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1-16
새로운 문화와 발상을 받아들여 기존 사조를 개척하며 혁신적인 무언가를 낳는 것을 르네상스라 부른다면 동북아시아에도 르네상스는 엄연히. 그리고 꾸준히 존재했었다. 이 역시 나름의 문화운동답게 아래로, 아래로 스며들며 퍼져 갔는데, 이 가운데 조선의 미술 분야는 삼원삼재(三圓三齋)라 부르는 화가들이 두각을 드러내며 향유되었다. 삼원이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을 일컬음이고 삼재란 관아재(觀我齋) 조영석, 현재(玄齋) 심사정, 그리고 그 유명한 겸재(謙齋) 정선이다. 그 중에서도 겸재 정선의 전성기 시절 파워는 그 중 최강이었으니, 요즘으로 치자면 피카소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정도 되는 글로벌 슈퍼스타로 군림했다 할 수 있겠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당시 청나라로 떠나는 역관들은 정선의 집 앞에서 그의 그림 한 장이라도 얻어가기 위해 밤을 새워 기다렸다고 전해지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건 극히 당연한 일이다. 겸재의 그림이라면 청나라에선 부르는 게 값이었고, 말 그대로 한 장 팔아 삼대가 놀고먹을 돈을 버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이렇게 겸재의 그림자는 진경산수로 특징되어 산수화에 자아의 감상을 집어넣는 방식을 제시하며 당대의 유행을 지배했지만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이는 후대에 실학자들에게까지 파급되어 서양화의 작법. 그 중에서도 역동적인 구도가 합쳐지며 현대 한국화에까지 이어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당시 겸재는 비록 몰락한 사대부 출신이라고는 하나 일개 화가치고는 파격적인, 현감 벼슬까지 제수 받았다가 단 한번도 몰락함 없이 종2품의 벼슬까지 치솟아 올라갔다. 승급의 이유는 간단하다. 그림 잘 그려서! 단지 그림만 잘 그린다는 이유로 벼슬자리를 제수하심은 불가하다는 간언이 빗발쳤으나 그의 입지는 일말의 흔들림이 없었다. 자. 이제 슬그머니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어떻게, 무슨 끈을 잡았기에 이렇게 단단할 수 있었을까?
영∙정조시대의 유행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밭 갈던 농민들이나 노비가 아니라 사대부 계층이었다. 그들의 공감을 사기 위해선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었는데, 당시의 성리학자들은 크게 나누어 두 파로 갈려있었고 이것이 곧 당쟁의 기반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쪽에선 퇴계/율곡 학파의 노론/남인들이 성리학의 순수화/절대화를 주장하며 여당으로 집권 중이었고, 반대편에선 노장사상을 성리학에 끼워 맞춘 양명학파의 소론/서인들이 야당이 되어 있었던 거다. 이 와중에 겸재의 그림이 어필한 것은 바로 당대의 집권당이던 노론과 남인이었다.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헛갈리는 게 특기이던 노장사상은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어울리면 어울렸지 장엄하고도 호방한 화풍에는 당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정선은 그때까지 주류를 이루던 문인화의 공식화되어 있던 묘사전통을 무시하고 그냥 화끈하게 실경에 기인한 자신의 감상을 재구성함으로써 화폭에 풀어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일단 작품에 이 호방무쌍한 자아가 등장해 버리자 당대 집권당의 캐치프레이즈, 신유학의 학풍적 이해와 맞아떨어지기 시작한 거다.
말로 백날 떠드는 것보다는 실제적인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훨씬 그 이해가 빠른 법. 아무리 노장사상과 양명학으로 무장하여 마음의 수양을 중시하는 서인/소론의 학자들이라 해도 그 근본에는 인간의 감상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그것을 왜곡하여 유토피아를 주장하던 그들에게 겸재의 그림은 부인할 수 없는 충격이었고 그것을 중시하던 이들에게 그의 그림은 통쾌한 대자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겸재는 이렇게 스스로의 화풍에 대한 열광이 준비되어 있는 대중을 만났고, 자신을 강력하게 어필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이렇게 전국구 스타가 되어버리자 당시 흐르던 글로벌 조류는 한류를 발생시켰다.
당시 중국에 명나라가 있었다면 정선은 아마 중국의 양명학자들에게 조선의 야당이 내밀지 못했던 반격을 받아 그냥 그저 그런 환쟁이로 찍힌 채 조용히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와 양명학은 이미 청나라의 성립 이후 티끌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살난 지 한참이나 지난 이후였다. 하지만 당대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도 나름 고민거리가 있었다. 주자성리학이 집권층을 위한 훌륭한 이데올로기로 써먹긴 좋은 것 같은데, 반청복명운동에 시달리던 청나라로서는 아무래도 이 명나라의 학문이자 한족을 위한 학문인 양명학이 좀 꺼림직할 수 밖에 없었던 거다. 게다가 노장사상과 양명학은 도교로 흘러 들어가 반청복명의 핵심이 되어 있었음이니 말할 나위조차 없었다.
비스무리 하지만 살짝 다른 이데올로기가 절실했던 청나라, 성리학은 필요했지만 양명학은 용납할 수 없었던 청나라로서는 기존의 고증학에 조선에서 일어난 성리학 파동을 약간 고쳐 더해서 슬그머니 집권층의 이데올로기로 차용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조선에서 집권층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극상의 대자보가 나타났으니 더 말해 무엇 하리오.
예나 지금이나 상류층의 유행은 언더그라운드로 숨지 않는 법이니, 상류층이 열광하는 스타 작가의 작품은 부르는 것이 값이 될 정도로 중국을 휩쓸며 선풍적인 인기를 과시했다. 겸재의 작품은 일본에까지 건너가 신조선화라는 이름으로 조류를 굳히다가 일본의 판화에 영향을 끼쳤고, 이 일본판화는 뒷날 서양으로 흘러 들어가 인상파 미술에 그림자를 드리웠으니 이렇게 문화는 돌고 도는 법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8세기 최강의 한류스타이자 문인이며 화가인 겸재 정선이 잡았던 유행의 흐름이다. 조선과 청나라, 양국의 집권층을 아우르는 폭넓은 팬층은 그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주었고,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앞길을 보살펴 주었다.
30세 이전까지는 남들 다 그린다는 중국풍 남종문인화나 따라 그리며 살았던 겸재. 시쳇말로 그저 그런 환쟁이에 불과했던 정선은 문장력이 없어 따로 문집을 남기지도 않았고 유명해진 이후에도 그림에 글이나 화제(畵題)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과연 그가 이러한 출세의 끈을 알고서 잡았는지, 또는 그의 인간 됨됨이가 어땠는지의 여부조차도 오로지 그림에서만 읽어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찬연하게 쏟아지는 박연폭포를 바라보면서, 이러한 그림을 그려낸 작가가 과연 입신양명을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사상마저 바꾸어버린 속물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