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1-31
어린 시절 순진무구하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던 꼬마가 있었다. 좋은 뜻으로 해석하자면야 끝도 없겠다만,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사춘기 동안에도 꽤 오랫동안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으로 보아 그 꼬마는 참 징글징글할 정도로 철이 없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중섭의 소에서 어른들이 찬사를 바치곤 하던 소의 눈망울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는데, 난 그게 그 아이가 소만큼이나 순진해서였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대신 아이는 소의 움직임에 확 눈길이 갔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력을 다해 걷는 모습. 무언가 매달려 있는 뭔지 모를 무거운 것, 거의 대지만큼의 무게를 가졌던 것처럼 보이는 화면 전체를 억지로 끌어당기며 사력을 다해 걷는 모습. 그 무지막지할 정도로 엄청난 역동. 하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즐거워서 걸어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소를 저렇게 힘들게 걷게 하는 것일까.
질문은 그 후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서도 풀리지 않고 머리 속에 앙금처럼 남아 늘어붙어 있었지만, 이중섭에 대한 신화가 쏟아져 나오면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는 식의 암기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되자 오히려 아이의 뇌리 바깥으로 튕겨나가 버렸다. 암기란 자연스레 많이 봄으로서 늘어날 수 밖에 없는 노력의 산물일 뿐인데, 인위적으로 핵심만 짚어주는 평론가들이나 참고서 제작자들의 간섭이 뿌루퉁한 아이의 눈에는 영 마뜩잖았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자 이중섭은 아이에게로 돌아왔다. 꼬마의 눈이 더 이상 순진무구해 지지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완장 하나 채워주면 종놈도 장관 행세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상황은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이 맞다면 예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작가 혼자만의 몫은 아닌 것이라는 말이 된다. 예술가를 둘러싼 상황. 즉 그의 인간관계라거나, 경제적 여건 등 작은 일부터 시대적 상황까지 모두 갈무리되어 작가를 둘러싼 상황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작가의 내면. 즉 예술에 작용하여 빛나는 예술을 만들 수도, 그렇지 못한 망통 따라지를 만들 수도 있다는 얘기다.
자. 그렇다면 이 경우 우리 중섭이 형님은 어땠을까. 진짜 시대가 그를 만들었을까?
이중섭의 그림을 보면 우선 소름끼칠 정도의 갈구가 눈에 들어온다. 그게 소를 그린 것이던, 담배종이 은박지에 못으로 낙서한 것이던, 어느 작품을 보더라도 고요 속에서도 소리 없이 치뻗는 절규를 느낄 수 있다.
경쟁이 치열해 지고 사회가 각박해 지면서 그의 작품들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라는 생물 자체가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언제나 원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지만, 단지 그렇다기에는 그의 갈구가 너무나도 간절하다.
그에게 있어 그 무언가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절실하고 간절한 그 무엇. 그림을 그린다는 예술 활동을 통해 자위할 수 있는 삶의 목적. 미술시간에 밑줄 쳐 가며 외웠던 대로, 그것이 한낱 가족에 불과할 리가 없다. 목적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사람들인데, 이중섭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가족을 얻음으로써 따라올 수 있는 궁극적인 것. 그는 행복을 간원했던 것이다.
원래 이중섭은 일본과 한국에서는 나름 잘나가던 화가였다. 하기야 야수파와 인상주의가 상륙한 곳은 일본이었고, 나름 일본 유학파로서 화단에 등단했으니 당연한 노릇이겠지만 그는 동경과 경성을 오가며 전시회에 종종 출품하여 호평을 받았던 어엿한 작가였다.
하지만 그런 이중섭이 살았던 시기는 그야말로 격동이란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 혼란기 중의 혼란기였다. 일제 강점과 해방,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그 시기는 행복의 가치를 가족에게 두었던 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자를 이리저리 비틀고 눌러 예술혼을 쥐어짜 냈고, 세파 속에서 이리저리 눌려가던 그는 평생 사용할 에너지를 짧은 생애에 고갈 당한 채로 꼬챙이처럼 말라갔던 거다.
따라서 1916년 평안남도 어딘가에서 태어났다는 식의, 인터넷 사이트 5분만 찾아봐도 줄줄이 튀어나오는 그의 프로필 따위는 사실 그리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예술을 빛내줄 수 있는 시대적 유행이나 사조 같은 것, 사람들의 발상이 일으키는 변덕과 거기 맞물리는 예술의 위치 등도 하등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시기는 유행 따위가 존재할 수 없는, 더 쉽게 말해서 사람들이 그림이나 음악 등 예술에 눈을 돌릴 정신이 아예 거의 몰살당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기, 그러니까 일제 강점과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기에 그려진 이중섭의 그림은 오히려 시대가 그러했기 때문에 예술이 예술로서 존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소위 말하는 '쥐어 짜인 명작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스타일 적으로 살펴보면 이중섭은 야수파(포비즘)이라고 불리는 인상주의의 갈래를 이어받은 작가다. 그리고 그의 예술세계는 사실상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극단적인 역동으로 삶을 대처하는 자세와 희망사항을 그려나갔던 그는 자신의 활화산 같은 분출과 함께 정 반대의 정적 속에서 마치 진혼제라도 올리는 듯 아이들의 그림을 그려나감으로써 감성의 격정적인 분출, 흔히 야수라 불린 그림을 드러낸 거다.
먼저 절대적인 진리 하나. 누구나 다 아는 거겠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 야수파처럼 폭발적인 힘을 응축하여 내재시킨 다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인 미술 스타일에서는 극단적인 감정의 응축 증폭과, 순간적인 분출이 필연적인 법이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표현해 내기 위해선 작가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철저하게 조율해야만 한다. 감질나게 감출 곳과 해일처럼 내뿜을 곳을 스스로 제어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만약 예술가가 감정을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여유를 박탈할 경우 거기엔 무시무시한 대가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게 뭐냐고? 희로애락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뭐라 부르겠는가. 흔히 말하는 미친X이 되는 거다.
가장 간절한 감정은 무엇일까? 바로 욕구불만에 따른 갈구다.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등장하는 것이 간원이고 간원이 증폭된 것이 갈구이기 때문에 실상 인간이 살아가면서 이중섭 정도의 폭발적인 욕구불만을 야수파의 거친 붓터치 속에서 드러내기 위해 24시간 응축했다가 표현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어딘가에 무슨 문제가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예술가도 인간이다. 미치고 싶어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없는 법. 유럽에서 태동한 야수파는 그러한 간절한 욕구 충족을 염원하는 인간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 제한적인 사조였지만, 그 완성은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현실에 희망이 켜켜이 막혀있던 땅. 그러나 스스로를 표현할 줄 아는 예술가들이 즐비하던 땅. 바로 이중섭이 살아가던 대한민국, 1950년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