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03
당신은 지금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중이냐고 물어보면 많은 이들은 고개를 내젓곤 한다. 더러는 아직까지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며 나를 비웃곤 한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약속이나 한 것처럼 현실의 벽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물정을 모른다고 조소하면서. 어쩌면 나는 진짜 물정을 모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다, 그 꿈이란 것에 도전하는 것이 과연 바보 같은 짓일까.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애초에 태어난 것부터 우리의 뜻이 아니었다고 항변하곤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증거는 없다. 단지 기억을 못할 뿐 아니든가. 정자 시절 우리가 헤엄친 것은 탄생을 위한 의지, 그것뿐이었다. 애초부터 우리의 의지였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건 단지 본능일 뿐 의지라 볼 수 없으니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 글쎄. 모름지기 본능이란 것은 가장 강력한 의지로서 이성의 지배마저 벗어난 존재. 가령 우리가 탄생을 위해 삼신할머니에게 뒷돈을 찔러줬을 지 아닐 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억지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이런 식으로 부득부득 우기면 어떻게든 말은 된다. 그 영역이야말로 인간이 들어갈 수 없는 완벽한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억지에 가까운 이런 가정조차 전혀 쓸데없는 공론 같지만 미지의 일에 대해 알고 싶다면 그때는 이런 가정도 필수적인 사전작업이 된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뜻에 따라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모든 일에는 동기와 증거가 있는 법. 그리고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먼저 그것들을 모아야 하는 게 탐정의 기본이다. 비록 기억은 못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미지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보통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찾다가 지친 많은 자들은 여기서 자신을 놓아버리기 쉽다. 그렇게 살면서 그냥 사는 대로 산다고 생각하고, 바람 부는 대로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기려 든다. 세상이란 게 결국 다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살다 보면 뜻대로 안 된다고 말할 뿐, 어디에도 자신의 탓은 없다. 적당히 타협해 버린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에는 현실주의만큼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스스로의 창피함을 무마하기 위해 세상은 원래 그런 모습이라는 환각을 전염시키곤 하는데, 이는 당연히 진실이 아니다. 저런 발상을 네 글자로 줄여보면 그것이 바로 '개똥철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생을 바치고도 운이 좋아야 찾을 수 있는 것. 죽어라 수영해서 어머니의 난자를 찾아간 이유. 하나의 개체로서 세상에 태어난 까닭, 독립적인 존재의 목적. 홍대 앞의 그 아가씨는 그것을 도(道)라 부르고,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을 꿈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일컬어 구도자라고 부르거나, 예술가라 부르는 것이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당연히 꿈을 찾는 일도 공짜가 아니다. 정자 상태로 치열한 경쟁을 뚫음으로써, 우리는 이미 세상에 대한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꿈 찾기를 시작해 보려는 노력부터 이미 만만치 않았던 거다. 그러므로 꿈에 도전하는 것은 인간의 일생을 바칠 만한 값이 충분한 궁극적인 가치다. 그러나 도전의 출발선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을 향해 달려갈 수는 없다. 예술가가 자신을 끝없이 돌아보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려는 고통스러운 시도는 이 꿈에 대한 도전의 스타트 지점을 확신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 한 예술가가 자신의 모습을 파악하여 제대로 된 도전을 벌이기 위해 어떠한 마음을 먹었는지 참조하기로 하자. 내가 말하고자 하는 예술가는 바로 일러스트레이터 홍원표다.
‘해봤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거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거야.’ – 정주영
홍원표는 원래부터 그림을 이렇게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프로필을 읽어보면 나름 꽤 괜찮은 수준의 이론적 토대를 가졌고, 기본적인 소묘의 실력도 훌륭한 작가이며, 상아탑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여 그 나름대로 수묵담채를 자유로이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 좋은 토대를 죄다 갈아엎고 이렇게 바뀌어 버렸을까. 결과만 보고 성급하게 예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씩 짚어보자.
먼저 동양화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여백?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다. 너무 멋있게 생각하려 들 일이 아니다. 선이 있음으로 해서 여백이 존재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 맑은 하늘 푸른 창해에 구름 한 조각을 길게 그어놓으면 사람들은 다들 구름을 볼 뿐 하늘을 주시하지 않는다. 여백은 거기 무언가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최대한 이용한 동양화의 장점은 선과 여백의 조화를 통한 그윽함과 무거움, 그리고 파격적일 정도로 파괴적인 능동과 전술한 모든 것에 대비되는 고요함에 있다. 어느 것 하나 가벼운 것은 없는데, 이 훌륭한 자아 표현의 수단 속에서 홍원표는 젊은 시절을 보냈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싹 변화시켜 버렸다. 모든 장르가 다 비슷하겠지만, 특히 동양화는 죽을 때까지 파고들어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공간이다. 따라서 중간에 궤도를 바꾸어 열차를 갈아탔다는 사실은 두 가지 가정을 생각할 수 있다. 동양화를 끝까지 팔 자신이 없어 용기를 잃었기 때문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홍원표가 찾아내었던 자신의 그림자와 동양화의 명시적인 특징이 상당히 벌어진 차이를 나타냈기 때문에 끝까지 간다 한들 만족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자신감과 용기를 잃었다는 가정은 홍원표의 바뀌어버린 그림 스타일에서 명백히 헛소리가 된다. 그의 그림 스타일이 그 완성도에서 거의 퇴보 수준으로까지 보일 만큼 단순간략화되어, 특기로 삼았던 소묘와 수묵의 그라데이션을 흩어버린 상태에서 디자인 스타일로 비추일 만큼 바뀔 수 있었던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를 송두리째 갈아엎을 정도의 용기를 가진 예술가가 단지 두렵고 무서워서 열심히 가고 있던 길을 포기한다? 이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가정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머리에 충격을 받아 과거의 세계를 접어버린 것이 아니다. 시기상으로 그의 묵화들을 나열해 보면, 점점 밝아지면서 어딘지 동양화와 어울리지 않기 시작하는 그의 밝은 그림이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동양화의 강점 중 하나는 그윽한 표현의 육중함으로 내면을 장악하는 박력에 있다는 게 상식. 그 박력은 우리의 감성을 강렬하게 밀어젖히고 들어오거나, 강렬한 충격을 주어 압박하며 파고들거나, 그도 아니라면 뇌리에 각인되듯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음으로써 서서히 스며들어 최종적으로 그 사람을 송두리째 물들여 버리는 그런 류의 능동적인 박력이다.
그러나 바뀌어버린 홍원표의 그림은 능동적인 박력과는 거리가 멀다. 머리에 앙금처럼 달라붙어 우리를 적셔오지도 않는다. 홍원표의 세계 속 인물들은 그저 그들만의 세계에서 자기들끼리 움직이며 살아갈 뿐, 우리의 감성을 강제적으로 자극하여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어떠한 몸짓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홍원표는 동양화의 대표적인 특성과 극히 상반되는 스타일을 구축해 낸 것이다.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모든 예술가에게 자신의 세계가 주는 중요성이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며, 이는 그의 작품 세계가 곧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반사하는 분신적 존재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쉽게 말해 작품이란 곧 예술가 자체의 모습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장르를 선택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해당 장르의 특징을 활용하여 작품을 제작한다는 뜻인데, 꽤 많은 작가들은 아무리 해당 장르가 훌륭하다 한들 결국 자기 자신의 작품 제작. 곧 스스로의 재구성에 대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하긴 안다고 해서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하다.
아는 대로 그려가면서 서서히 자신의 세계와 해당 장르가 나타낼 수 있는 특징을 적당히 연결시키는 것이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를 할 경우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세계의 지지 기반에 변형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없고, 그러한 변형을 용납하지 못하는 작가일 경우 아예 다년간 단련하여 숙달시킨 장르 자체를 바꿔버리는 용기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 케이스가 바로 홍원표다. 그리고 이러한 과감함을 보여준 작가는 두말할 나위 없이 한 가지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타협조차 외면하는 자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날 이끄는 한 가지 목적이 필요하다. -스티브 잡스
홍원표의 홈페이지에 그려진 온라인 일기장을 보면 해당 격언을 말하는 스티브 잡스가 있다. 상당히 싹수없는 배금주의자의 말처럼 들리지만 실상 이것은 자본주의에 머리 꼭대기까지 푹 빠진 무한경쟁주의자이자 디즈니 컴퍼니의 실력자가 거만스레 내뱉은 말로만 듣고 끝낼 것이 아니다. 이 말의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놀랍게도 목적론의 확립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걸어 나오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 맞추어 움직인다. 그 목적이란 바로 행복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그가 저술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다 보면 목적론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모든 목적의 가장 상위에 위치하는 목적, 즉 꿈은 바로 행복이 된다. 무척 그럴싸한 말이다. 불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자는 극도의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여기에 따르면 작가가 삼신할머니에게 뒷돈을 찔러가며 수억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태어난 목적이 드러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궁극적인 꿈, 홍원표가 스스로의 그림 스타일을 바꾼 까닭은 바로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단어 자체가 바로 ‘에우다이모이아(eudaimonia)’. 즉 ‘정위치에 잘 존재하는 것(bien etre)’이라고 했다. 뭐든지 제 자리에 위치할 때 우리는 행복하다? 결벽증 환자의 말 같지만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정위치를 찾아 거기에 위치하는 것이 행복의 정체라면, 이에 대한 도전은 명확한 정위치 파악 없이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비록 행복 찾기라는 목적은 동일할 지라도 예술가 개개인의 세부적인 특성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정위치의 위도와 경도 설정은 마땅히 작가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하기에 예술가, 혹은 작가의 자아 찾기란 그들 저마다의 행복을 향한 도전의 시도란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무슨 계기를 통해서였든 홍원표는 자신이 있어야 할 정위치를 최소한 어슴푸레하게나마 눈치 챘을 것이다. 그림 스타일을 하늘과 땅 차이로 바꿨다는 사실과, 바꾸어낸 스타일로 어느 정도 단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는 사실은 그것을 반증하며, 현실과 격차를 보일 수밖에 없는 파랑새를 잡기 위해 자신의 전부였던 것을 버릴 줄 알았다는 것은 그가 지닌 엄청난 용기를 나타낸다.
물론 일러스트레이터로서 필요한 요소, 지난 스타일로의 회귀 정도는 언제든지 반길 것이다. 난 시절의 동양화 없이는 결코 이러한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간단한 레벨 상승의 스킬 트리는 제쳐놓고서라도, 프로페셔널 상업예술가에게 있어 스타일이란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자신의 지난 발길을 되밟아 보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으며, 오히려 복습의 기회가 되어 오히려 반길 수도 있는 일일 수 있다. 따라서 작가 홍원표에게 동양화의 정취가 남아있는 작업을 부탁한다면 그는 별로 어려움 없이 당시의 모습을 수준급으로 구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다른 스타일의 그림을 진행하면서 얻어낸 모든 요소들이 동양화에 담길 것이고, 그렇게 본다면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어쩌면 동양화가 더 뛰어날 수도 있다. 아무래도 다른 스타일에서 체득하여 한 번 이상 숙성시킨 작품의 노하우들이 그 안에 담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그가 얻을 그 많은 작가적 깨달음은 적어도 동양화 안에서는 시도되는 빈도가 적어질 것이 확실하다.
그는 아직 꿈을 쟁취한 것도 아니며, 확실히 찾지도 못했다. 일순간은 행복했을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인간이란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며칠 자고 일어나면 다시 또 다른 욕심이 일어 떨치고 나가기 마련. 인간의 적응력은 놀라운 것이라 행복에마저 적응해 버리기 때문이기에 우리의 꿈은 영원히 잡을 수 없는 파랑새나 마찬가지다. 그저 끝없이 도전할 뿐, 결실을 맺기는 어려운 것이다. 허무해서 미칠 노릇이겠지만 그럴 가치가 있다. 꿈, 존재의 목적이 인간의 욕망에 마주하면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작 자체를 위해서일 뿐일망정 많은 것을 희생시켜야 하는 것. 그러나 단지 도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그 출발점에 서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행복해 지는 존재. 결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주어 목적을 충족시키는 파랑새. 그게 바로 꿈의 모습이다.
‘욕망이란 자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이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 스피노자
★ 정위치의 위도와 경도 설정 : 이는 지혜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영어 단어 몇 개, 토익 몇 점 이상이 지식이라면, 바라보아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지식의 범주를 벗어난 지혜라고 부른다. 현명함과 박식함의 차이, 위즈덤 (wisdom)과 널리지(knowledge)의 차이란 이런 거다.
홍원표 홈페이지