 추출한 텍스트는 큰 변화를 주기 어려웠기 때문에 바탕의 표현 기법에 역점을 두었다. 사람의 뒷모습은 실사이미지를 사용하여 우리에게 죽음이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표현했다.
정글 : ‘하늘’이란 주제는 다소 포괄적이다. 한국인의 우주관(하늘)은 무엇이며 어떻게 이미지로 구현했는가?
하늘은 특정한 도상을 가지지 않았고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때문에 하늘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옛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한 물건이나 일상적인 삶의 공간을 중심으로 그 안에 깃들어 있는 '하늘사상'을 담았다.
정글 : 자료 수집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뤄졌는지 그간의 행적을 얘기한다면?
우선 '우주관'이라는 말이 들어간 책이며 논문들을 모두 섭렵했다. 뜻도 정확히 몰랐지만 권당 10번 정도 읽으니까 대략적인 갈피가 잡히기 시작했다.
나일성 천문관을 찾아가기 위해, 장장 5시간이 걸려 도착한 예천은 허허벌판 위에 개미 한 마리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한 풍경이었다. 처음 버스에서 내렸을 때, 아무런 표지판도 없고 방법도 몰랐던 그 암담함이란 혼자 무인도에 떨어진 것 같았다. 다행히 친절한 그곳 경찰관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천문관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관리자의 시선을 피해가며 촬영은 불과 몇 분만에 마쳐야 했다. 그리고 경찰관의 설명으로 예천에 천문관을 세우게 된 이유라든가, 천문관 원장인 나일성 교수가 감옥에 수감된 얘기 등을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