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2-21
추위가 잦아들고 있다. 이제 봄바람이 솔솔 불길 기대해 볼 즈음이다.
2005년에 출판되어 지난 달 3쇄가 찍힌 ‘여행자의 로망백서’를 새삼스레 소개하는 것도 바로 이 봄바람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80% 즈음의 만족으로 일상을 멀쩡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바람을 폴폴 넣어서 여행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도록 만드는’ 이 책은 디자인과 사진과 일러스트보다도, 그 ‘기획과 내용의 디자인’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장점이 있다.
추억의 혹은 미지의 ‘여행자의 로망’, 그 100가지 이야기를 만나보자.
취재 | 김유진 기자 (egkim@jungle.co.kr)
책을 집어 든다. 박사, 이명석 지음. ‘여행자의 로망백서’. 누군가 톡톡톡톡 손끝으로 쳐서 완성한 듯한 타자기 냄새가 난다. 그리고, 은빛 사탕모양의 도장. ‘사탕발림’. 꽝!
마음을 정했다면, 슬슬 책 표지를 들쳐볼 차례다 어떤 이야기들로 여행의 ‘로망’을 논하는지.
일단 몇 장을 넘기다 보면, 차례에서 제시하는 6개의 라인 중 하나에 탑승을 해야 한다. 환승역은 없지만, 아무 역에서나 갈아타도 무방하다.
책에서 제시한 6개의 라인은 다음과 같다.
각 라인에는 호기심을 끌만한 각각의 로망들이 줄지어 있다. 현지인의 로망, 낯선 잠자리의 로망/ 환승 비행장의 로망, 완벽한 가이드 북의 로망/ 사운드 트랙의 로망, 모르는 말의 TV 로망, 이국문자의 로망/ 무료한 노천카페의 로망, 외국인인 척의 로망/ 여행일기의 로망, 도장 꽝의 로망/ 수상한 호텔 주인의 로망, 변장 여행객의 로망 등이 그것이다.
재미있게 짜여진 제목만 읽어도 설레는 로망들이 있는가 하면, 미처 겪지 못했던 것들, 혹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로망들의 나열되고 있다.
우리는 책 제목에서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다. ‘여행’과 관련된 책이라는 것, 그리고 ‘여행자’의 ‘감성’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여행에서 흔히 겪는 ‘고생’에서 기획되었다. 베트남에서 ‘왜 여기에 왔을까? 뭘 보자고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 하고 의문을 가졌다던 이명석씨는 결국 여행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즐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단어를 바로 ‘로망’이라고 표현했다.
분명 여행 책이지만, 그래서 이 책에는 실제적인 여행가이드나 정보가 없다. 이 책은 여행을 즐길 줄 아는 저자들이 ‘여행을 즐기는 방법’을 경험적으로 그리고 감성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붕붕 떠있는 기분이 된다. 중력의 법칙이 작용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나 몸에 한해서다. 책을 읽고 있는 마음은 이미 무중력 상태. 그게 안정이 되려면 떠나는 수밖에 없다. 답답한 일상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당신에게 ‘염장을 지르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 책의 정체성을 훼손해서는 안될 일이다.
여행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독자라도 불쑥불쑥 머리 속으로 들어오는 공감에 마음을 허락하는 일이 생긴다.
어떤 여행가이길래, 하는 생각은 날개를 뻗친다. 책을 읽다 말고, 그들에 대한 상상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그래서 뽑은 것이 ‘독자가 생각하는 여행 책을 쓴 사람들에 대한 로망 9’
그것이 진실인지는 저자인 박사(P)와 이명석(M)씨가 대답해 줄 것이다.
1. 어떤 도전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디아나 존스 로망’
(M) 사람을 만나고 약속을 하는 것도 피곤하게 여기곤 한다. 다만 ‘여행’은 인생의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부분이 있다.
(P) 생활 속의 이벤트는 좋아하지만, 몸은 사리는 편이다. 서바이벌에 약하다.
2. 그리고 그 어떤 위기나 위험에서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 로망’
(P) 위기를 이벤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그다지 위험한 상황을 겪은 적이 없는 것 같다.
(M) 책상 앞에 앉아있는 욕망을 많이 느끼지만, 여행지에서 문제가 생기면 피가 끓는다. 그런 면에서는 서바이벌을 좋아하고 즐긴다.
3. 여행을 하는데도 시간과 돈의 제약에서 자유로우며, 돌아와도 언제든지 돈을 벌 수 있는 환경일 것이라는 ‘사장님 로망’
(P) 우리는 알뜰하게 여행을 다닌다. 싼 항공권에 싼 숙박시설에 많이 걸으면서 여행을 한다. 돈이 많은 것이 아니다. 그러면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보다 저렴하다. 가끔은 마이너스의 재정상태에서 출발해 돌아와서 갚기도 한다.
(M) 프리랜서로 글을 쓰기 때문에, 여행을 다녀오면 일거리가 많이 떨어진다. 전화로 연락 해서 안되면, 몇 달 살다 온 줄 알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에서 우리는 싸게 많은 것을 해결한다. 이 때 인터넷 서핑이나 국외의 각종 커뮤니티나 사이트의 정보를 활용하는데, 작은 숙소 하나하나까지 예산단위, 신뢰도를 고려하여 선정한다. 스폰지라는 웹진을 하면서 얻은 검색능력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4. 혹 재미없는 여행이라고 해도, 특유의 감성과 생각으로 스스로 재미있게 만들 것이라는 ‘재미있는 영혼 로망’
(P) 재미있는 여행은 있었지만, 오히려 기억은 잘 안 난다. 고생하거나 동행이랑 싸웠을 때 그런 뾰족한 경험들이 오히려 기억에 남는다.
(M) 여행간의 비교는 하게 된다. 상황이나 여행 당시 여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은 돈으로 행복하게 살자는 인생 철학은 여행에서도 적용된다. 그 상황에서 항상 공상에 빠지고 많은 생각을 한다. 그래서 여행지에서는 많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여행은 가기 전도 좋고, 가서도 좋지만, 갔다 와서 그것을 떠올리고 또 보기 좋게 포장하고 자랑하는 것도 재미다.
5. 글을 잘쓰는 것은 물론이요, 사진도 잘 찍고, 그림도 잘 그릴 것이라는 ‘공감각 예술적 기질 로망’
(M) 글을 쓰는 것은 직업이다. 다른 분야는 재미있어서 많이 접근하는 것이다.
(P) 그런 것을 갖고 있으면 행복하다.
6. 일상뿐 아니라 여행에서도 폼나게 하고 다닐 것이라는 ‘패셔너블-스타일리쉬 로망’
(P) 패셔너블 한 게 아니라 패셔너블 하고 싶어진다. 이명석씨랑 함께 여행을 가도 사진을 잘 안찍는 편인데, 여행을 가면 아무래도 사진을 찍히게 되고, 예쁜 것도 많이 보니까 그런 욕구가 생긴다.
(M) 유럽에 처음 갔을 때, 꼬질꼬질 극빈여행을 했었다. 옷은 태도의 문제다. 그래야 스스로도 자신 있어진다. 여행객 티가 안 나게, 현지인으로 생각하도록 옷은 최대한 깔끔하게 해서 즐겁게 다니려고 노력한다.
7. 성격 또한 화끈하고 쿨할 것이라는 ‘쿨 걸, 쿨 가이 로망’
(P) 타인이나 타인의 기분에 영향을 많이 받기도 한다. 그런데 누군가는 나에게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고 하더라. 수다스럽고 다정하고 산만한 구석이 있고, 얼기설기 노는 것을 좋아한다.
(M) 냉정하고 쿨한 편이다.
8. 평소에는 게으르다 할지라도, 한번 해야겠다는 것이 있다면, 혹은 그 것을 위해 필요한 준비가 있다면 열정적으로 추진하고 실행에 옮길 것이라는 ‘한다면 한다 로망’
(P) 사실 맞다. 그런 편이다. 이번 원고만 해도 하루에 3~4편씩 쓰면서 막판 며칠 동안 스퍼트를 낸 것이다.
(M) 일에 있어서는 성실한 편이다. 책을 쓰는 것도 원고를 쓰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사회생활에 있어서는 게으르다. 그런데 여행가면 부지런해진다. 새벽 6시면 눈이 떠진다. 그렇게 특수한 상황에서는 ‘피가 끓는다’.
9. 왠지 특별하고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는 ‘해피 라이프 로망’
(P) 나는 ‘나’하고 연애한다는 심정을 살고 있다.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생각하곤 한다. 예를 들어 여행을 말하자면 ‘나’ 스스로에게 하는 선물 같은 것이다.
(M) 평소에 삶의 철학에 관심이 많다. 내가 직장생활을 안하고 글을 쓰는 것은 행복의 유통단계를 줄이고자 함이다. 직장에 다니고, 돈을 모으고, 아파트를 사고, 여유가 생기면 여행을 가는 이 긴 과정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누리는 가는 여행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게 그 사람의 자산이 된다고 생각한다. 여행은 행복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오는 경험이 된다. ‘적은 수익과 많은 시간으로’ 재미있게 살려고 노력한다.
장래희망이 ‘훌륭한 고양이’가 되는 것이었다는 박사씨와 ‘저술업자’로 자신을 소개하는 이명석씨. 그들을 만나는 것은 책의 저자들에 대한 ‘막연한 로망’을 구체화하는 또 하나의 필수 코스였다. 질문을 거듭할수록 ‘정말 다르다’고 느껴지는 박사씨와 이명석씨.
하지만 그들의 상호 보완은 ‘행복한 동행의 로망’의 적합한 주관식 답안과도 같았다.
Jungle : 로망 백서를 선정하는 작업에서 100개를 선정하기도, 또 의견을 모으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M) 편집자의 입장에서 100개의 균형이 안 잡힌 것 같은 부분이 아쉽다. 예를 들어 날씨와 관련된 ‘태양의 로망’, ‘폭풍의 로망’ 같은 부분은 작은 것이 나누어진 느낌이 있다.
(P) 100개의 목록을 뽑는 것도 오래 걸렸지만, 글을 쓰다보면 또 생겨나서 나중에는 P편/ M편을 나누는 게 어떨까 생각도 했었다.
내 경우에는 날씨 부분에 관한 리스트 업은 각각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짜피 로망은 주관적인 것이다. ‘심리적 순위’이다. 태양, 비, 폭풍 등 하나하나 모두 놓칠 수 없는 로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분리했다.
Jungle : 각각 라인으로 묶어서 보여진 것도 재미있다.
(M) 구획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여행의 각 부분을 신체로 배치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박사씨가 작위적이라고 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처음에는 내용적으로 임팩트를 두기 위해서 엔터테인 라인으로 시작하였고, 마지막에는 현실과 조금 벗어난 것, 여행을 통해 즐겁게 벌일 수 있는 것들을 판타지아 라인으로 정리했다.
Jungle : 이 책을 읽다 보면, 박사와 이명석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강하게 생긴다. 그만큼 책에 있어서 두 사람의 영향력이 크다고 말할 수 있는데, 책의 제작에 있어서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 궁금하다.
(P) 기획부터 원고를 쓰고 넘길 때까지가 우리가 제작에 관여했던 정도다. 다른 책에 비해서 많은 신경을 못 쓴 편이다. 그래서 걱정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책이 잘 나온 것 같다. 요즘 출판사에서는 책의 저자에게 많은 제약을 두고 컨트롤을 하는 편인데, 초기 기획단계나 원고를 쓰는 부분에 있어서 전혀 간섭 받지 않았다는 점도 만족스러웠다.
Jungle : 이 책을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P) 아무데나 펼쳐서 재미있게 봐주면 좋을 것 같다. 목차를 보면서 끌리는 내용을 먼저 가볍게 보면 될 것이다.
(M) 이 책은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 여행을 좋아하게끔 만드는 책이 아니다. 여행을 즐기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고, 여행의 다채로운 면모를 보여줌으로서 사람들에게 여행에 대한 충동을 느끼도록 자극하는 책이다.
이 책의 테마 중 일부를 자기 식으로 만들어서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쓴 블로그를 봤다. 이렇게 각각의 테마를 자기식대로 해석하고 만들어 나가는 것도 이 책을 적극적이고 재미있게 보는 방식이 될 것이다.
Jungle : 나름대로 초보여행자들을 위한 여행가이드를 제시한다면.
(P) 여행지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그 지역에 대한 공부도 그렇고, 언어도 해당된다. 간단한 현지어만 알아도 상대방은 매우 좋아한다. 그런 교류하는 느낌을 만끽하는 것도 여행의 재미다.
(M) 자신의 취향을 빨리 발견해서, 그 취향에 맞게 여행의 핵심적인 타겟을 설정하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필요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을 가서도 시큰둥 하다.
또한 욕심을 많이 부리지 말라고 조언하고 싶다. ‘여기 왔으니까 이건 꼭 해야지’라는 강박관념은 더 좋은 것을 놓치는 경우를 초래하기도 한다.
체력도 여기에 해당된다. 밥 먹는 것도 여행의 재미다.
Jungle : 책 표지에도 찍힌 ‘사탕발림 www.sugarspray.com’은 어떤 사이트인가.
(M) 이런 저런 문화적 관심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사이트다. 웹진 스폰지에서 독립해서 나오면서 만든 것인데, 요즘 스타일에 안 어울리고, 웹으로서도 좀 떨어지는 감이 있다. 사실 요즘에는 열심히 하고 있지는 않다.
Jungle : ‘내 인생의 로망’은 무엇인가.
(P) 시인이 되는 것이다. 대학에서 인도철학을 전공했지만, 시인이 되기 위해서 다시 문예창작에 입학해 시를 전공했다. 시를 못쓴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시인이 되는 것에 대해서 의심해 본 적은 없다.
(M) 현자가 되고 싶다. 현명하고 재미있게 살아갈 수 있게. 나는 행복한 무신론자이자 독신주의자다. 그렇게 100살까지 사는 것이 꿈이다. 몸을 기계로 만들어서 영생을 얻는다면 좋겠다.
고양이에 관한 책을 함께 썼으며, 앞으로 지도에 관한 책을 쓰게 될 것이라는 두 사람이성이든 감성이든 촉수가 더 긴 그들이 여행을 즐기는 오감에는 여행 정보보다 더 갚지고 재미있는 것이 들어있다.
‘여행자의 로망백서’가 내용과 기획의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조금은 불친절하게 느껴져도, 두 사람이 넣는 여행 바람이 일상을 한번쯤 과감하게 덮을 줄 아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