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3-09
충치가 생겼을 때 이빨을 뽑아야 한다는 것은 얼핏 보면 본인의 선택인 것 같지만, 충치의 당사자가 미취학 아동들일 경우 사실상 그것은 선택사항이 될 수 없다. 나 역시 난동을 피워 치과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결국 다른 치과로 이송되어서까지 그 이빨을 제거당했으니까. 그럴 때 어른들이 충치의 고통에 절규하면서도 뿌리 박혀 있는 자신의 것, 그러니까 뽑아내기 위해선 펜치와 같은 공구가 필요하며 뽑혀나가는 순간 죽을 정도의 아픔과 함께 텅 빈 피구멍을 만들어버리고 마는 그것을 사수하기 위해 정신줄 놓고 악을 쓰는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나야 하도 결사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어떤 협상도 거부하며 농성을 벌이고 버텼기 때문에 문을 부수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진압봉에 백기를 들었지만, 사실 어느 정도 나이 먹고 주변에 슬쩍 물어봐서 알아보니 당시의 나 정도로 치열하게 투쟁하던 주관 투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통은 오만 가지 감언이설로 아이를 달래고 구슬려 벌레 먹은 이빨을 뽑아버리기 마련인 것이다. 그럴 때 그 감언이설의 대상으로 이빨의 보상품이 되는 것은 보통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앞세우기 마련인데, 그건 무엇일까?
집안과 아이의 성별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은 미니카일 수도 있고, 봉제 곰인형일 수도 있다. 대신 아이가 잃어버리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당연히 이빨이지만, 사실상 더 중요한 것을 잃는다. 즉 아이는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빨 하나 뽑는데 거창하게 무슨 자유냐고? 물론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가 보기엔 별 게 아닐 수도 있다.
사탕을 핥을 수 있는 자유.
초콜렛을 먹을 수 있는 자유.
양치질을 하지 않고 잠들 수 있는 자유.
아직도 별 대단한 게 아닌 것 같은가? 하지만 이런 무한한 자유야말로 아이가 가지는 절대적 권리의 정수이며, 동심의 모든 것이다. 아이는 바로 그것을 잃는 것이고, 작가 드릭의 세계에서는 이 ‘좋았던 과거’. 즉 잃어버린 동심에 대한 애잔한 연가가 파스텔 톤으로 펼쳐진다. 옛날이 좋았지~♬ 그러나 잃어버린 자유에 대한 세레나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딘지 모를 섬뜩한 공포 또한 존재한다. 그 공포란 무엇일까? 바로 충치에 대한 공포다. 그의 세계 어딘가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 삐져나오는 검은 악마들. 촉수만 내보이고 있는 무서운 존재들. 충치들은 그의 동심을 갉아먹고 구멍을 뚫고 삐져나와 작가를 괴롭히는 두려운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렇게 직접적인 충치에 대한 고민일까? 이걸 알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작가의 의식 세계로 접어든 상태지만, 이제부터는 작가조차 알고는 있지만 왠지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의미의 무의식 속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점쟁이가 아니어서 사주만 놓고 뜯어볼 수도 없고, 그의 생일을 모르기 때문에 여성잡지의 별자리에 따른 성격풀이도 할 수 없다. 이럴 때 슬쩍 동원하는 것이 바로 감성과 직관에 밀려 한쪽에 찌그러져 있던 논리와 이성이다. 그 놈들이 그래 뵈어도 아주 쓸모 없는 밥벌레는 아닌 것이다. 벌레 먹은 이빨로 상징되는 것이 동심이라면, 이빨을 갉아먹은 충치로 상징되는 것은 무엇인가. 감성을 갉아먹는 것. 동심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사탕을 빨아먹을 수록 점점 옭아매며 다가오는 것. 설령 충치에 걸리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따를 수 밖에 없는 것. 바로 성장. 즉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숙명이다.
충치는 뽑아서 없앨 수 밖에 없듯이, 동심과 주관, 감성의 자리를 대치할 존재는 바로 성장과 객관, 그리고 이성이다. 작가는 성장을 두려워함으로써 이 이성의 등장을 두려워했다. 자신의 주관을 갉아먹고, 원치 않는 성장을 시켜버리고, 아이의 감성을 송두리째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어른들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뿐이니까, 그의 입장에서 이 이성이란 것은 하늘의 행성들을 신하로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을 가지고도 대적할 수 없는 적이었고 지상의 종말을 부른다는 아마겟돈보다도 훨씬 무서운 공포였으리라.
그러나 그것들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다. 혹시 작가 드릭이 만약 몇 달 전에 이빨을 뽑고 나서 갑자기 삘을 받아 이런 그림을 그렸다면, 그는 불세출의 천재라는 죄목을 달고 정신병원 108 호실에 수감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했던 동심의 상실. 사상 최악의 지못미 반역사건은 이미 흘러간 기억이 되어 파스텔톤의 체념으로 남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흘러간 과거는 지킬 수 없다. 단지 과거의 조각. 즉 기억만을 지킬 뿐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 아니던가. 기본적으로 예쁘고 소중하지 않았다면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하고 말지 아끼고 간직하려 들 리가 없다. 그러나 기억이 어제 일 같은 현실처럼 느껴진다면 그게 아름다워야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고운 화장을 하고, 조명을 비추는 등의 작업을 통해 기억을 추억으로 단장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기억이 화장빨과 조명빨, 심지어는 술빨까지 받아 고운 추억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곱고 아름답게 가꾸고 지킬 가치가 생기기 때문에, 작가는 거기에 파스텔을 칠하여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예쁘게 꾸며 내었다. 그러나 분명히 추억은 아름답고, 동심의 세계는 누구나 그리워하는 법이지만 2007년을 장식한 그의 작품을 보면 어딘가 한 구석이 퀭한 기분이 든다. 왜 그런 것일까. 왜 퀭하지? 난 어린 시절을 나름 처절하고 치열하게 보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의 작품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순전히 주관적인 의문이 생겨 버렸다. 그렇다면 주관적인 답은 무엇일까?
어린 시절, 어머니의 화단을 망쳤다가 꾸중을 들어본 경험이 있는가? 이 화단이란 것은 봄이 되면 예뻐지기 시작했다가 여름에 정점을 이루고 가을이 오면 사그라지기 시작하면서 겨울이 되면 볼품없이 찌그러진다. 하지만 그저 찌그러진 화단일 뿐이라고만 생각하고 그 위에서 동네 친구들을 모아 축구를 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종아리에 불이 날 거다. 왜? 그 화단에는 틀림없이 다음 해의 봄에 피어나 여름을 불태울 씨앗이 뿌려져 있기 때문이다.
현명한 이는 지금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설령 보기 흉한 맨땅만이 드러나 있더라도 그것을 아낄 줄 안다. 이 땅에 대한 사랑은 모 투기꾼처럼 땅바닥을 무한정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 뿌려진 아름다움의 씨앗, 즉 미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땅에서 피어나 꽃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풍족하게 해 줄 감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하기에 내 어머니는 현실에 불과했던 볼품없는 땅바닥마저 사랑하셨던 거고, 또한 그러했기에 찌그러진 현실의 땅바닥 만을 보고 비웃으며 동네 꼬마들을 불러모아 축구를 하면서 화단을 아예 작살을 내 놓았던 아들의 종아리에 '미래에 대한 교육'을 베푸셨던 거다.
2007년 드릭의 무제 시리즈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감성을 나타내고 있지만, 미래를 향한 씨앗이 제대로 드러나 있지 못하다. 희망이 나타나 있긴 한데, 그 위치가 삐딱한 것이다. 사람은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것이 본성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본성은 희망을 간원하는 것이다. 왜? 현실은 항상 시궁창이라거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궁창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시궁창에 피어날 수 있는 희망의 꽃은 연꽃이 유일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연꽃은 자신이 피어난 자리가 더러운 시궁창이라는 태생조차 자신의 아름다움을 수식할 수 있는 보조적 장치로 쓸 수 있는 아름다움의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지 않던가. 나도 이것을 알고, 작가도 안다. 아래 그림에서 실제로 작가는 자신의 그림에 연꽃을 배치함으로써 희망에 대한 시도를 드러냈다. 그런데 작가 드릭의 작품에 드러난 연꽃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연꽃은 잃어버린 과거의 왕권 내부에 피어나 있다. 희망은 과거에 있다? 있었다? 이렇게 되니 뭔가 이상한 거다. 과거를 수식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지나고 나면 허망해 지는데. 그래서 나는 드릭이 2007년에 뿌린 미래의 씨앗과 거기서 피어났던 연꽃의 위치가 삐딱하다 느끼는 거다. 그는 번지수가 살짝 빗나갔다는 것을 알까? 그리고 알고 있다면 저 그림을 그렸을 때부터 시간이 꽤 흐른 지금, 그의 연꽃은 어디에 피어났을까. 그의 갤러리 무제 시리즈는 2007년에서 끊겨있고, 드릭은 혼자 몰래 꽃구경 중일 것 같다. 억울하다. 단풍구경과 꽃구경은 원래 무리를 지어 다 함께 하는 게 더 재미있는데, 어째서 작가는 그걸 혼자만 즐기려 드는 건지. 그러지 말고 동무들이 모여 다 같이 즐기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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